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7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미소 양국의 ‘한반도 흥정’은 마지막 씨름을 벌이다 끝내 종지부를 찍는다. 마침내 미국은 협상을 통한 ‘해결’을 포기하고 유엔총회에 상정하기로 결정하였다. 
    미국으로서 그것은 ‘스탈린의 친구’ 루즈벨트가 남기고 간 유산 ‘신탁통치’란 괴물을 차버린 것이었고, 스탈린 측은 동유럽에서 성공했던 바 ‘테이블 요리로 먹는 공산화’ 꿈이 무산되어 남한 땅을 놓쳐버린 꼴이다. 왜 유독 한국에서 실패하였는가? 이승만의 집요한 ‘반소-반공-반탁’ 투쟁과 미국 설득작전 때문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5월에 재개한 미소공위가 10월 21일 최종 폐업, 서울을 떠날 때까지 5개월의 풍경을 둘러보자.
  • ▲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되었던 고당 조만식, 북한인민위원장 김일성, 한반도 공산화 총책임자이자 소련군정 지휘자 슈티코프.(왼쪽부터).
    ▲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되었던 고당 조만식, 북한인민위원장 김일성, 한반도 공산화 총책임자이자 소련군정 지휘자 슈티코프.(왼쪽부터).
    ★미소공위, 평양 회의...조만식 돌변 “이승만은 신탁통치 받아들여야” 

    서울서 실랑이하던 미소공위는 7월1일 평양에 가서 평양인민위원회 회의실에서 북한의 정당-사회단체와 회합식을 가졌다. 예상대로 소련측과 북한 단체들은 남한의 반탁투쟁위 산하의 15개단체는 절대로 참여시킬 수 없다는 주장을 강화하였다. ‘제5호 성명’에 서명한 정당이나 단체들도 제외시키라는 것이다. 따라서 ‘참가해서 반대하겠다며’ 서명했던 한민당 등은 협의대상에서 빠지라는 말이다. 그동안 ‘진전’되었던 사항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때, 미국대표단장 브라운 소장이 요청하여 조만식을 면담한다. 그런데 브라운의 질문에 대한 조만식의 대답이 예상 밖이어서 놀랐다고 한다. 조만식은 “미국만의 신탁통치가 바람직하나 미소 양국의 신탁통치가 불가피하다면 받아들여야한다”고 말하고, “이승만과 김구가 미국의 노력에 협조하지 않는 것은 큰 유감”이라고 했다. 조만식은 남한에 내려가서 정치를 하고 싶다는 강한 희망을 피력했다고 한다. (정용욱 [해방직후 미국의 대한정책] 서울대 출판부, 2004).
    조만식의 이런 대답이 본인의 변심에서 나온 것인지, 고려호텔에 연금시킨 소련군정의 세뇌공작 결과인지, 그후 확인된 바는 없다고 한다.
    평양의 미소공위는 초장부터 격돌, 합의는커녕 미국과 소련 대결의 선전장으로 변했다. 
    보름후 브라운이 소련 주장을 비판하는 단독성명을 발표하고, 슈티코프가 미국을 비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 여운형, 박헌영, 김일성(왼쪽부터).
    ▲ 여운형, 박헌영, 김일성(왼쪽부터).
    ★여운형 암살...배후는 누구? 미국은 또 김구를 의심

