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5일(현지 시간) 백악관 아이젠하워 행정동 사우스 코트 강당에서 2028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관련 행정명령에 서명한 후 이를 들어 보이고 있다. ⓒAP/뉴시스
한국과 미국이 타결한 '15% 관세 합의'는 합의 초안조차 없이 구두로만 이뤄진 정치적 합의다. 일본·유럽연합(EU)은 자동차·부품·의약품·반도체 등 주요 품목에 15% 상한을 적용한다는 내용을 공식 팩트시트(factsheet)에 명시했지만, 한국은 그런 문서가 없다.
일본은 팩트시트가 있었으나 문구 해석 혼선이 발생했고, 스위스는 합의 초안이 마련됐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격노로 관세율이 오히려 상향됐다. 두 사례 모두 문서조차 없는 한국이 직면할 위험성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이번 합의는 단순 통상 이슈가 아니라 '대중 견제 동참'과 '동맹 현대화' 압박이 얽힌 경제·안보 시험대로 볼 수 있다. 미국과 전략적 연계를 강화해 온 호주가 최저 세율을 적용받은 것처럼, 앞으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얼마나 부응하느냐가 경제적 부담을 좌우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韓美 관세 합의의 성패, '디테일'에 달렸다
한미는 지난 7월 30일(미국 현지시각) 관세 합의를 타결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민간 투자를 연계한 대미 투자 총액만 제시했을 뿐 합의 세부 사항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투자 구조·집행 시기는 공개되지 않았고 관세 발효 시점·적용 조건도 확정되지 않았다.
검역·위생 등 비관세 장벽도 후속 협상에서 압박 변수가 될 소지가 크다. 투자 이행·관세 적용·비관세 요구가 맞물리면 이번 합의는 '종착점'이 아니라 '새로운 라운드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39% 관세 폭탄' 스위스가 남긴 경고
최종 문서 없는 합의의 위험성은 스위스 사례에서 이미 드러났다. 스위스는 협상 막판까지 관세 회피를 시도했지만, 합의문 작성에 이르지 못했고 지난 7일부터 전 품목 39% 관세가 발효됐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31일 카린 켈러-주터 스위스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스위스의 연간 400억 달러 대미 흑자를 문제 삼으며 "스위스가 미국으로부터 돈을 훔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켈러-주터 대통령이 불균형 해소책을 내놓지 않자 격노한 트럼프 대통령은 스위스에 기존 31%보다 높은 39%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했다.
스위스 정부는 7월 초 합의 초안에 양측 고위 인사가 동의했으므로 대통령 최종 서명을 단순한 요식 절차로 판단했다. 그러나 이는 오판이었다.
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지난 1일 블룸버그TV 인터뷰에서 "모든 나라가 문서를 주고받으면서 지도자들에게 가져가서 지침을 받아온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합의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합의된 것이 없는 것이며, 이 점은 무역 협상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즉, 공식 문서 없는 합의는 대통령 최종 승인 전까지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는 것이다.
◆日, 팩트시트 있었지만 15% 해석 논란
일본은 합의 직후 미일 공동 팩트시트를 발표했지만, '15%를 기존 관세 위에 얹는 것이냐, 아니면 최종 상한이냐'를 두고 해석 논란이 급격히 확산됐다. 미국 행정명령 문구가 명확하지 않아 해석 혼선이 빚어진 것이다.
사태는 미 정부가 행정명령을 수정해 15%가 추가 부과가 아닌 상한임을 명확히 하고, 잘못 부과된 초과 징수분을 환급하기로 하면서 수습됐다. 팩트시트조차 없는 한국으로서는 같은 '15%'라도 문구·해석·집행의 3단 변수를 통제할 장치가 없으니 리스크는 일본보다 큰 셈이다.
