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진이 20만 원대인데 특혜받았다고 비난""특혜를 받은 게 아니라, 제가 특혜를 준 것""한쪽으로 기울면 반대로 돌려 균형 잡아야" "정치는 평생의 꿈 … 멈추지 않고 도전할 것"
  • 대한민국에서 '우파 성향'을 드러내고 사는 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사회 각 분야가 '좌편향' 된 탓에 조금만 '바른' 소리를 내도 이상한 사람 취급받기 십상이다.

    일반인들도 그러한데 얼굴이 잘 알려진 연예인들은 오죽할까. 지금까지 보수 우파 성향을 내비쳤던 연예인 가운데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다. 비난 여론과 외압에 못 이겨 현업을 등지거나 말문을 닫는 경우가 부지기수. 지난 문재인 정권 때부터 8년째 이어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웃픈' 현실이다.

    이런 혼탁하고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보석처럼 빛나는 존재가 있다. '내시' 캐릭터로 잘 알려진 개그맨 김영민(44)은 2017년부터 '대놓고' 보수당을 지지하고 있는 '폴리테이너(Politainer)'다. 

    남들이 뭐라 해도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며 당당히 제 목소리를 내는 그에게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이들도 많지만, 반대로 멸시와 증오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이들이 도처에 깔려 있어 사실상 '가시밭길'을 가는 형국이다.

    한때 '개콘' 출신 개그맨으로 인기 가도를 달렸던 김영민은 정치 성향을 드러낸 뒤로 방송이나 행사 섭외에서 밀리고, 근근히 꾸려나가고 있는 행사대행업마저 수주가 막히는 '첩첩산중'의 길을 걷고 있다. 

    심지어 마진이 적어 다른 업체들이 기피하는 소규모 예산의 행사들만 맡고 있음에도 '부산시 강서구에서 전체 문화 행사 중 절반가량을 김영민에게 몰아줬다'는 식의 보도가 나와, 졸지에 '특혜 받는 연예인'이라는 오명까지 썼다. 

    유튜브 방송을 통해 "올해 강서구에서 수주한 행사 4건의 총 마진이 250만 원도 안 된다"고 아무리 해명을 해도, 한 번 아로새겨진 부정적 이미지는 좀처럼 가시질 않고 있다.
  • '삼인성호(三人成虎)'라 했던가? 김영민이 처한 상황을 보면, 세 사람이 모여 말을 맞추면 없던 호랑이도 만들어 낸다는 옛말이 떠오른다. 

    가뜩이나 '좌표'가 찍힌 그에게 온정의 손길을 내미는 이들이 적은 상황에, 지역 언론마저 등을 돌리니 김영민의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는 형국이다.

    그럼에도 그는 '웃음'을 잃지 않는다. IMF 당시 고등학고 진학을 포기하고 공사판을 전전했던 탓에 웬만한 고생에는 이골이 났다. 음식 배달하면서 '잔반'으로만 살아본 적도 있다. 그때도 '내가 이겼다'는 승리감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던 그다. 

    학창 시절엔 가족 때문에, 지금은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구독자 때문에라도 웃음을 포기할 수 없다는 김영민. 작은 성취 후 입가에 스며드는 웃음은 그 어떤 보약보다도 강렬한 힘과 용기를 준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김영민은 "웃음만큼 전파력이 강한 것도 없다"며 "웃음이라는 행복 바이러스가 자신에게도 힘이 되지만 주변에까지 긍정의 에너지를 전파하는 매개체가 된다"고 말한다. 

    사실상 개그맨 생활을 접은지 오래됐음에도 그가 여전히 '웃음 전도사'를 자처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도 유튜브 채널에 나와 '오른 목소리'로 긍정의 에너지를 전하고 있는 김영민을 만나 봤다.
  • Q. 대학에서 전자디지털음악을 전공하셨던데, 원래 꿈이 뮤지션이었나요?

