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정동영 통일부장관 후보자가 24일 서울 종로구 통일부 남북관계관리단에 마련된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출근하고 있다. ⓒ뉴시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대북 포용정책인 '햇볕정책' 기조를 강하게 옹호하며 남북협력 노선을 걸어온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이 약 20년 만에 통일부 수장으로 다시 지명됐다. 이재명 정부 초대 통일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정 후보자는 과거 개성공단 조성과 이산가족 화상 상봉을 최초로 추진한 성과를 인정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북한 비핵화' 대신 '한반도 비핵화'를 강조하고 "종전 선언을 비핵화 협상의 출구가 아닌 입구로 삼아야 한다"며 '선(先) 종전선언·후(後) 비핵화' 구상을 주장해 온 탓에 안보 현실을 고려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비판도 받아 왔다.정 후보자는 노무현 정부 시절이던 2004년 7월부터 2005년 12월까지 통일부 장관을 지냈다. 재임 기간 남북경제협력의 상징인 개성공단 착공과 이산가족 화상상봉 체계 구축을 주도했고, 2005년 6월에는 극적으로 김정일과의 면담을 성사시켜 한반도 비핵화와 6자회담 복귀를 설득하는 등 굵직한 장면을 연출했다.특히 김 위원장을 만나 "한반도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는 발언을 이끌어내자 당시 정부·여당은 이를 북한의 6자회담 복귀와 9·19 공동성명 도출에 간접적인 역할을 한 성과로 내세웠다. 개성공단은 그의 재임 중 시험가동에 들어갔고, 광복 60주년인 2005년 8월에는 사상 최초의 화상 이산상봉이 열렸다. 정 후보자는 재임 중 세 차례의 추가 화상 상봉을 성사시키며 남북관계 개선에 기여했다.◆'비핵화 유훈' 이끌었지만 … 美 "전혀 새로운 것 없다" 일축그러나 같은 장면을 두고 엇갈린 평가가 존재한다. "한반도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는 표현은 북한의 실질적 핵 포기 의지를 담았다기보다 한반도 내 미국의 전략자산 전개가 가능한 주한미군의 철수를 강조한 정치적 해석이 가능하다는 신중론도 있었다.정 후보자가 김정일을 만난 뒤 북한이 6자회담 복귀 의사를 내비치고 한 달여 후 9·19 공동성명이 도출됐으나 이 과정에 대해 다양한 평가가 제기됐다. 미국 언론은 미 정부 관계자의 말을 빌려 "전혀 새로운 것이 없다"며 정 후보자의 방북 성과를 일축했다.또한 당시에 미국 부통령실은 한국 정부가 북한과 독자적 협력을 강조하며 대북 지원에 나서는 움직임에 우려를 표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 측은 정 후보자가 주도한 개성공단 관련 비료·전력 제공 계획에 제동을 걸었다. 일각에서는 한미 간 조율이 더 필요했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헨리 하이드 당시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장이 2005년 3월 청문회에서 노무현 정부의 대북 접근법을 겨냥해 "한국은 누가 적인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압박하자 정 후보자는 즉각 "이분법적 사고는 한반도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그런 발언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정면 대응했다.당시 집권당이던 열린우리당은 하이드 위원장의 발언을 "내정 간섭성"이라고 규탄했고, 당시 제1야당이던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은 안보 현실에 대한 정 장관의 인식이 충분치 못하다고 지적했다. -
- ▲ 2024년 7월 8일 정오 북한 평양의 김일성 광장에서 북한 주민들이 김일성 사망 30주기를 맞아 3분간 추모 묵념을 하고 있다. ⓒAP/뉴시스
◆연이은 '조문 파동'·탈북 러시 … 남북관계 얼어붙다정 후보자가 통일부 장관에 취임한 직후 처음 맞닥뜨린 남북관계 위기는 이른바 '조문 파동'이었다. 2004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 10주기를 맞아 일부 인사가 북한에 가서 조문하겠다고 요청했지만 정부가 이를 불허했고, 이에 북한이 강력 반발하면서 불과 취임 일주일 만에 남북관계에 균열이 생겼다.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같은 달 27일에는 468명에 달하는 사상 최대 규모의 탈북자 집단 입국이 이뤄지는 사태도 벌어졌다. 제3국을 거쳐 남한으로 들어온 탈북자가 한꺼번에 발표되자, 북한은 즉각 "우리 체제를 허물려는 최대의 적대행위"라고 반발했고 남북 당국 간 대화 채널은 급속히 냉각됐다. 이로 인해 정 후보자는 취임 후 8개월간 남북회담을 단 한 차례도 열지 못하는 난국을 겪었고, 한반도에는 1994년 '제1차 북핵 위기' 이후 가장 심각한 긴장 국면이 조성됐다.정 후보자는 이러한 돌발 변수들에 대해 나중에 여러 차례 유감을 표명했다. 