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47년 4월 미국 외교에서 돌아온 이승만이 미군정 하지 사령관(왼쪽)을 방문하여 요담을 나누었다. 그 다음달 하지는 이승만을 돈암장에 가택연금한다.ⓒ국사편찬위
    ▲ 1947년 4월 미국 외교에서 돌아온 이승만이 미군정 하지 사령관(왼쪽)을 방문하여 요담을 나누었다. 그 다음달 하지는 이승만을 돈암장에 가택연금한다.ⓒ국사편찬위
    ‘돌아온 국민영웅’ 이승만의 방미외교 성공을 축하하는 광고들이 신문에 넘치던 무렵, 모스크바 외무장관회의를 앞둔 미국무장관 마셜은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에게 무기 휴회된 미소공위(美蘇共委)를 재개하자고 제의한다. 
    지난 3월 유럽의 소련침략 방어정책 ‘트루먼 독트린’ 발표와 함께, 뒷날 ‘마셜 플랜’으로 불리는 유럽 재건사업을 입안한 마셜은 한반도에서도 소련의 공산화 공세를 막아내는 해결책을 조속히 강구해야하기 때문이다. 방미한 이승만의 면담요청에 미국정책상 응할 수는 없었지만 이승만과 맥아더가 보내준 ‘한국문제 해결방안’ 문건을 받은 마셜이 이를 비공식적으로 검토를 거듭해 얻은 결론이기도 하다. 몰로토프가 5월8일 미소공위 재개에 동의하였다. .

    하지 미군정 사령관은 5월15일 미소공위가 재개된다고 공식발표한다. 그리고는 “이번엔 양국협상을 성공시키기 위하여” 우익세력들이 미소공위 협의대상 그룹에 참여하도록 설득하는 한편, ‘죽어도 반탁’을 고집하는 이승만을 돈암장(敦岩莊)에 가택연금 시킨다.

    “이승만 박사는 봄부터 여름까지 사실상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전화도 철거되고, 헌병들이 24시간 그의 집을 감시했다.
    모든 우편물은 검열 받았고, 매주 방송하던 라디오 담화는 중단되었다.
    그를 만나러 한국에 온 방문객들은 못 만나도록 조용 받거나 방해받았다. 
    이 박사가 국민들을 접촉할 모든 수단이 막혀버렸다.
    하지 군정청은 그러나 이 박사가 남한 전역에 확립해 놓은 광범위한 정치조직까지 제거하거나 억제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워싱턴에 있는 우리와 같은 이박사 지지자들의 활동도 막지 못했다.” (로버트 T. 올리버 지음, 한준석 옮김 [이승만의 대미투쟁] (원제: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 비봉출판사, 2013)
  • ▲ 방문객도 금지되고 전화도 끊어진 돈암장에서 정원을 거니는 이승만.ⓒ연세대이승만연구원
    ▲ 방문객도 금지되고 전화도 끊어진 돈암장에서 정원을 거니는 이승만.ⓒ연세대이승만연구원
    ★하지의 ‘불변의 법칙’=흔히 행방정국의 ‘앙숙’으로 불리는 하지와 이승만, 두 사람의 관계를 저해한 것은 “그들의 성격 탓이 아니라 정책 때문“이었다고 올리버는 지적한다. 그것도 정책자체보다 미국 정책을 집행하기 위해 맡기는 ‘채널’을 잘못 선택한 미국 정부의 ‘실수’의 문제라는 것. 즉 하지 사령관은 그 채널에 맞지 않는 ‘잘못된 배역’(miss-cast)이라고 정곡을 찌른다. 하지는 충성스러운 야전사령관, 평생 정치는 관심도 없던 군인인데 정치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미-소 대결의 국제정치를 맡겨놓았다. ”승리를 위해 싸우는 것 밖에 모르는” 장군은 그에게 주어진 ‘미소공위의 성공’이란 ‘사명’ 앞에서 이를 시비하고 저지하려는 이승만은 미국의 승리를 가로막는 ‘적’이나 다름없다. 맥아더가 일본을 좌지우지 하듯이 하지도 ‘작전지역‘ 남한을 한손에 쥐고 달린다. 그는 직속사령관 맥아더를 넘어 번스 국무장관이나 대통령 트루먼에게 ”이승만은 개인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미국을 괴롭히는 방해꾼이니 제거해 달라“고 몇차례나 직소하였다. 그에게 미소공위는 ’불변의 법칙‘이었던 것이다. (올리버, 앞의 책)