    - 어릴 때부터 제 꿈은 '정치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꿈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꿈을 물어 보면, 대통령이 되겠다거나 과학자가 되겠다고 하는 아이들이 많잖아요? 하지만 그 꿈을 간직하고 계속 노력하는 경우는 드물죠. 저는 초등학교 때 품었던 꿈이 변수 없이 계속 가고 있는 상황인데요. 어릴 땐 좀 막연했다면 중학교에 들어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배우면서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했어요. 자연스럽게 대통령 '덕질'을 하게 됐다고나 할까요?

    Q.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 어떤 선생님께서 박정희, 이승만, 이렇게 존칭 없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상당히 비판적으로 말씀하셨어요. 어린 제가 보기에도 상당한 업적이 있어 보였는데, 선생님은 그분들을 깎아내리기 일쑤였죠. 또 "조선일보는 자전거를 주니까 보는 거다" 이렇게 가르치는 분도 계셨어요.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잘못됐고,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리석을 리는 없는데 너무 한 쪽으로만 몰아가는 게 이상했어요. 

    역사를 너무 감정적으로 가르치고…, 저희들에게 누군가를 미워하도록 하고 또 나쁜 사람이라고 가르치는 게 이해가 안 갔죠. 그래서 나름대로 역사를 공부하게 됐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덕질'의 세계로 빠져 들었죠. 
     
    Q. 어릴 때 그런 생각을 주위 어른들에게 말해 본 적이 있나요?

    - 사실 어린 시절, 가족을 포함해 주변 어르신들로부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는데요. 좀전에 말씀드렸던, 특히 정치와 관련해서는 저로선 납득이 가질 않는 이야기들도 많이 하셨어요. 그렇게 의아함을 갖고 있다가 기회가 생기면 제 생각을 말씀드렸는데요. 제 주변 사람들 생각이 다 저와 달랐기 때문에 그분들을 설득하거나 이해시키는 게 대단히 힘들었어요. 

    그때부터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조근조근 설득하는 방법을 체득하게 됐어요. 항상 내 가족을 설득한다고 생각하면서 이야기하다 보니, 말투가 계속 다듬어지고 다듬어져서 지금의 화법이 나온 것 같아요. 
  • Q. 어린 시절부터 '정치인'이 꿈이었다면 당연히 공부를 열심히 하셨을 것 같은데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신 이유가 뭔가요?

    - 중학교 졸업 무렵 IMF가 터졌어요. 원래 저희 집안이 공부를 좀 빡세게 하는 편이에요. 사촌들도 의대나 카이스트에 가는 등 다 좋은 학교에 진학했고요. 저희 집안이 주저앉는 시점에 누나가 이화여대를 합격해 버렸어요. 저도 중학교 때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제가 남자이기도 하고…. 사정상 생활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 온 가족이 다 뿔뿔이 흩어져 살았는데, 저는 일거리를 찾아 공사장을 전전하게 됐죠. 

    소위 '노가다'라고 하죠? 저도 그 세계에 뛰어들었는데, 피지컬이 좀 안 돼서 '열 관리사 시다' 같은 걸 했어요. 보일러 설비를 하는 분을 보조하는 역할인데요. 룸 스위치 전등 다는 걸 하나 가르쳐 주면 하나 달고. 뭐 그런 일들이요. 밥 배달이나 철가방 배달도 했어요. 

    그렇게 지내다 보니 대학을 가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었는데요. 일단 대학을 갈 수 있는 자격까지는 만들어 놓자는 생각에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패스했고,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에 있는 학원에서 몰래 강의를 듣기도 했어요. 돈이 너무 없던 시절이라, 물불 가릴 틈이 없었죠.

    Q. 숙식은 어디에서 해결하셨나요?

    - 남원에서 혼자 서울로 올라와 고시원에서 살았죠. 낮엔 일하고 밤엔 공부하는 주경야독 생활을 했어요. 교과서는 하나도 안 보고, 문제풀이랑 공통 수학, 이런 것만 파고 들었죠. 그 당시엔 대학 진학이 목표였기 때문에 제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책을 찾으려 했어요. 