그는 사석에서 "내가 몇 달만 빨리 통일부 장관이 되었더라면 남북관계가 이렇게까지 꼬이진 않았을 텐데..."라고 답답함을 토로했다고 한다.공식 석상에서도 그는 조문 불허와 탈북자 대거 입국과 관련해 "북측에서 지극히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안들인 만큼 좀 더 슬기롭게 처리됐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밝혔다. 이러한 발언은 국내 우파 진영의 거센 역공을 불렀다.야권 인사들은 남북관계 악화를 남측 책임으로 돌린 부적절한 인식이라며 탈북자 수용이나 조문 불허 조치는 주권국가로서 자연스러운 조치인데 과도하게 북한 입장을 고려했다는 비판을 쏟아냈다. 이러한 사건들은 정 후보자가 '북한에 지나치게 유화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배경이 됐다.◆김정일 면담 극적 성사 … "지나치게 낙관적 전망" 회의론도2005년 들어 북핵 문제가 급격히 악화일로로 치닫자 정 후보자는 돌파구 마련을 위한 대면 외교에 나섰다. 북한은 2005년 2월 10일 전격적으로 핵무기 보유와 6자회담 무기한 중단을 선언하며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나갔다. 정 후보자는 3~4월에 걸쳐 미국을 방문해 워싱턴 당국과 공조를 조율하고 중국 등 주변국과 연쇄 접촉을 이어갔다. 그러한 가운데 6·15 공동선언 5주년 기념 민족통일대축전 참석을 명분으로 평양 방문이 추진됐고, 2005년 6월 17일 평양에서 김정일과의 단독 면담이 극적으로 성사됐다.전날 밤 북한이 전격 통보하는 식으로 결정된 해당 회동은 무려 2시간 30분 동안 이어졌고, 정 후보자는 이 자리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며 북한의 조속한 6자회담 복귀를 촉구했다.정 후보자는 귀국 직후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북한은 6자회담을 한 번도 거부한 적이 없으며 미국이 자신들을 존중하면 회담에 나설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고 전하며 교착 국면에 돌파구를 만들었다고 자평했다. 이 만남을 계기로 한 달 뒤 6자회담이 재개돼 '9·19 공동성명'이라는 결실로 이어졌다.당시 여당과 정부는 "경색된 남북관계를 대화 국면으로 전환시킨 큰 성과"라고 정 후보자를 치켜세웠고, 노무현 대통령 역시 정 후보자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며 후속 조치를 논의했다.하지만 이 평양 면담의 빛과 그림자에 대해서는 비판적 시각도 만만치 않았다. 정 후보자는 남북 간 대화의 재개와 신뢰 구축의 의미를 강조했으나 야권에서는 북한이 막판에 극적으로 면담에 응한 방식과 발표 내용에 대해 비판적 평가를 내놓았다. 미국 정부 관계자들은 정 후보자의 면담 결과에 대해 "전혀 새로운 것이 없다"고 평가절하했다.당시 한나라당은 "면담 자체를 업적으로 포장할 뿐 정작 북핵 폐기라는 실질적 성과는 없다"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일각에서는 정 후보자가 평양 방문 직후 제시한 낙관적 전망의 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처럼 김정일 면담을 둘러싸고 공과를 놓고 논쟁이 이어지면서 정 후보자의 전망이 현실보다는 이상에 치우쳤다는 평가도 나왔다. -
- ▲ 2010년 5월 20일 오전 국방부가 천안함 침몰사건 조사결과를 발표한 가운데 천암함 절단면 사진을 공개했다. ⓒ국방부 제공
◆햇볕정책은 "민주당의 근본 뿌리" … 연평도 이후에도 대화론 고수정 후보자의 대북관은 장관 퇴임 이후로도 일관성을 유지했다. 그는 정치인으로 돌아온 뒤에도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햇볕정책 기조를 수정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고, 이를 "민주당계 정당의 정체성"으로 못박았다. 2010년 3월 천안함 피격과 11월 연평도 포격으로 남북관계가 얼어붙었을 때도 그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 강경 일변도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당시 정부·여당 일각에서 "햇볕정책이 북한을 오만하게 만들어 도발을 불렀다"는 성토가 나오자 정 후보자는 한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햇볕정책의 수정은 민주당이길 포기하는 것"이라고 맞받았다.그는 "제재와 압박 일변도의 지난 3년이 아무 성과도 내지 못했다"면서 "결국 대화를 통한 평화 관리만이 유일한 출구"라고 강조했다. 연평도 포격 직후 "군사적 대응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남은 것은 대화뿐"이라는 그의 발언은 특히 우파 진영의 거센 반발을 샀다.야권이 그의 대화 중심 접근을 비판하자 정 후보자는 "대화를 막는 것이야말로 전쟁으로 가는 길"이라고 응수했다. 안보 위기 때마다 반복된 이러한 논란은 그를 둘러싼 정쟁의 단골 소재가 됐다.2018년 9월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 남북정상회담 때 정 후보자는 민주평화당 대표 자격으로 특별수행원에 포함돼 북한을 방문했다. 평양에서 그는 "70년 동안 대결해 온 남북이 이제 적이 아닌 우방이 됐다"고 평가하며 남북 화해 분위기에 대한 강한 기대감을 나타냈다.그러나 북한 비핵화의 실질적 진전 없이 대북 제재만 장기화하는 현실을 두고 그의 이런 발언은 "성급한 낙관론"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정 후보자는 문재인 정부 시기의 남북 합의사항이 정권 교체 이후에도 이어지도록 제도화를 주장했으나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 결렬 이후 북한의 태도가 돌변하면서 남북 관계는 다시 교착 상태에 빠졌다. -
