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초석' 다진 여제, 사실상 은퇴 발표"더 이상 공연도, '레코드 취입'도 안 할 것""조항조·주현미와 '脈을 이음' 마지막 공연"
  • ▲ '엘리지의 여왕' 이미자. ⓒ쇼당이엔티
    ▲ '엘리지의 여왕' 이미자. ⓒ쇼당이엔티
    "제 데뷔곡은 '열아홉 순정'이지만 1964년 '동백아가씨'가 나오면서 '이미자'라는 이름이 널려 알려졌죠. 이 노래는 TV가 많이 보급되지 않았을 때 무려 33주 동안 차트 1위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서구풍의 노래에 밀려 '질 낮은 노래'로 평가받았어요."

    바야흐로 트로트 전성시대를 맞이한 요즘, 트로트 여제(女帝)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트로트를 부르는 가수로서 오랫동안 '소외감'을 느끼고 살아왔다는 것.

    심지어 자신의 대(代)가 끝나면 다 사라지고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공연 때마다 '이 노래는 이렇게 불러 주시고, 이렇게 들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해 왔다는 절박함까지 내비쳤다.

    '엘리지의 여왕' '트로트 여제' 등으로 불리는 가수 이미자(84)는 지난 5일 오후 서울 마포구 스탠포드호텔코리아에서 개최한 기자회견에서 "오늘날 '전통가요'라 불리는 트로트는 초창기, 스탠더드 팝 등 서구풍의 노래에 밀려, 하류·서민층의 노래로만 치부됐었다"고 토로했다.

    "제 이름을 널리 알린 '동백아가씨'가 가요프로그램에서 오랫동안 1위를 기록하며 큰 인기를 얻었는데요. 소위 상류층이 즐기는 노래로 평가받는 서구풍 노래에 밀려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뭔가 마음에 소외감을 느끼면서 지냈죠."

    실제로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동백아가씨'는 일본의 엔카와 비슷, 왜색풍이 짙다는 이유로 방송금지곡이 됐고, '섬마을 선생님'은 일본 곡을 표절했다는 오해를 받아 금지곡이 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이미자는 발표하는 신곡들이 황당한 이유로 금지곡 리스트에 오르자 "노래를 그만 둘까 생각도 했었다"고 밝힌 바 있다.

    세종문화회관의 문턱도 트로트 가수들에겐 터무니 없이 높았다. 수많은 히트곡으로 '국민 가수' 반열에 오른 이미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1989년 '가수 활동 30주년'을 맞게 된 이미자는 이를 기념하고자 세종문화회관에 대관 신청을 했으나, '이미자의 노래는 문화를 해친다'는 어이 없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했다.

    다행히 당시 고건 서울시장의 도움으로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오른 이미자는 '고무신짝'으로 비하받은 고정 팬들은 물론, 정관계 유력 인사들까지 객석으로 끌어 모으는 막강한 티켓 파워를 발휘했다. 이를 계기로 세종문화회관의 문이 트로트 가수들에게도 열렸음은 물론이다.

    이미자는 "트로트 가요를 부르는 사람은 다른 장르의 가수들보다 음폭이 넓다"며 "그래서 발라드나 다른 어떤 노래도 부를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자신도 장르를 바꿔볼까 생각도 했었지만 너무 바쁘게 생활하면서 그냥 이렇게 세월이 흘렀다는 속내를 고백했다.

    이미자는 "그러다가 파월장병 위문공연이나 독일교포 위문공연 등을 다니면서 저의 노래를 듣고, 울며 웃으며 환영해 주시는 모습을 보고 긍지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이미자는 "우리의 가요가 지금 '100년사(史)'라고 말씀드릴 수 있다"며 "일제시대에 겪은 설움, 해방의 기쁨을 되새기기도 전에 6.25를 겪은 설움, 그야말로 우리 민족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때마다 우리 가요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고 말했다.

    "우리 가요는 시대의 변화를 대중에게 충분히 알려고 널리 퍼지게 했습니다. 우리가 위로하고, 위로받고, 함께 부르면서 들으면서 애환을 느낀 가요가 바로 우리의 대중가요라고 생각합니다."
  • ▲ 기자회견에 앞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가수 이미자와 조항조, 주현미. ⓒ쇼당이엔티
    ▲ 기자회견에 앞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가수 이미자와 조항조, 주현미. ⓒ쇼당이엔티
    이미자는 "트로트, 즉 우리의 '전통가요'는 우리 시대의 흐름을 대변해 주는 노래"라고 정의했다.

