봉쇄 40일, 韓 선박 26척·선원 173명 묶여日 선박 통과에 "기국 복잡" 회피성 해명日, 헌법 9조 방패·개헌 카드로 트럼프 달래韓, 원잠 요청하며 정작 호르무즈 호송 불응종전 후 청구서 … 청해부대 재설계 불가피전문가 "소통 부족 만회 못하면 동맹 균열"
  • ▲ 지난 1일(현지시각) 인도 국적의 LPG 운반선 '잭 바산트'(Jag Vasant)호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해 뭄바이항에 입항하는 모습. ⓒAP·뉴시스
    ▲ 지난 1일(현지시각) 인도 국적의 LPG 운반선 '잭 바산트'(Jag Vasant)호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해 뭄바이항에 입항하는 모습. ⓒAP·뉴시스
    호르무즈 해협 봉쇄 40일째인 8일, 한국 선박 26척과 선원 173명이 여전히 페르시아만에 발이 묶여 있다. 이재명 정부는 '국제 연대 원칙론'을 고수하며 이란의 한국 선박 명단 제공 요청을 거부하고 인도적 지원 연계도 없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요청한 유조선 호위를 위한 동맹국 군함 파견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고, 편의치적(선박 소유주가 자국이 아닌 제3국에 선박을 등록해 국기를 달고 세금·인건비·규제 부담을 줄이려는 관행)에 따른 한국 선박 보호 기준도 국민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일본이 압바스 아락치 이란 외무장관과의 통화에서 항행의 자유에 대한 원칙론을 넘어 자국 선박 통행을 직접 논의해 긍정적 반응을 이끌어내고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대이란 군사작전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를 약속한 것과 대조적이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개방을 조건으로 '2주간 공격 중단'에 동의한 데 이어 이란도 2주간 휴전에 동의했다고 확인하면서 단기 휴전이 사실상 성립됐다. 이란 외무장관은 성명에서 공격이 중단되면 이란 군과의 조율을 통해 2주간 호르무즈 해협의 안전한 통행이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양측은 오는 10일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세부 협상을 이어갈 예정이다. 그러나 휴전이 곧 한국의 외교·안보 부담 해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호르무즈 해협 개방 이후 항행 안전을 누가 책임질 것인지를 둘러싼 역할 분담 압박이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 ▲ 미국의 대이란 전쟁 개시 이후 중동에 증강 배치된 미 해군 전력 현황. 항모전단 3개, 해병원정대(MEU) 2개, 82공정사단 등이 순차 투입되면 4월 중순께 본격 작전이 가능한 전력 구도가 완성될 것으로 분석된다. ⓒ김민석 서울안보포럼 이사장 제공
    ▲ 미국의 대이란 전쟁 개시 이후 중동에 증강 배치된 미 해군 전력 현황. 항모전단 3개, 해병원정대(MEU) 2개, 82공정사단 등이 순차 투입되면 4월 중순께 본격 작전이 가능한 전력 구도가 완성될 것으로 분석된다. ⓒ김민석 서울안보포럼 이사장 제공
    ◆"이란전쟁, 아직 본게임 아니다"… 4월 중순이 분수령

    미국의 대이란 전쟁은 아직 본격 국면에 접어들지 않았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국방부 대변인을 지낸 김민석 서울안보포럼 이사장은 7일 세종연구소와 서울안보포럼이 공동 개최한 세종열린포럼에서 "현재의 전개 양상은 전형적인 1단계, 즉 환경 조성 국면"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이 연일 강경 발언을 쏟아내는 것은 4월 중순 본격 작전을 위한 시간표를 끌고 가기 위한 정치·군사적 기만전이자 협상 여지를 남겨두려는 의도"라고 풀이했다.

    항모전단과 해병원정대, 82공정사단 증강 배치가 마무리되는 이달 중순 이후에야 미군은 본격적인 상륙·지상 작전을 개시할 수 있는 전력 구도를 갖추게 된다.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하는 제31해병원정대(MEU)와 미국 캘리포니아에 주둔하는 11MEU는 향후 작전 구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특히 한반도 유사시 가장 먼저 투입되는 신속 대응 부대인 31MEU가 중동으로 향했다는 사실은 미 해병대 상륙전의 무게중심이 단기간에 이란 남부로 옮겨졌음을 시사한다.

    문제는 전쟁의 향방과 무관하게 한국의 선택지가 좁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호르무즈 해협을 이용하는 국가들이 자국 선박 보호를 위해 군함을 파견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요구한 바 있다. '에너지 자립국인 미국은 2선 지원을 할 테니 호르무즈 의존도가 높은 나라들이 직접 해협을 챙기라'고 요구한 만큼 미국은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면 동맹국에 청구서를 내밀 공산이 크다.

    이재명 정부가 지금 '원칙론'으로 버티더라도 종전 이후에는 더 불리한 조건에서 사실상의 파병 압박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국제법은 호르무즈 해협에서의 통과통항권(항행의 자유)을 보장하고 있지만 그 권리를 지키는 비용은 결국 '이용국'이 분담해야 한다는 것이 트럼프 행정부의 논리다.
  • ▲ 강훈식 비서실장이 지난 7일 청와대에서 열린 중동 상황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는 모습. ⓒ뉴시스
    ▲ 강훈식 비서실장이 지난 7일 청와대에서 열린 중동 상황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는 모습. ⓒ뉴시스
    ◆이란 명단 요청 거부 …"기국 논리는 책임 회피"

    물론 페르시아만에 묶인 전체 약 2000척의 선박 중 일부 타국 선박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고 있는데도 정부가 이란 측의 선박 명단 요청에 응하지 않는 데는 나름의 논거가 있다. 이란이 명단을 받으면 미국과 연관된 선박을 골라내 통과를 '불허'하는 방식으로 대미 레버리지를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전직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뉴데일리에 "일본·프랑스 선박이 통과했다는 사실은 정부 입장에서 가장 아픈 부분일 것"이라며 "기국 논리로 방어하는 것은 책임 회피식 대응"이라고 비판했다. 선박은 기국 등록 국가, 선주, 선사, 화주 등 네 가지 요소가 서로 분리돼 운영되는 경우가 많은데, 외교부와 청와대 국가안보실이 26척의 구체적 명단을 공개하지 않는 것은 선박의 국적·소유·운항·화물 주체를 모두 파악하는 작업 자체가 까다로워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지적이다.