- ▲ 2019년 6월 10일 당시 서울 용산구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옛 남영동 대공분실) 예정지에서 '6·10민주항쟁 32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바른미래당 손학규, 민주평화당 정동영, 정의당 이정미 대표 등 당시 여야 4당 지도부를 비롯한 참석자들이 '광야에서'를 제창하고 있다. ⓒ뉴시스
◆'조용한 협력' vs '인권 눈치보기' … 북한 인권 논란북한 인권 문제와 관련해 정 후보자는 북한 인권 증진을 위해서는 공개적인 비난보다는 인도적 지원과 교류 협력을 통해 북한 주민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입장을 유지했다.그는 통일부 장관 재임 중이던 2005년 12월 미국 방문 당시 한국 정부가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표결에서 기권하고 공개적 비판에 소극적이라는 지적이 나오자 "북한 인권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다루고 있다"고 반박했다.남한이 그때까지 7500명에 이르는 북한이탈주민을 수용해 온 점을 강조하며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증진 또한 북한 주민 인권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역설한 것이다. 이는 제재나 압박보다는 인도적 지원을 통해 북한 주민의 생존권 등 기본권을 높이는 게 우선이라는 논리로, 정 후보자는 북한 인권 문제도 대화와 협력의 틀 안에서 풀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인권단체들은 더욱 적극적인 접근을 요구했으나 정 후보자는 남북관계 악화를 불러올 공개 압박보다는 조용한 협력이 실질적 개선을 가져올 것이라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예컨대 2007년 대선 당시 국내외 40여 개 인권단체가 대선후보들에게 북한 인권 정책에 대한 공개 질의서를 보냈을 때 당시 대선 후보였던 그는 끝내 답변을 내지 않았다. 정 후보자는 '인권 개선 방식에 대한 견해차일 뿐 인권 자체를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남북관계의 안정과 인도적 지원을 통한 실질적 인권 개선을 강조했지만 이후 그의 북한 인권 문제 대응 방식이 지나치게 신중하거나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됐다.◆"북도 평화적 핵 이용권 가져야" 발언 후폭풍북핵 문제를 바라보는 정 후보자의 유연한 접근법은 때때로 논란을 낳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5년 8월 11일 통일부 장관 재임 1주년을 맞아 나온 "북한도 농업·의료·발전 등 평화적 목적의 핵 이용 권리는 가져야 한다"는 그의 발언이다.정 후보자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체제로 복귀하면 경수로 제공 등 평화적 핵 이용을 국제사회가 보장해줄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는데, 이는 북한 핵 문제의 현실적 위협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았다.한나라당은 "북핵 문제 해결에 찬물을 끼얹는 발상"이라며 맹비난했고, 우파 진영에서는 "북한이 핵을 쥔 상태에서 평화적 이용권부터 인정하자는 것이냐"고 비판했다.정 후보자는 곧 "취지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복귀하면 평화적 핵 이용은 보장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고 해명했다. 6자회담 타결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협상 카드 차원에서 한 유연성 제고 발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정 후보자가 북핵보다 남북 협력을 우선시한다는 인식을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됐다. -
- ▲ 2007년 9월 10일 오후 충북 청주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경선 후보 합동연설회에서 후보들이 지지당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비전 창조 릴레이 대회'로 이름 붙인 이날 합동유세에서 경선 후보들은 저마다‘한나라당 이명박 대선후보를 대적할 사람은 오직 나뿐’이라며 지지를 호소했다. 왼쪽부터 정동영, 유시민, 손학규, 한명숙, 이해찬 후보. ⓒ뉴시스