    이 ’불변의 법칙‘이 변화하고 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변화를 감지하는 하지도 일단 임무는 완성해야하는 ’군인정신‘으로 이승만을 감금하고 말았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가장 중요한 인물을 감금한 것은 한미양국에 가장 중대한 실수였다고 올리버는 탄식한다. 
  • ▲ 1947년 5월 재개된 미소공동위원회의 리셉션에서 소련대표단장 슈티코프(오른쪽)를 만나 대화하는 이승만 민주의원 의장(왼쪽). ⓒ연세대이승만연구원
    ▲ 1947년 5월 재개된 미소공동위원회의 리셉션에서 소련대표단장 슈티코프(오른쪽)를 만나 대화하는 이승만 민주의원 의장(왼쪽). ⓒ연세대이승만연구원
    ★이승만 ”미국식 민주주의냐? 소련식 민주주의냐?“

    미고공위 재개에 대비하여 미군정은 우익정파들 설득에 나섰다. 미국측 수석대표 브라운(Albert F. Brown) 소장은 이승만, 김구, 조소항, 김성수, 백남훈, 장덕수, 서상일 등 8명을 덕수궁으로 불러 타협안을 제시한다. 신탁통치문제는 뒤로 미루고 우선 남북한임시정부를 먼저 구성할 테니 ”반대는 그만하고 꼭 참여해 달라“고 3시간이나 호소하였고, 이튿날엔 하지가 직접 나서  2시간 넘게 간청하는 것이었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하지를 향하여 단도직입적으로 입장을 천명한다.
    ”신탁통치문제를 미루지 말고 아예 그 조항을 삭제하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함과 동시에 통일임시정부가 어떤 형태의 ’민주주의 정부‘인지를 명시하기 전에는 참가할 수 없다.“
    이에 다급한 하지는 국무부에 설득용 성명이라도 내달라 건의했으나 국무부는 거부한다.
    이승만은 우익세력에 행동통일을 다짐하고 나서 5월21일 단호한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미소공위 임무수행에 다음 두가지 조건이 명시되기 전에는 양심상 참가 못한다.
    1) 소위 신탁통치와 임시독립정부와는 모순되므로 신탁통치 조겅을 전부 삭제하라.
    2) 미소 양국이 한국에 민주주의적 독립정부를 수립하려는 바, ‘민주주의’라는 명사에 2종의 구별이 있으니, 소련이 주장하는 민주주의 정체가 그 하나요 미국에서 실행되는 민주정체가 그것이다. 이 두가지 중에 어느 것을 의미하는지를 우리가 먼저 알아야겠다. 소련식 민주주의냐, 아니면 미국식 민주주의냐, 이 두 가지를 혼잡해서 정체를 세원다면 장래 분열과 혼란을 면키 어려우며 열국의 기대에 어그러지게 되는 까닭이다. 이 2개 조건이 해결되기까지 우리는 참가를 보류한다.“ ([조선일보] 1947.5.23.)
  • ▲ 한민당 총수 김성수(왼쪽)와 이승만이 담소하는 모습.ⓒ연세대이승만연구원
    ▲ 한민당 총수 김성수(왼쪽)와 이승만이 담소하는 모습.ⓒ연세대이승만연구원
    뜻밖에 한민당이 ’배신‘...”국민도 자신도 속이지 말라“

    미소공위가 ’정부수립‘부터 한다며 설득하자 반탁투쟁을 벌이던 우파 진영은 크게 동요한다. 
    이참에 불참했다가는 새로운 정부에서 제외될 것이고 그동안 투쟁도 보람없이 ”닭 쫓던 개“처럼 권력에서 밀려나 수십년 독립운동도 헛일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돈암장에 김성수, 장덕수, 김준연 등 한민당 인사들은 연일 돈암장에 몰려와 이승만에게 강력히 ’참가‘를 주장하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그때마다 ’보류‘로 못을 박곤 하였다. ([동아일보] 1947.6.1.) 5월30일 또 다시 한민당 간부들이 졸라댔을 때에도 그랬다. 
    그런데 이 날 이승만이 마지못한 듯 한마디 덧붙였다. 
    ”하지가 하는 말이 내가 방해꾼이라 하니, 귀하들에게 참가하지 말라고는 안하겠소. 다만 나는 불참할 것이니 각자 알아서 자유의사대로 결정하면 되지 않겠소“
    한민당 인사들은 얼굴이 금방 환해졌다. 드디어 ’참가 명분‘을 얻었다는 듯 그들은 ”신탁통치문제는 미소공위에 참가해서 반대해도 될 것“이라 다짐하며 신나는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이승만은 아연했다. 이럴 수가...혼자 남은 이승만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연신 중얼거렸다.
    ”왜놈이라도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을 거야...“  내 뜻을 아는 자들이 ’설마‘ 했던 이승만은 몹시 낙담했다고 한다. (이승만의 비서 윤석오(尹錫五)의 증언 [경무대 4계], 손세일, 앞의 책). 지도자의 신념을 잘 아는 정치집단이 말한마디를 핑계 삼아 적대적 권력체제에 참여하기 위해 등을 돌린 ’집단배신‘을 이승만이 쉽게 용서할 수 있을까. 