    그 사이, 서울에선 여운형이 7월19일 대낮에 암살당한다.
    여운형은 좌우합작문제로 미군정 민정관 존슨(E.A.J. Johnson)을 만나러 승용차를 타고 혜화동 로터리를 돌아가는 순간 총격을 받고 쓰러졌다. 검거된 범인 한지근(韓智根, 19세)은 송진우의 암살범 한현우(韓賢宇)의 집에서 기거했는데 공범 4명이 뒷날 밝혀진다. 
    배후세력에 대한 수사와 추측이 난무했지만 이번에도 밝혀지지 않았다. 미군정 측 자료에는 김구가 조직한 청년조직이나, 임정시절부터 김구의 오랜 측근이던 염동진(廉東振)의 비밀결사 백의사(白衣社)를 지목하였다는 기록도 나온다고 한다. 임정집권을 노리고 있는 김구는 장애물 좌우합작을 증오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에서 김일성이 키워낸 여운형의 둘째 딸 여연구(呂鷰九)는 “아버지를 살해한 세력은 종파분자들”이라 주장하였다. (여연구 [나의 아버지 여연구] 김영사,2001). 그가 말한 종파분자란 여운형을 이용하고 경멸하며 좌우합작을 배척한 박헌영 일당을 가리킨다. 
    여운형의 피살 전 4월에 작성된 소련 정보문서를 보자. 미군정의 좌우합작이 공산당 고립작전으로 경계하는 소련은 여운형이 “반동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남조선로동당과 투쟁하고 있다. 그는 남로당에 가입한 인민당과 사회로동당 구성원들을 자기편으로 빼가려 한다. 미국을 믿는 여운형은 김규식과 좌우합작을 강화할 것이며 하지는 여운형의 말에 만족하고 있다...” (전현수 편역 [소련군정문서, 남조선 정세보고서-1946~1947] 국사편찬위, 2003)
    이 무렵부터 여운형은 여러차례 테러를 당한다. 암살의 배후가 박헌영이라는 반증의 하나로 보이지 않는가.
  • ▲ 여운형의 아들과 두 딸이 김일성(가운데)를 오랜만에 만나 우는 모습(1979년 북한 공개사진). 오른쪽은 김일성 직속 거물간첩 성시백.
    ▲ 여운형의 아들과 두 딸이 김일성(가운데)를 오랜만에 만나 우는 모습(1979년 북한 공개사진). 오른쪽은 김일성 직속 거물간첩 성시백.
    ★여운형, 김일성과 비밀회동 5차례...거물간첩 성시백이 심부름

    해방순간, 일본총독으로부터 치안행정을 인계 맡아 ‘건준’(건국준비위원회)을 전국에 주직하였으나 곧 나타난 박헌영의 ‘인민공화국’에 깡그리 빼앗긴 여운형, 그 악연은 3.1운동후 1920년대 상하이로 거슬러 오른다. 일찍이 레닌의 코민테른에 참여, 클렘린 궁에서 레닌을 두 번이나 만나 충성을 맹서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회의원 여운형은 임정 총리 이동휘와 함께 상하이 ‘고려공산당’ 을 창당한다. 여기에 나타난 20대초반 박헌영을 14살 선배 여운형이 키워주고 엮어주며 이때부터 두 사람은 조선공산주의를 이끄는 선봉이 되었다. 

    그런데 해방후 진주한 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가 작성한 비밀문서 ‘G-2 Periodic Report’(1945)에는 여운형에 관하여 “한국에 친일파로 널리 알려진 정치가”이며 “조선총독의 지원금(2,000만엔)을 받았다”고 기록되어있다. 6.25때 유엔군이 노획한 조선공산당 문서철에도도 "변명할 필요 없는 친일분자"라고 써있다.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조병옥(趙炳玉) 박사도 [나의 회고록]에 여운형의 친일(親) 행위를 회고하는 기록을 남겼다.

    해방초기 ‘인공’ 부주석 여운형이 북한에 처음 잠입한 것은 1946년 2월, 북한 단독정권 인민위원회가 수립된 다음날 10일 위원장 김일성과 첫 비밀회동을 가진다. 이때 박헌영 노선을 비판하며 민족통일전선에 김구와의 합작을 논의하였다. (박병엽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앞의 책). 
    그때부터 5차례나 밀입북하여 김일성 자택에서 지내며 비밀회동을 거듭, 소련군정의 공작지령을 받아가며 박헌영과의 경쟁을 벌인다. 
    “북조선은 해방되었는데 남조선은 미국의 식민지”라며 좌우합작을 통한 적화통일노선을 장담하는 여운형에 대하여, 김일성은 “박헌영과 달리 여운형의 좌우합작이 남한의 중도세력 흡수에 좋다”며 자금을 계속 지원한다. 