◆흡수통일 배제하고 공존 추구 … '남북 주도' 통일론통일 문제와 관련해서도 정 후보자는 점진적·평화적 통일론을 견지해왔다. 그는 "한반도 문제는 남과 북 당사자가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신념을 강조하며 남북 당국 간 상시 대화 채널 구축과 경제공동체 구상을 지지했다.북한 체제가 무너지는 급변 사태 가능성에 대비한 대응책보다는 체제 공존을 기반으로 한 통일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은 급변 사태나 흡수통일을 대비해야 한다는 우파 진영의 시각과는 선을 긋는 것이다.그는 '1국가 2체제'의 연방제 통일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남북이 '사실상의 통일 상태'를 유지하며 점진적으로 통일에 이르는 방식을 선호하는 것으로 평가된다.예를 들어 공존을 통한 통일을 꿈꾸는 정 후보자의 구상은 북한의 급변 사태에 대비한 흡수통일 시나리오보다는 남북 관계의 제도화와 신뢰 구축을 전제로 한 장기적 접근에 가깝다.◆2007년엔 '先 종전선언·평화체제' 공약 … 北 주장과 맞물려 논란정 후보자는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로 출마하면서 한반도 평화구상과 외교안보 공약을 대대적으로 제시했다. 그 핵심은 "북핵 문제 해결과 평화체제 구축을 투트랙으로 병행한다"는 구상이었다.그는 대통령 취임 즉시 한반도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을 추진해 정전체제를 공식 종료시키겠다고 약속했고, 이러한 평화 프로세스를 북한 비핵화 노력과 병행 진행하겠다고 밝혔다.이명박 후보 등 우파 진영 후보들이 "북한 비핵화가 먼저"라며 평화협정을 북핵 폐기의 결과물로 상정한 것과 달리, 정 후보자는 "남과 북이 먼저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체제를 만들면 북핵 해결의 길도 자연스럽게 열린다"는 논리를 폈다. 다시 말해 선(先) 종전선언·후(後) 비핵화를 통해 평화협정과 비핵화를 병행하겠다는 것이다.이에 일각에서는 북한이 주장하는 '미국의 선(先) 적대시 정책 철회'와 일정 부분 유사한 측면이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미리 종전을 선언한들 북한의 핵 능력이 그대로이고 군사적 적대 의지가 변하지 않는다면 선(先) 평화선언 조치가 오히려 동맹의 억제력을 약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종전선언 이후 북한이 이를 근거로 주한미군 철수나 유엔군사령부 해체 등을 주장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우파 진영은 "비핵화 없이 종전선언부터 하면 주한미군 철수 압박만 커질 것"이라고 우려했고, 미국 내 강경파들도 "섣부른 종전선언은 주한미군 및 연합훈련 축소 압력으로 이어져 동맹 억제력의 약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이에 대해 정 후보자는 "종전선언은 한반도 비핵화의 출발점"이라며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병행하는 투트랙 해법을 거듭 강조했지만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포용정책 2.0' 청사진 … 현실적 한계에 대한 평가도 병존당시 대선 후보 정동영의 공약은 노무현 정부의 평화번영정책을 계승·발전시키겠다는 의지로 가득했다. 그는 "2007년 남북 10·4 정상선언을 반드시 발전·이행시키겠다"고 공언하며 이전 정부 대북 합의들의 계승을 약속했다. 구체적으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와 같은 남북 경협 구상을 차질 없이 추진하고, 개성공단을 확대·발전시켜 한반도 경제공동체의 기반을 다지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또한 한미동맹과 외교 현안을 조율하는 '균형 외교'를 천명하면서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비준 문제나 전시작전통제권 전환과 같은 이슈들을 한반도 평화정책과 연계해 동맹을 더욱 공고히 발전시키겠다고 강조했다. 즉, 미국과의 긴밀한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남북 관계 개선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는 전략이었다. 실제로 정 후보자는 최근 국회 공식 기구인 한미의원연맹 공동회장을 맡기도 했다.그러나 그의 계획은 현실적 제약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회의론도 있었다. 그의 구상은 북한의 협력 의지에 무게를 둔 만큼 북한의 돌발적 행동이나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한 보다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왔다. '북핵 문제가 교착되거나 북한이 도발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플랜B를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이 대표적이다.