    고민 끝에 실기를 보는 예체능을 택했는데요. 사실 어렸을 때 집안 형편이 괜찮아서 피아노, 바이올린 등 좀 비용이 드는 사교육을 많이 받았거든요. 개인기로 보여줄 수 있는 악기 연주와, 전반적인 음악 교양에 대한 필기시험을 치렀는데 다행히 합격했죠.

    Q. 원래 음악적 소양도 탁월하셨었군요?

    - 제가 원래 음악도 좋아하고, 예술 분야를 전반적으로 좋아하는 편이에요. 하지만 제 스스로 제 재능을 높게 평가하지는 않아요. 이런저런 객관화할 수 있는 그런 계기들이 많았거든요. 어렸을 때 큰 무대에 서는 아티스트들을 볼 기회도 많았죠. 저희 집이 정치 활동을 많이 하던 집안이었어요. 지역에서 행사 같은 게 열리면 집에 가수들이 찾아와서 식사도 하고 그랬거든요.
  • Q. 어쨌든 정치에 대한 꿈은 마음속에 품고 있지만, 대학 전공은 전혀 다른 길을 택하셨습니다.

    - 대학 가서도 했던 게, 학년 대표로 선거에 나가서 학생회장이 됐어요. 거의 몰표로 당선됐죠. 사실 중학교 때도 반장을 도맡아 했었어요.

    Q.
    그때부터 끼가 있었군요.

    - 당시 '난타'를 기획했던 송승환 선배님이 되게 핫했는데요. 저런 길도 있구나. 그러니까 당장 정치로 뛰어드는 것보다, 문화 전반적인 경험을 좀 쌓아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때 제일 인기 있었던 콘텐츠가 바로 '개그콘서트'였죠. 저기에서 작가든 스태프든 뭐든 한 번 일해 보고 싶었어요. 그러던 차에 2004년 4월에 KBS '폭소클럽'으로 데뷔하게 됐고, 2008년에 23기 특채로 KBS '개그콘서트'에 합류했어요. 제 인생 캐릭터가 된 '내시' 연기는 2011~2012년 무렵 '개그콘서트 - 감수성' 코너에서 했죠. 

    Q. 전사(前史)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김영민 씨를 단순히 '개콘' 출신 개그맨으로만 기억하시는 분들은 작금의 행보를 대단히 낯설고 의아하게 받아들이실 것 같습니다. 소위 '잘 나가는' 개그맨으로 활동하다가 어떤 계기로 우파 성향 '시사 유튜버'가 됐나요?

    - 많은 분들이 잘 모르시는데, 제가 거친 직업들이 좀 많습니다. 음악과 연기, 코미디와 관련된 일은 거의 다 했던 것 같아요. 데뷔 전엔 중학교에서 방과 후 강사로 음악을 가르쳤고요. '폭소클럽'으로 데뷔한 후에도 밴드에서 보컬과 베이시스트로 활동하기도 했죠. 경찰청 유튜브 채널에 있는 '사람이 보이면 일단 멈춤'이라는 노래도 제가 만들었어요. 

    부산에서 소극장 공연도 자주 했는데요. 해운대구 구립 예술단 '해운대 개그학과'에서 단장을 맡으면서 청소년들 대상으로 공연도 많이 했어요. 2017년부터 해운대문화놀이센터장을 맡았는데요. 그때 만든 유튜브 채널명이 '내시십분'이에요.
  • Q. 그 유명한 '내시십분'이 여기에서 나왔군요.

    - '내시십분'은 '내시가 매일 오후 4시에 10분 동안 하는 방송'을 의미합니다. 원래는 아이들의 역사 공부를 돕기 위해 만든 채널이에요. 지자체 산하 기관장으로 일할 때 주 이용객인 어린이 청소년을 위해 역사 채널을 열었는데요. 방송을 보던 분들이 제 정치 성향이 은근슬쩍 드러난다는 이야기를 하셨어요. 아무래도 역사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랬던 모양이에요. 