    김일성은 여운형에게 “서울 가서 정치활동을 안심하고 하라”면서 북한로동당이 힘 닿는데까지 돕겠다고 격려하였다. 그는 “유능한 정치공작원 성시백(成始伯)을 서울에 상주시킬 예정이니 그에게 시킬 일이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시켜도 좋다”고 다짐하였다. 성시백은 이미 남북을 오가면서 김일성과 여운형의 심부름을 계속해왔으므로 여운형도 여러번 만나 잘 알고 있다. 
    김일성 직속의 성시백은 여운형의 3당합당과 박헌영의 남로당 결성 임무를 마친 뒤에는 아예 ‘북로당 전권대표’ 자격으로 서울에 정착하여 김구의 남북협상을 비롯, 6.25침략까지 어마어마한 공작을 벌이게 된다.

    마지막 밀입북때 여운형은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에게 두 딸과 아들 하나를 맡아달라고 부탁, 1947년 3월 평양에서 온 사람이 데려갔다. 김일성 덕분에 모스크바 유학까지 마친 여운형의 자녀들 중 차녀 여연구는 최고인민회의 부의장까지 올랐고, 문익환 목사 등의 입북을 알선했으며, 1989년 밀입북한 여대생 임수경이 한국경찰에 구속되자 석방투쟁위원장 노릇도 했다. 

    인물 좋고 체격 좋은 여운형은 화려한 웅변과 특유의 매력으로 청년남녀의 인기를 독자지, 스포츠를 좋아하여 알몸 광고모델까지 나서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우선 정부부터 세우자. 이념은 그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다”는 발언처럼 여운형은 이념집착형 박헌영과 달리 시대 변화의 물결에 따라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즐기는 인간형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이정식 [여운형;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합주의자] 서울대 출판부, 2008. 정병준 [몽양 여운형 평전] 한울, 1995). 
    그러나 여운형이 청춘부터 뿌리박은 삶의 기둥은 공산당이다. “미국에 이용당하면 안된다”는 김일성의 지적에 여운형은 “내가 미국을 이용하고 있으니 두고 보라”고 장담하며 "이승만 타도부터 할것"이라고 다짐했던 그는 62세에 쓰러졌다.  장례식은 8월3일 서울운동장에서 ‘인민장’으로 치러진다.

    좌우합작에 목을 맸던 하지 사령관은 7월23일 “여운형씨의 참화는 한국정계의 비극적 현상을 여지없이 말하는 것으로서 청년단체, 언론기관, 정치 지도자들의 맹성을 촉구한다”는 성명을 냈다.([조선일보]1947.7.24.). 이제 짝을 잃은 김규식의 좌우합작은 어디로 갈 것인가.
  • ▲ 미소공위의 소련대표단을 만난 여운형(오른쪽).
    ▲ 미소공위의 소련대표단을 만난 여운형(오른쪽).
    ★임정봉대론 부활...이승만, 김구에게 ‘썩은 동아줄 그걸 못 끊어!“