특히 북한은 근본적으로 핵 문제를 '공식 핵보유국'인 미국과 '핵보유국 대(對) 핵보유국'으로서 풀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그러나 정 후보자의 공약에는 한국이 그 사이에서 어떤 조정자 역할을 할지 구체적 언급이 부족하다는 우려가 꾸준히 있었다. 아울러 북한 인권 개선이나 납북자·국군포로 송환 같은 인도적 현안에 대해서도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됐다.2007년 대선 당시 정 후보자의 공약집에서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언급이 원론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고, 남남(南南) 갈등 해소나 국민 통합 방안이 부족했다는 평가도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2007년 대선에서 정 후보자는 26.1% 득표에 그쳐 이명박 후보에게 패배했다. -
- ▲ 2025년 4월 4일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 신분이던 이재명 대통령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의원총회에서 정동영 의원과 인사하는 모습. ⓒ뉴시스
◆"적대 완화·대화채널 복원" … 다시 꺼내 든 포용론2025년 현재 정 후보자의 재등장은 이재명 정부의 대북 메시지를 상징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경색된 남북관계의 물꼬를 트기 위해 정 후보자를 기용했다는 것이다.정 후보자는 지명 직후인 24일 기자들과 만나 "제가 해야 할 일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다지는 일"이라고 각오를 밝힌 뒤 "지난 3년 동안 꽉 막혔을 뿐만 아니라 일촉즉발의 위기까지 치달았던 적대와 대결 상황을 완화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이어 "남북 간 6년 동안 완전히 단절된 대화 채널을 복원하는 것이 다음 순서"이고 "제일 중요한 건 신뢰를 다시 쌓아 올리는 것"이라며 신뢰 회복의 출발점으로 소통 재개를 꼽았다.정 후보자는 또 "평화와 안정을 구축한 토대 위에서 통일도 모색할 수 있기 때문에 통일부 명칭 변경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통일부의 명칭 변경까지 거론했다.
그러면서 독일 브란트 정권이 기존의 '전독부'(통일부 격)를 동·서독 관계 개선에 초점을 둔 '내독부'로 바꾼 사례를 소개하며 "통일은 마차이고 평화는 말에 해당하는데 마차가 말을 끌 수는 없고 말이 앞에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이 이미 2023년 말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하며 사실상 '통일'이라는 개념을 부정한 현실에서 독일 사례를 근거로 부처명에서 '통일'을 빼자는 주장에 긍정적 입장을 보인 것이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격인 국정기획위원회는 지난 19일 통일부 업무 보고에서 부처 명칭에서 '통일'을 제외하고 다른 명칭으로 변경하는 방안에 대한 통일부의 입장을 물은 바 있다. 지난 대선을 전후해 일부 단체는 통일부 명칭을 '남북관계부' '남북교류협력부' '남북평화협력부' 등으로 변경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탈북자·납북자 가족 등으로 구성된 민간단체들이 살포하는 대북전단 문제에 대해서도 "남북 갈등, 적대·대결로 들어가는 촉매제 역할을 한 게 사실"이라며 "평화와 안정을 위해 도발적이고 적대적인 행위는 재발해선 안 된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북전단을 살포한 민간단체와 직접 통화한 사실을 공개하며 "전단 살포 자제 결정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남북대화 재개 방안에 대해서는 "인사청문회가 끝나고 (장관으로) 임명되면 통일부의 전문가들과 차근차근 그림을 그려보겠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정 후보자의 발언은 과거 포용정책 기조를 재확인한 것으로 평가된다.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이 크게 고도화하고 북·중·러 연대가 강화된 현실에서 그의 정책 실현 가능성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어질 전망이다.
다가올 인사청문회에서는 '북한 비핵화 진전 없이도 대화와 협력만으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가' '북한이 또다시 도발할 경우 대응 계획은 무엇인가' 등의 날카로운 검증이 예상된다.
남북관계의 명암을 모두 체감한 정 후보자가 두 번째 통일부 장관 임기에서 과거의 성과를 재현할 수 있을지, 아니면 또다시 현실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될지는 향후 한반도 전략 환경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