    그러면서 제가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아도, '저 친구는 우리 편이 아니구나'라는 인식이 박혔죠. 또 그때 제가 새누리당 부산광역시당 혁신위원에 몸담기도 해서 소위 '좌표'가 찍혔어요. 제가 있던 기관에 저에 대한 민원이 쏟아진 거죠. 담당 공무원들이 거의 업무가 마비되는 수준으로 민원을 받았다고 해요. 결국 그 기관에서 물러나면서부터 어쩔 수 없이 유튜브에 전념했던 것 같아요.

    사실 모두가 페이스북이 있고 자기 채널이 있는 시대잖아요. 그렇게 각자 자기 생각을 자신의 채널에 올리듯이 저도 그렇게 했는데, 이게 생각보다 너무 많은 분들이 보시는 거예요. 그 바람에 일이 커졌죠. 그 이후로 하고 있던 방송에서 하차하고, 지자체 '강연자 풀'에서 빠지고, 일거리가 계속 줄어들었죠. 이게 2017년부터 벌어진 일들입니다.

    제 유튜브는 조회 수는 많아도 돈은 안 되는 유튜브거든요. 궁리 끝에 '내시플라워'라는 업체를 차려 화환 사업을 시작했어요. 또 제 장기를 살려서 장비 렌탈업도 병행했어요. 수중에 몇천만 원 있던 걸 싹 다 털어서 스피커, 케이블, 의자, 천막 이런 걸 산 거죠. 

    지자체 행사를 고정적으로 따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굉장히 쉽게 돈을 벌기 때문에 고된 일을 잘 안 하는 편인데요. 전 제가 직접 다 해요. 용달차에서 스피커나 장비를 내리고, 현장에 앉아가지고 콘솔을 만지고…, 이런 것들을 직접 하죠. 그렇게 하루 종일 일해서 20만~30만 원 남기는 게 제 일이에요. 
  • Q. 하고 계신 '장비 렌탈업'이 소위 몸으로 때우는 일이고, 마진도 얼마 되지 않는다는 말씀인데요. 그런데 최근 한 지역방송에서 김영민 씨가 한 지자체로부터 '일감 몰아주기' 특혜를 받아, 마치 엄청난 이익을 챙겨온 것처럼 보도했습니다.

    - 전 마진이 얼마 안 남는 일이라 해도 이렇게 생계만 유지할 수 있다면, 제가 하고 싶은, 이런 목소리를 내는 활동을 계속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한 매체의 보도로 인해 제 일감이 한순간에 완전히 끊겼어요. 마진은커녕, 생계 유지조차 하기 힘든 지경에 내몰린 거죠.

    지난 9월 한 지역방송사 A사가, 제가 2023년부터 부산 강서구가 발주한 행사를 수주해 왔다면서 3년 동안 수의계약 형태로 전체 행사의 3분의 1가량을 수주했고, 특히 올해 강서구가 전체 문화 행사의 절반가량을 저에게 몰아줬다고 보도했어요. 3년 동안 총 32건의 강서구 행사대행 중 제가 10건을 가져갔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정치적 편향성으로 인한 우려가 컸는데도, 청소년 관련 행사를 비롯해 다양한 행사를 대행했다고 저를 비판했어요. 

    사실 이 보도는 되게 창피한 겁니다. 방송사 입장에서. 제가 전체 행사의 3분의 1가량을 수주했다는 게 말이 안 돼요. 올해 기준으로 제가 4건을 수주했는데, 이게 강서구 전체 문화 행사의 절반이라면 1년에 행사가 8개여야 되잖아요. 그런데 지자체 행사가 연간 8개일 리는 없거든요. 

    또 3년 동안 총 32건 중에 제가 3분의 1을 수주했다고 하는데, 그 얘기는 지자체 행사가 1년에 10건 정도밖에 안 됐다는 소리예요. 이게 납득이 되시나요? 수치적으로 말이 안 돼요. 이건 농구 경기에서 한 선수가 도움 2개를 했는데, '폭풍 2도움'이라고 보도한 꼴입니다.