    좌우합작의 좌축(左軸) 여운형이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김구 측의 ‘임정봉대론’이 또 전면에 나선다. 미소공위가 완전 무산되고 나면 임정이 선수를 쳐서 권력을 잡아야 하는 상황이 된다. 
    그동안 이승만은 미소공위 ‘5호성명’에 가담하는 정당-단체들이 몰리자 그 대응책으로 전국적인 ‘한국민족대표자대회’를 구성하고, 김구의 국민의회와 통합을 추진하며 독자적인 총선거 실시방안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김구 측은 미소공위가 결렬될 것이 확실시되자 이승만 측과의 통합에 불응하게 된다. 
    김구의 국민의회는 9월1일 ‘긴급제안’을 내고 “이승만의 총선거 안은 38선을 존속시키고 조국을 양분할 남한 단독정부 노선으로 향하는 것이므로 중지해야”한다고 선언, 임시정부 법통론을 내세우며 자율적 집권, 즉 실패하였던 임정 집권론을 꺼내 들었던 것이다.
    이에 격분한 이승만은 이를 반박하며 김구를 설득하는 간절한 메시지를 보냈다.
    “남한의 총선거를 원치 않는다는 주장이 있은 즉, 이는 사세(事勢)를 떠나서 건국대업의 전도를 막는 공담(空談)일 뿐이다....(중략)....속수무책으로 앉아서 남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통일시켜 주기를 바라고 있다면 어불성설이다. 
    미국인들과 협조할 필요 없이 정부를 세우자는 국민의회의 그 정신만은 절대 찬성하는 바이나, 당초에 우리 힘으로 왜적을 타도하였으면 타국의 간섭이 없을 것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못하였으므로 미국이 이 땅을 장악한 경우에서 독자집권을 맹목적으로 고집한다면 우방의 동정도 잃을 것이오, 고립무원으로 야심을 가진 타국(소련)을 대적하기에 더욱 위태로울 것이다. 하물며 미국이 우리 독립을 반대한다면 죽기로써 항거할 것이나 만국전체(세계)가 우리 독립을 절대 주장하는 터이다. 우방과 합작 안할 이유도 없거니와, 총선거로 국회만 성립된 후에는 국권(國權)이 우리 손에 있는 것인 즉, 이것을 하기에 도움이 되는 것은 즉 독립을 돕는 일이니 이를 거절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동아일보] 19437.9.4)
    김구와 이승만의 세계정세 통찰력과 지정학적 독립 전략전술의 극명한 차이가 드러나는 설명이 아닐 수 없다.
    이승만은 김구를 붙잡고 ‘주석’을 이용하는 임정봉대론 세력으로부터 김구만이라도 떼어내고 싶어 조바심친다.

    “김 주석과 나는 이러한 양해와 결심이 공고하므로 공사 간에 의점(疑點)이 조금도 없으나, 오직 중국에서 수십년 동안을 임시정부 옹대로 사생을 같이하던 동지들과 노선이 갈리기를 차마 못하는 후의로 김 주석이 마음에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중이니...(중략)....총선거를 조속히 진행하여 국가 운명을 누란에서 구원하며 민족정세를 구학(丘壑; 언덕 골짜기)에서 구제하도록 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메아리 없는 호소...과연 김구는 이승만의 간곡한 설득에 응할 태세가 되어있던가?
    날마다 김구의 결단을 기다리는 안타까움에 이승만은 혀를 찼다고 한다.
    ”다 썩은 동아줄, 이걸 못 끊어. 이걸 못 끊는단 말이야“ (윤석오의 증언. 손세일, 앞의 책).
    그 썩은 동아줄은 김구를 꽁꽁 묶은 측근들, 조완구(趙琬九), 조경한(趙擎韓), 엄항섭(嚴恒燮) 등을 말한다. 그러나 어쩌랴. 이들이 없으면 김구는 꼼짝도 못하는 형편인 것을!
  • ▲ 이승만과 맥아더, 마셜 국무장관(왼쪽부터).
    ▲ 이승만과 맥아더, 마셜 국무장관(왼쪽부터).
    ◆미국의 결단, 소련과 유엔에 ”한국문제 유엔 상정“을 통보

