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50년 … '도전과 응전' 연속작금의 상황, 70, 80년대와 유사늦었지만 … '지금 당장 빨리'쇄신 … '기술통' '베테랑' 전면에메모리 집중, 파운드리 혁신'초격차' 리더십 탈환 시동
  • ▲ ⓒ뉴데일리DB
    ▲ ⓒ뉴데일리DB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너무 늦었다.” 개그맨 박명수씨가 과거 무한도전이라는 예능프로그램에서 남긴 어록 중 하나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제일 빠르다’라는 기존의 격언을 살짝 비튼 것인데, 현실적인 조언으로 아직도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고 있다. 얼핏 듣기에는 ‘늦으면 가망이 없다’라는 말로 들리지만 사실은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지체할 시간조차 없으니 지금 당장 빨리 시작하라’는 뜻이다.

    최근 업계 안팎에서 ‘진짜 너무 늦었다’고 오르내리는 일이 하나 있다. 삼성전자의 고대역폭메모리(HBM) 대응이다. 과거 HBM 투자를 중단하며 새로운 시장을 선점할 타이밍을 놓쳤고 이로 인해 인공지능(AI) 패러다임 전환에 뒤쳐지면서 현재의 위기가 불거졌다는 설명이다. 오죽하면 반도체 수장이 직접 나와 사과를 하고, 이재용 회장 또한 공식석상에서 ‘삼성의 위기’를 언급할 정도다. 

    그런데 정말 늦었을까? 시간을 거슬러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던 1970년대로 거슬러가보자. 

    1970년대 중후반 대·내외 경제 상황은 지금과 유사했다. 유가급등으로 치솟는 물가와 소비위축 그리고 경기침체로 전 세계는 ‘스테그플레이션’에 빠진 상태였다. 한국 또한 물가 상승과 경제 성장 둔화, 실업 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4년 반도체 기술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한국에서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은 한국반도체(삼성전자 반도체 사업 전신)를 인수, 반도체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이 선대회장의 가까운 지인 등 모두가 투자 과잉과 기술력 부족 등을 들어 반대했다고 한다. 일본의 한 기업 연구소는 ‘삼성이 반도체를 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라는 보고서까지 내놓으며 비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삼성전자 지분을 팔아 사비로 인수자금을 마련하면서까지 반도체 사업에 힘을 실었다. 

    모두의 우려대로 반도체 사업은 쉽지 않았다. 기술 제휴를 위해 미국 마이크론에 기술자들을 보냈지만, 마이크론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기술자들이 인근 호텔에서 독학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설상가상으로 1980년대 접어들며 삼성의 재계 순위는 흔들렸고, 취업 선호도 등 여러 측면에서 현대나 대우에 밀려 2년간 신입 사원을 뽑지 못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이 선대회장은 이 같은 상황에서도 매출의 절반 이상을 다시 투자하는 등 공격적 선행투자를 이어갔다. 

    결국 삼성은 일본이 6년 걸려 개발한 64K D램을 6개월 만에 개발했다. 미국과 일본 반도체 전문가들을 충격에 빠뜨린 속도였다고 한다. 다음 해에는 256K D램, 1986년 1M D램, 1988년 4M D램을 개발했다. 특히 삼성반도체는 1988년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된다. 막대한 투자와 가격하락으로 적자가 지속되던 가운데 그해 반도체 호황이 찾아오면서 10년 치 적자를 털어낸 것이다. 

    이후에도 과감한 투자를 지속하면서 1985년 10위권에도 들지 못했던 D램 시장에서 1992년 13.5%의 점유율로 세계 1위에 올랐다. 일본 도시바(12.8%)를 사상 처음으로 앞지르며 세계의 정상에 섰다. 그해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로 64메가(Mb) D램 개발로 또 한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후 2001년 낸드플래시메모리 세계 1위 달성 등 기록도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삼성전자 반도체 역사는 악전고투의 역사였던 셈이다. 단 한 번도 쉽지 않았고 실패가 없었던 적이 없었다. 과감한 선제 투자와 삼성인들의 DNA로 이를 이겨냈을 뿐이다. 

    삼성전자는 다시 반도체 초격차를 위한 고삐를 죄고 있다. 올해 역대급 연구개발비(R&D) 투자에 이어 전날 반도체(DS)부문 쇄신에 집중한 정기 인사를 단행했다. 반도체 수장인 전영현 부회장에게 메모리사업부장을 맡겨 속도감 있는 사업을 예고했으며, 반도체위탁생산(파운드리) 사업부장도 미국통인 한진만 부사장을 선임했다. 글로벌 고객 대응 경험이 풍부한 한 사장을 통해 북미 빅테크 수주전에 속도를 내기 위한 복안으로 해석된다. 파운드리 사업부에는 사장급 최고기술책임자(CTO) 보직도 신설해 기술 경쟁력 강화에 힘을 실었다. 반도체 초격차를 회복하기 위한 이재용 회장의 의중이 반영됐다는 평가다. 

    삼성에게는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당장 시작해야 한다. 올해는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지 50년이 되는 해로 재도약이 절실한 시점이다. 삼성의 이번 인사가 반도체 경쟁력 회복·기술 리더십 탈환의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