    아마도 건 수로 이야기하는 게 더 자극적일 것 같아서 건 수로 이야기한 것 같은데요. 일반적으로 '벚꽃 축제'다, 뭐다 하면 뭐 기본 몇천만 원에서 억 단위로 가죠. 그런데요, 제가 올해 맡았던 4건의 행사들은 건당 총 예산이 299만 원, 420만 원 수준에 불과한 소규모 행사들이에요. 지자체에서 저한테 이런 행사를 맡기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그 예산으로는 저밖에 할 사람이 없거든요.

    4개 중에 하나가 준공식이었요. 지자체에서 제일 많은 행사가 준공식, 기공식인데요. 그날 제가 한 건 무대 세팅하고, 아나운서 섭외하고, 의자 깔고, 천막까지 치고, 퍼포먼스용 시삽식과 테이프 커팅식도 준비했어요. 그런데 총 예산은 400만 원 정도였어요. 이걸 맡을 사람이 없어서 저한테 떨어진 겁니다. 

    또 하나는 총 예산이 1000만 원 정도인데, 행사를 네 번 하래요. 날짜를 다르게 해서. 그럼 200만 원대 행사를 4번 진행하는 건데, 음향 설치하고, MC나 공연팀까지 섭외하면 남는 게 있겠습니까? 그래서 아무도 안 받는 겁니다. 사실상 제가 특혜를 받은 게 아니라, 제가 특혜를 준 거죠. 

    이 지역에는 '토마토 축제'도 있고, '전어 축제'나 '벚꽃 축제'도 엄청 크게 해요. 저는 그런 대형 행사를 수주한 적이 없습니다. 부산 지역에서는 웬만하면 저한테 일을 안 주거든요. 뭐라도 한 번 주면 민원에 시달리니까. 그러니까 저는 그런 행사에는 끼어들지도 못하고 일용직처럼 인건비라도 발생하는 곳이 있으면 달려가는 겁니다. 그렇게 4개를 겨우 했는데, 그게 뉴스에 박제가 돼서 마치 특혜를 받은 것처럼 이미지가 굳어 버렸어요.
  • Q. 그럼 진짜 특혜를 받은 사람이 따로 있다고 보시나요?

    - 제가 지역에서 활동하는 업체들은 다 알죠. 10년 넘게 일했으니까. 그분들의 SNS를 통해서 평소에 드러내는 그런 성향들도 다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누구와 친분이 있는지 어느 라인인지 지내다 보면 다 압니다. 

    하지만 저는 단 한 번도 그분들에 대한 언급을 한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그분들을 다 동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번에도 끝까지 오픈하지 않았습니다. 전문가가 전문성을 발현하는 데 있어서, 자기 경제 활동하는 데 있어서, 좌파고 우파고 상관없어야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이런 소신을 지키고 있는데요. 최근 저에게 벌어진 일은 굉장히 상징적인 기점이라고 봐요. 99% 장악을 하고 있는 상황에, 남은 1%, 아니 0.1%마저 내주지 않겠다는 거잖아요? 기가 막히게도 이 보도로 인해 저는 '기득권'으로 오해받고 있어요. 

    사람들은 제가 1년에 한 100억 원 정도 버는 줄 알더라고요. 만약에 진짜 끝까지 벼랑 끝으로 저를 몰아세운다면 저도 어쩔 도리가 없어요. 그 지경까지 가면 다 공개할 생각이에요. 누군가 저를 이 도시에서 제거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다면 저 역시 끝까지 가는 수밖에 없죠. 

    Q.
    너무 힘든 길을 가시는 것 같습니다.

    - 제가 여기서 물러나는 사례가 남게 되면, 그건 그냥 이 국가를 포기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목소리를 냈는데 이런 결말로 끝났다고 하면, 앞으로 누가 이 길을 가겠습니까? 저는 역사를 지키는 마음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 각오가 없이는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술계에 왼쪽으로 내는 목소리만 있고 오른쪽으로 내는 목소리가 없으면, 국민들이 아무리 50 대 50이어도 왜곡된 여론이 형성되기 쉽습니다. 그만큼 문화예술이 지닌 힘이 막강한 겁니다. 너무 왼쪽으로 기울어지면 오른쪽으로 돌려 중심을 잡아 주는 '자정작용'이 잘 일어나는 사회가 올바르고 성숙한 사회라고 봐요. 그런 차원에서 저희 같은 문화예술인들이 좀 더 책임감을 갖고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일종의 사명감으로 버티시는 거군요.