    하지는 당황했다. 여운형의 죽음으로 좌우합작은 물거품이다. 미소공위도 평양에 가더니 타협은커녕 극과 극의 선전장으로 변해 파탄을 향해 달린다. 하지는 합동참모본부에 미소공위의 실패를 전제한 대한정책 방향을 건의하는 급전을 쳤다. 
    미국 정부는 급변하는 상황전개에 따라 7월23일 3부조정위원회(SWNCC) 산하의 한국특별위원회(Ad Hoc Committee on Korea)를 열어 한국문제처리방안을 만들었다. 국무부 동북아시아국 부국장 앨리슨이 7월29일 정리 보고한 ‘앨리슨 비망록’의 내용은 ▶소련이 미소공위를 파탄시키면 모스크바 신탁통치 결정 4대국 회의를 소집, 남북한 미소 점령지역에서 인구비례에 따른 자유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임시한국정부를 수립하고 ▶소련이 4대국 회의를 거부할 경우,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한다는 것 등이다. (Memorandum by Allison, FRUS 1947 vol.Ⅵ.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7권)
    이승만의 오래된 구상이 마침내 맥아더를 거쳐 마셜의 결심을 끌어내 미국정부의 공식정책으로 채택된 역사적 문서가 탄생한 것이었다. 

    미국무부는 8월26일 소련외상 몰로토프에게 9월8일부터 워싱턴에서 4대국회의를 열자고 제의하고 영국-중국에도 통보한다. 몰로토프는 ”4대국회의가 모스크바 결정에 위배된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거부하였다. 영국과 중국은 수락하였다. 소련의 거부를 예상한 미국은 몰로토프의 답신이 오기 전부터 한국문제의 유엔 회부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유엔 총회, 한국문제 의제 채택 41대6 결의

    드디어 9월16일 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관에 훈령을 내린다. ”한국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하기로 결정했으니 이를 소련 외상에게 통보하라.“ 그리고 영국-중국에도 같은 사본을 보냈다. ”한국독립문제에 합의하기 위해 미소공위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을 양방이 인정하였고, 소련이 4대국회의를 거부함으로써 남아있는 유일한 해결방안은 유엔상정 뿐“이라고 천명하였다. 
    이어 유엔사무총장 트리그브 리(Trygve Lie)에게 한국문제를 유엔총회 의제로 추가해달라고 요청하고, 마셜 장관은 유엔총회에서 연설로써 전세계에 공포하였다.
    소련 외상 몰로토프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한국독립문제는 9월21일 유엔 제1정치위원회에서 ‘총회의제 포함’ 건의안을 12대2로 결의했는데 반대는 소련과 폴란드였다. 이어서 9월23일 유엔총회는 ‘의제 접수’를 41대6으로 통과시켰다. 
  • ▲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
    ▲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
    ★소련 슈티코프, ”미군이 철수하면 소련군도 동시에 철수하겠다“

    한국독립문제의 유엔총회 이관 뉴스로 뜨겁게 달아오른 서울 장안에 소련이 난데없는 폭탄을 던졌다. 9월26일 덕수궁 미소공위 석상에서 소련대표단장 슈티코프가 돌연 ‘철군’ 문제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만일 미국 대표가 1948년 초까지 미국 군대를 남한에서 철수시키는데 동의한다면, 소련군은 미군과 동시에 북조선에서 철수할 수 있다는 것을 소련대표 이름으로 성명한다. 양군 철수 후에 남북한의 한국인들끼리 연합정부를 세우도록 하자“ ([조선일보]1947.9.27.) 