    전직 당국자는 "한국은 수수료를 받고 선박을 등록하는데 필요한 국적을 빌려주는 편의치적국을 활용해 소유주가 한국인임에도 외국 기국으로 등록된 선박이 많다"며 "이런 구조적 현실에서 정부가 우선적으로 밝혀야 할 것은 어디까지 한국 선박으로 규정하고 보호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다. 정부는 기국, 선주, 선사, 화주 등 요소별 기준을 제시하며 적극 대응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9일(현지시각) 백악관 집무실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 회담하는 모습. ⓒAP·뉴시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9일(현지시각) 백악관 집무실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 회담하는 모습. ⓒAP·뉴시스
    ◆日은 헌법 9조로 돌파 … 韓은 원잠 요청하며 호송은 거부

    한국과 대조적으로 일본은 미국의 파병 요구를 에둘러 거절하면서도 트럼프 대통령의 비난은 최대한 피해 나갔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는 지난달 19일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평화헌법 9조에 따른 법적 제약을 직접 설명하며 즉각적인 파병 확답을 유보했다. 대신 알래스카산 원유 수입 2배 확대 등 경제적 기여를 카드로 제시해 트럼프 대통령의 긍정적 반응을 이끌어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달리 책임을 지려 한다고 평가하며 주일미군 방위비 증액 압박도 하지 않았다. 외교가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일찌감치 다카이치 총리의 개헌 노선에 공개 지지를 표명했을 정도로 미일 간 정치적 신뢰가 구축돼 있고 다카이치 총리가 헌법 개정을 통한 대중국 견제 기여 의지를 내세워 파병 논란을 돌파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재명 대통령도 지난해 10월 29일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계기 한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원자력추진 잠수함(핵추진 잠수함) 연료 공급과 핵연료 재처리·우라늄 농축을 위한 한미 원자력협정 조기 개정을 요청하며 동맹 현대화 의지를 밝혔다. 당시 이 대통령은 "디젤잠수함이 잠항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북한, 중국 쪽 잠수함의 추적 활동에 제한이 있다"며 "(핵추진잠수함) 연료 공급을 허용해 주면 우리 기술로 재래식 무기를 탑재한 잠수함을 여러 척 건조하겠다. (한국이) 한반도 동해, 서해에 해역 방어 활동을 하면 미군의 부담도 상당히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정작 트럼프 대통령이 지금 당장 요구하는 것은 한국의 원잠 도입이 아니라 호르무즈 해협 호송을 위한 군함 파견이다. 한국이 미군의 부담을 줄여주겠다며 미래의 자산인 원잠 도입을 요청하면서 미군이 현재 가장 필요로 하는 호르무즈 호송에는 응하지 않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 ▲ 김성완 청해부대 46진 부대장이 지난 2월 12일 경남 창원시 진해군항에서 열린 청해부대 46진 입항 환영행사에서 김경률 해군작전사령관에게 파병복귀 신고를 하는 모습. ⓒ해군 진해기지사령부 제공
    ▲ 김성완 청해부대 46진 부대장이 지난 2월 12일 경남 창원시 진해군항에서 열린 청해부대 46진 입항 환영행사에서 김경률 해군작전사령관에게 파병복귀 신고를 하는 모습. ⓒ해군 진해기지사령부 제공
    ◆청해부대 역할 재설계 불가피 …"한미동맹 균열 현실화할 수도"

    한국 경제가 중동 해상 교역과 원유 수입에 구조적으로 의존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호르무즈 항행 안전을 둘러싼 다국적 해군 체제 논의는 청해부대의 역할 재설계를 불가피하게 만들 외교·안보 변수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이미 아덴만에서 청해부대를 운용해 온 한국이 호르무즈 항로 안정화 국면에서 최소한의 기여조차 하지 않는다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통과통항권(항행의 자유) 수호를 위한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사실상 청해부대 전력의 임무·작전구역 조정, 필요 시 추가 전력 파견까지 포함한 한국판 선택지가 테이블 위에 올라올 수 있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전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호르무즈 사태에서 다섯 국가를 지목하며 한국의 적극적 역할을 촉구했다"며 "정부가 미국과의 소통 부족을 만회하지 못한다면 트럼프의 거래적 동맹관 속에서 한미동맹 균열이 현실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와 관련해 한 예비역 장성은 "청해부대의 임무를 해적 퇴치에서 호송으로 전환하려면 기항지 변경, 연합태스크포스(CTF) 내 임무 조정 협의, 장비 재편 등 검토해야 할 사항이 한둘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번 사태에서 가장 큰 문제는 한국에 대한 트럼프의 신뢰가 훼손됐다는 점"이라며 "향후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원자력협정 개정 등 우리가 요구할 사안이 산적한 상황에서 원칙론만 내세우다 관망으로 끝난 것은 협상력을 스스로 갉아먹은 것"이라고 우려했다. 아울러 "미국이 인도·태평양 전략 속에서 미군을 재편하는 과정에서도 우리가 협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중동 사태가 한반도 안보에 직결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