스위스와 일본의 사례는 문서가 없으면 위험은 배가되고, 있더라도 문구·해석·집행이 일치하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에서 한국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
- ▲ 미 육군이 지난 7월 '탈리스만 세이버' 연합훈련 기간에 극초음속 미사일 '다크 이글'을 호주에 처음으로 전개했다. ⓒ미국 인도태평양사령부
◆관세에서 안보로 번지는 '동맹 현대화' 압박행정명령이나 합의문 문구가 모호해 해석과 집행 과정에서 혼선이 생기는 것이 일종의 '법적 리스크'라면, 또 다른 변수는 경제 문제와 안보 문제를 함께 묶어 협상하는 '경제·안보 연계'다. 미국이 관세율 같은 경제 조건을 결정할 때 한국의 안보 기여도를 연계 조건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중요한 부담 요인이다.미국은 이번 관세 합의를 '동맹 현대화'의 트랙에서 읽고 있다. 세스 베일리 미 국무부 부차관보 대행은 지난 7일 버지니아주 알링턴에서 열린 국방부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 연례 브리핑에서 "이번 (한미 관세) 합의는 양국이 동맹 현대화와 강화에 헌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고, 존 노 미 국방부 부차관보는 "한국의 기여는 역내 억제력 복원에 중요하다"고 강조했다.안규백 국방부 장관과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부 장관, 조현 외교부 장관과 루비오 미 국무부 장관 모두 최근 회담에서 동맹 현대화 필요성에 공감했다.특히 엘브리지 콜비 미 국방부 정책차관은 최근 SNS를 통해 "한국은 북한에 맞선 강력한 방어에서 더 주도적 역할을 기꺼이 맡으려는 것과 국방 지출 면에서 계속 롤모델이 된다"며 "우리와 한국은 지역 안보 환경에 대응하며 동맹을 현대화할 필요에 있어 긴밀히 연계돼 있다"고 밝혔다.이는 트럼프 정부가 국방비 GDP 5% 증액 등 한국의 부담을 더욱 확대하는 구체적 요구를 정상회담에서 제기할 가능성을 시사한다.◆'10% 최저 관세' 호주의 선택과 보상호주는 경제와 안보의 연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호주는 이미 지난 4월 5일부터 최저 관세율인 10%를 적용받았다.트럼프 대통령이 "호주는 미국이 흑자를 보는 몇 안 되는 나라다. (미국산) 비행기를 많이 사고 있다"고 언급한 것은 단순한 호감 표현이 아니다. 쿼드(Quad)·파이브 아이즈(Five Eyes) 등 대중 견제 전선에서 핵심 거점 역할을 수행하며 미국과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국인 호주의 군사·안보적 기여를 높이 평가한 맥락에서 나온 발언이었다.두터운 전략적 신뢰는 바로 미국이 지난 7월 호주 북부에 최신예 극초음속 미사일(LRHW) '다크 이글'(Dark Eagle)의 배치와 실사격 훈련으로 극명하게 나타났다. 사거리 2800㎞, 최고 속도 마하 17에 달해 탐지·요격이 사실상 불가능한 장거리 정밀타격 무기인 다크 이글이 미 본토 밖에 배치된 것은 호주가 처음이었다.이는 중국의 '제2도련선'을 무력화해 태평양 패권 장악 시도를 억제하려는 미국 전략과 긴밀히 연결된다. 미국이 호주를 인도·태평양 전략의 전진기지로 신뢰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이러한 안보적 공조는 관세 협상에서 호주가 최저 세율을 확보하는 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많다.이처럼 호주는 미국의 핵심 요구인 '대중 견제 동참'에 적극 호응하며 사실상 경제·안보 패키지로 최저 관세를 확보했다.반면 한국은 같은 방식의 패키지 구상을 제시했지만, 미국의 핵심 요구를 수용하지 않아 성과를 문서화된 합의로 구체화하지 못했고 한미 관세 협상은 구두 합의에 그쳤다. -
- ▲ 이재명 대통령이 6월 1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6경제단체·기업인 간담회에서 참석 경제인들과 기념촬영하고 있다. 왼쪽부터 최진식 한국중견기업연합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이 대통령, 최태원 SK그룹 회장,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장, 류진 한국경제인협회장, 윤진식 한국무역협회장,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 ⓒ대통령실
◆불확실한 성과 홍보보다 가이드라인 마련이 급선무스위스·일본 사례처럼 문서가 있어도 해석·집행 과정에서 틀어질 수 있고, 문서가 없으면 변동성은 크게 증가한다. 한국은 다가오는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번 합의의 조건·상한·발효 시점, 환급 절차 등 세부 사항을 정하고 이를 명시한 공식 문서를 마련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집행 단계에서의 관세 부과·이의제기·환급 절차 등을 사전에 합의하고, 안보와 통상을 연계할 때의 기준선도 미리 설정하는 가이드라인 마련이 시급하다.한 외교통상 전문가는 "트럼프 대통령의 격노로 31% 관세가 39%로 상향된 스위스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오늘 합의한 15% 관세가 내일 또 다른 압박이나 요구로 이어질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는 안전장치가 필수"라고 조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