    미소공위가 아무런 성과도 없이 종착점에 이른 때, 소련대표단장이 꺼내든 ‘철군’카드는 큰 파문을 일으켰다. 전혀 예상 못했던 하지 사령관은 충격을 받은 듯 참모회의에서 말했다. ”이 제의는 우리가 한국에 온 이래로 가장 부담스러운 선전책동이다. 한국인들만이 아니라 세계 약소국들의 지지를 얻으려는 시도인 것 같다.“ (정용욱 편 [해방직후정치사회자료집-1, 다락방,1994. 손세일, 앞의 책]
    그런가? 군사전투전문가 하지 장군이 정치 물을 먹더니 넋이 빠졌나?
    북한 인민군은 급성장하였다. 지난해 7월 김일성과 박헌영, 슈티코프를 모스크바로 부른 스탈린이 ”북한군을 무장시켜라“ 명령한 사실을 잊었는가. 그때부터 소련 군사전문가들과 고문관들, 탱크, 전투기, 각종 무기와 탄약 등이 압록강을 건넜다. 소련과 중공 지역의 조선 병사들은 또 얼마나 고향으로 몰려갔던가. 북한의 소련 군정은 1년동안 정예 병력만 10만명 넘게 만들어냈다. 미-소 양군 동시철수 제안은 미군만 태평양으로 가라는 말, 소련군은 압록강-두만강만 건너면 된다. 
    당시 주한 미군은? 미군정은 국방경비대를 뒤늦게 창설하였지만 남로당 청년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절반이상은 공산군이 되었다. 민주주의 원칙을 지킨다는 미군정은 남로당 청년들의 신분조사는커녕 그들에게 ‘국방’을 맡겨놓고 있는 형편이었다. 
  • ▲ 스탈린의 미-소 양군 동시철군 제의에 혼자서 맞선 이승만(왼쪽)과 슈티코프-스탈린.
    ▲ 스탈린의 미-소 양군 동시철군 제의에 혼자서 맞선 이승만(왼쪽)과 슈티코프-스탈린.
    ◆이승만, ”소련군만 나가라. 미군은 못 나간다“ 왜?

    슈티코프의 미-소 동시철군 제안을 듣자 이승만의 머리가 분노에 곤두섰다. 
    도전(挑戰)과 응전(應戰)에 능한 이승만의 레이더가 소련의 술수를 금방 다 읽어낸다. 미소공위가 실패할 경우, 조마조마했던 이승만은 ”그러면 그렇지“ 올 것이 온 것임을 직감한 것이다. 
    결국 스탈린의 남한 공산화 야욕이 뽑은 새 카드는 ‘군사적 도전’이다. 나흘 후 9월30일 이승만은 결단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미소 양군을 동시 철퇴하자는 소련의 제의를 우리는 의외로 알지 않는다. 그 배후의 의도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렇게 말문을 연 성명은 소련의 심장을 찌른다.
    예상했던 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스탈린의 침략주의! 일찍이 이승만은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일본이 망하면 소련이 한반도를 점령한다“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조속히 승인해야 ”또 하나의 전쟁과 동족상잔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해온 지 몇 년이던가.
    이승만의 단호한 성명은 소련군의 북한점령 자체를 ‘이유 없는 국제적 폭행’이라 규정한다. 

    ”파괴된 정의와 인도에 대하여 세계여론이 분기한다면 그 세력을 소련으로서도 전연 무시치 못할 것은 잘 알았던 바이다. 약소한 우방의 반부(북한)를 하등의 이유나 권리도 없이 점유함은 막심한 국제적 폭행이다. 진전 세계평화를 희구한다면 문명한 국가들은 중세기적 비행은 단연코 금기하고 세력보다 공론을 중히 해야 할 것이다. 
    40년전 서양제국이 일본을 허하여 한국을 강점케 하던 때에 나는 이런 말을 하였거니와 다시 반복하여 말하노니, 총검을 가지고 선인(善人)을 협박하는 강도를 좌시하면, 같은 총검이 좌시하던 사람에게도 가는 날이 있으리라고 했던 것이다. 미국은 1941년12월7일에 진주만의 쓰라린 경험을 반복치 말라고 능히 경고하는 바이다.“

    소련이 북한을 점령할 이유가 없다함은 이승만이 반복 주장해 온 바, 소련의 대일참전 포고가 일본이 항복의사를 밝힌 뒤였기 때문이며 ‘해방군’을 자처하는 것은 어불성설 공산당의 침략 선전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철군은 불법점령한 소련군만 북한에서 나가면 된다고 강조한다. 