    - 정말 타협하지 않고, 최대한 성실하게 매일매일 발로 뛰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해요. 너희들의 '차별'이 이기나, 나의 '성실함'이 이기나 끝까지 한 번 가보자는 거죠. 그리고 제가 억울하게 오해를 사고 있는 부분에 대해선, 국가 시스템 안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볼 작정이에요. 제가 질문을 던졌을 때 국가인권위원회나 국민권익위원회가 어떤 답변을 할지도 궁금해요. 그리고 지금 제가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건 책을 쓰는 거예요.
  • Q. 어떤 내용을 담으실 건가요?

    - 연말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솔직히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저도 생각은 하지만 절대로 물러설 생각은 없거든요. 그 '투쟁기'를 매일 쓸 겁니다. 나중에 그걸 엮어 책으로 펴낼 계획이에요. 펀딩 형식으로 책을 미리 주문받고 배포할 생각인데요. 그 분들에게 저의 행적을 매일 알릴 겁니다. 

    그렇게 2000권을 배포한다고 치면, 저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 과정을 공유하는 2000명이 다 '김영민'이 되는 셈이죠. 제가 100일간 저들과 싸움을 벌인다고 가정하면, 매일매일 성실하게 사는 100명의 김영민이 함께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
    책 쓰는 것 말고 다른 계획은 없으신 가요?

    - 올해 제가 수주한 4건의 행사 마진을 다 합하니, 250만 원이 채 안 되라고요. 여기에 250만 원을 보태서 총 500만 원을 강서구민을 위한 '공연 제작비'로 기부하려고 해요. 오는 30일 예술가들의 주관으로 펼쳐지는 공연을 후원하기로 했어요. 

    일단 저로 인해 골치 아파진 많은 분들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으로 기부한다는 뜻이 있고요. 제가 참여했던 일들 상당수가 많은 아이들에게 기쁨이 되는 일인데요. 항상 이런 정치적인 공격이나 이슈가 발생하면 대안도 없이 사라져서 주민들이 피해를 보는 일이 반복되더라고요. 그래서 '앞으로 제가 없더라도 이런 행사들을 계속해 달라'는 당부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기부를 결심하게 됐어요. 

    Q. 정치에 대한 꿈은 계속 갖고 계신 거죠?

    - 선거가 있으면 항상 나가고 싶은 마음인데, 이번에는 그럴 형편이 안 될 것 같네요. 내년에는 처음으로 선거와 관련 없는 한 해를 보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도 제 도전은 멈추지 않을 겁니다. 어릴 때 어른들이 '발톱을 드러내면 안 된다'고 가르치곤 했는데요. 이런 자잘한 이유로까지 거짓말을 하면서 사는 게 과연 맞는 걸까 생각해 보게 됐어요. 

    자신의 꿈이 어느 정도 실제에 가까워졌는지는 '비웃음의 크기'로 감지할 수 있어요. "넌 꿈이 뭐야?"라는 질문에 "대통령"이라고 답하면 "병X"이라고 말하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그러면 총선부터 준비를 하겠네"라고 되묻는 때가 온다고 봐요. 이런 식으로 그 꿈을 진지하게 받아주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그때보다 상황이 나아졌다고 감지하는 거죠. 

    최근 저에 대한 공격이 심해지면서 잠시 멈춰 뒀던 유튜브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용기는 특별한 행위가 아니라, 일상 속 작은 결단과 실천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저의 목소리와 행동이 조금이나마 사회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면 기꺼이 달려 가려 합니다. "진정한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게 아니라, 두려움에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마크 트웨인의 말처럼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는 김영민이 되겠습니다. 많이 응원해 주세요.
  • 취재 = 조광형 기자
    사진 = 서성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