    "우리의 전통가요는 그때 그 시절 시대상을 알게 해주는 노래예요. 그래서 그 노래를 들으면 그때를 영원히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죠. 그것이 바로 전통가요의 알맹이가 아닌가 싶어요."

    이미자는 개인적으로 '트로트'라는 단어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트로트의 여왕이라는 수식어보다는 전통가요를 부르는 가수, 그냥 전통가요의 맥을 이어간 가수, 이렇게 생각해 주시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들었을 때 듣고 부른 노래가 전통가요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들의 노고에 우리가 이렇게 잘 살 수 있게 됐고, 그러한 애환이 전통가요에 잘 녹아 있죠. 트로트라는 말이 어디에서 생겨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걱정이 없는) 지금은 템포가 빨라지고 즐거워졌죠. 지금 이 세대에서 트로트와 전통가요를 분별하는 건 번거로울 것 같아요. 그냥 '정통트로트'라고 같이 불러 주시면 좋겠습니다."

    1989년 세종문화회관에서 데뷔 30주년 공연을 가진 이후 5년 주기마다 기념공연을 열어 왔다는 이미자. "아마 이곳에서 기념공연을 가장 많이 연 가수가 바로 저일 것"이라고 자부했다.

    하지만 데뷔 65주년을 맞은 지난해엔 기념공연을 열지 못했다. 가수로서 '달인'의 경지에 다다른 그에게도 세월의 흐름과 변화는 쉽게 극복할 수 없는 난관이었다. 자신의 대에서 전통가요의 맥이 끊어질까 염려돼 연구를 거듭했지만 일평생 노래해 온 전통가요의 뿌리와 색깔은 점점 옅어졌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전통가요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트로트 여제 역시 기가 꺾였다.

    사실상 포기하는 단계에 다다른 순간, 서현덕 쇼당이엔티 대표를 만나게 됐다는 이미자. 그를 통해 전통가요의 맥을 잇자는 프로젝트를 구상하게 됐고, 맥을 제대로 이을 후배 가수도 선정했다. 이미 가요계의 정점을 찍은 조항조(66)·와 주현미(64)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한 '여왕'은 그들을 통해 전통가요가 계속해서 대물림되기를 바랐다.

    그런 기회를 얻게 됐기에 더 이상 여한(餘恨)이 없다는 이미자는 사실상 '은퇴 선언'을 한 이 순간, 자신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가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냥 혼자 조용히 사라질 줄 알았는데, 우리 전통가요의 맥을 이을 수 있는 든든한 후배들과, 좋은 공연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신 제작자를 만나면서 용기를 내 다시 무대에 서게 됐습니다. 우리 부모 세대는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타국으로 다니셨는데, 그때 우리 가요를 들으면서 울고 웃고 위로하고 위로받으면서 사셨어요. 이러한 시대를 대변하는 전통가요가 이대로 사라지는 게 너무 안타까웠는데, 이렇게 후배들을 통해 맥을 이을 수 있게 돼 기뻐요."

    이미자는 서현덕 대표와 손을 잡고 오는 4월 26~27일 양일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이미자 전통가요 헌정 공연 "맥(脈)을 이음">을 열 계획이다.

    트로트로 한 시대를 풍미한 '여왕'의 마지막 공연이다. 그는 앞으로 공연도, 레코드 취입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다만 '은퇴'라는 말 대신 '마지막'이라는 말을 써 달라고 취재진에게 당부했다.  

    앞으로도 신문이나 방송 등을 통해 후배들에게 조언해 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될 수도 있기 때문에 '가요계의 맥을 잇겠다'는 뜻에서 은퇴라는 말은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대를 이을 후계자로 정상급 트로트 가수 2명을 지목한 그는 손자 손녀뻘되는 가수들도 자신의 마지막 무대에 세울 계획이다.

    지난해 방영된 TV조선 '미스트롯3' 우승자 정서주와 현재 방영 중인 '미스터트롯'의 우승자를 함께 무대에 올려, '3대가 하나 되는' 기념비적인 공연을 열기로 한 것이다.

    "기꺼이 감사함으로 이 공연을 준비하고 있어요. 제가 물러나도 든든한 후배들이 대를 이을 수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이번 공연으로 마무리를 충분히 지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