    ”적국을 포함한 모든 다른 피점령국가들은 총선거로 각자의 정부를 조직하였음에 반하여, 과거 2년동안 한국인은 남한에서도 정부건립 총선거를 시행하도록 용허되지 않았다. 한국민족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참경에 빠져 있음은 아무나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으리라. 이에 한인들은 미국 점령지에서라도 총선거를 행항여 정부를 조직키로 필경 결심하게 된 것이다. 미군정부의 협력이 속이 있다면 협력 있이 해도 좋고, 가망이 없다면 협력 없이라도 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양 주둔군을 동시 철퇴하자는 소련의 제안이 있다. 그들이 그들의 고상한 표방과 같이 과연 한국이 통일 민주국가 되기를 바라는 성의가 있다면 우리의 자유선택의 정부를 세울 수 있도록 북한에서 즉시 또는 무조건으로 철퇴하기를 우리는 요구한다.
    우리는 어떤 외국이나 외국군이 우리에게 둘러씌우는 것은 무엇이고 안 받을 작정이다. 일보 진하여 소련이 미국과 협동하여 한족의 주권을 엄격히 존중함을 선언하기를 요청하는 바이다.“

    이승만은 ‘기회 포착’의 명수, ‘정읍선언’에서도 요구했듯이 소련군 철수는 소련 스스로 ‘철군’을 입밖에 내놓은 지금 당장 솔선수범하라는 강박전술이다. 그러면서 미국에 대하여는 그 반대로 ”결코 철수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들이대며 ”철수 말라“고 단호하게 요구한다.

    ”또 한편으로 미국에 요청하는 바는 우리 총선거를 통한 민의에 의하여 정부를 세우고 군정에서 북한에 있는 한인 적군부대(赤軍部隊)를 해산하고 우리의 국방군이 사용할 충분한 무기와 탄약을 제공하여 달라는 것이다. 정권을 인수할 때까지는 치안에 필요한 근소한 군대만을 독립국가로서의 우리 권리에 간섭함이 없이 계속 주둔함이 가할 것이다. 
    한국 분단의 책임을 미국이 적어도 일부 진다고 생각되는 이상, 외국 분점에 의하여 발생된 혼란을 정돈할 시간을 우리가 가질 때까지는 미국이 빠져나감이 불가하며 또 빠져나갈 수도 없을 것이다...“
  • ▲ 이승만 얼굴 변천사. 왼쪽부터 20대 죄수, 35세 프린스턴대학 박사, 45세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73세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 이승만 얼굴 변천사. 왼쪽부터 20대 죄수, 35세 프린스턴대학 박사, 45세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73세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건국’도 하기 전, 미국에 ‘남북통일과 군사협력’부터 요구한 이승만

    이승만의 용미(用美) 전술은 굳은 신념에서 나오는 종교적 용기와 지혜의 작품이다. ‘굳은 신념’이란 기독교국가로서의 미국은 약소국을 분단시킨 ‘죄’를 회개하고 합당한 책임을 다하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말한다. 신앙 깊은 이승만이 아니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기독교 외교’인 것이다. 그리하여 미국은 철군은커녕 분단 한반도를 다시 합쳐야 놓아야 할 장본인이므로 계속 남아서 북한의 공산군을 해산시켜주고 한국군에게 충분한 무기원조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말,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설교이다. 따라서 그때까지 미군 철수는 ‘불가’(不可)하며 ‘도망갈 수도 없을 것’임을 못 박았다.
    ‘철수’란 말 대신 ‘빠져 나간다’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죄 짓고 도망치듯 책임회피 말라“는 이승만 특유의 비유법, 기독교적 양심을 찌른 송곳이다. 그는 평생 말과 글로써 독립운동을 성공시킨 문장가, 전도사, 웅변가, 교육자, 명칼럼리스트, 언론인이다.
    독립운동가 이승만은 독립국가 대한민국을 세우기도 전에 미국 정부에 ‘통일책임’과 ‘한미 군사협력’부터  요구하였던 것이다.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그 누가 그때에 그런 발상을 할 수 있으랴. 이승만에게 한미동맹은 20대시절 한성감옥에서부터 설계했던 꿈이었기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