    한민당은 6월6일 담화를 발표한다. 
    ”공산주의 지배를 받지 않는 정부가 되고, 신탁통치를 반대할 수 있는 정부가 되기 위하여 미소공위와 협조하는데 참가함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김성수와 장덕수는 반도호텔 하지를 방문 요담을 마친후, 6월10일 ’미소공위 참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승만 박사의 주장에 따른 총선거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미소공위에 들어가 관절코자 함이다“ 주언부언 궁색한 설명이 필요이상으로 길어졌다.

    이승만은 즉각 한민당의 행태를 반박하는 성명을 냈다. 
    ”공위에 참가해서 신탁에 반대할 수 있다는 말은 나로서는 해석이 곤란하다. 차라리 신탁을 지지하기로 결심하고 들어갈 것이니, 서명은 지지를 말함이오, 들어가서 반대하겠다는 것은 자신의 신의를 스스로 무시하는 것이다. 이런 인사들이 국제회의석상에 우리 대표로 참가하는 것도 원치 않거니와, 설령 자기의 마음을 속이고 남을 속여서 들어간다 해도 반대할 기회를 허락받지 못할 것인 즉, 공상으로써 인심을 현혹케 하는 것은 공사간에 유해무익일 것이다.“
    이승만은 이때부터 한민당 인사들에 대한 불신 때문에 거리를 두게 되었으며, 다음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때 건국내각에서 한민당의 총리 등 입각요구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전해진다. (윤석오의 증언, 손세일, 앞의 책)
  • ▲ 50년만에 인천으로 귀국한 미국시민권자 서재필(가운데)을 마중간 '좌우합작 대표' 김규식(왼쪽)과 여운형이 한차에 탄 모습.
    ▲ 50년만에 인천으로 귀국한 미국시민권자 서재필(가운데)을 마중간 '좌우합작 대표' 김규식(왼쪽)과 여운형이 한차에 탄 모습.
    ★서재필, 50년 만에 귀국...하지, ”이승만 물리칠 대타” 초청

    장마철 하늘이 잔뜩 흐린 날 7월1일 오후4시, 인천항 부두에 말쑥한 양복차림의 미국신사 한명이 배에서 내렸다. 기다리고 있던 김규식과 여운형 등이 다가가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피로한 기색이 완연한 그는 85세 필립 제이손(Phillip Jaisohn), 50년 만에 귀국한 서재필(1864~1951) 박사였다. 1884년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미국에 망명, 의사가 되어 미국여인과 결혼하여 필라델피아에 정착했다가 1895년 귀국하여 독립협회 활동 중에 1897년 추방되어 도미, 이번엔 하지 사령관의 초청으로 왔다. 하지는 이승만의 측근 올리버에게 서재필을 설득하여 데려오라고 부탁하였다. 반소주의자 이승만 대신, 이승만의 스승 미국인 서박사가 좌우합작을 지원해주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처음에 사양하던 서재필이 나타난 것이었다.

    서재필의 귀국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혼자서 중얼거렸다고 한다.
    "공산당과 합작 성공을 위해서 모셔온다고? 서재필 아니라 서재필 할아버지를 데려와봐라, 그게 되나.." (윤석오의 증언 [경무대 사계] 동양방송, 1977)

    7월12일 서재필 박사 환영대회가 서울 운동장(현재 DDP)에서 열렸다. 이승만, 김구, 여운형 등이 환영연설을 했다. 거리에는 환영 현수막이 걸리고 여러 가지 전단이 뿌려졌는데 서재필 박사에게 “과도정부 대통령직을 수락하라”는 내용이 많았으며 이를 위해 ’백만인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하지 장군이 이승만 박사를 퇴진시키려고 서재필 박사를 데려왔다고 말했다. 
    서재필은 공개석상에서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한국을 돕기 위해서라면 미국 시민권을 포기할 용의가 있다”고 대답하여 ’이승만 대타 서재필‘이란 인식을 강화시켜주었다.
    그런 그가 최악의 실수를 저질렀다. 기자회견에서 “한국인들은 비누 한 개도 제대로 만들줄 모르는데 어떻게 자치(自治)를 할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여 모두 놀랐다고 한다. 
    하지의 기대감과 현실의 한계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던 필립 제이손은 복잡한 정쟁 속을 헤매다가 더 견디지 못하고 점차 국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올리버 [이승만의 대미투쟁] 앞의 책)
    미군정의 일부 한국인들은 실제로 이승만을 거부하는 나머지 하지를 부추겨 ’서재필 대통령‘을 추진하였고, 노쇠한 서재필이 도미하자 “미군정의 연장”까지 획책했음이 뒷날 드러나고 만다. 서재필은 6.25때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한 1951년 1월5일 제2의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다.
  • ▲ 1947년 8월 이승만이 사실상 유폐되었던 집 '마포장'의 위치 현재 모습, 새 건물에 음식점 간판이 보인다.ⓒ조선DB
    ▲ 1947년 8월 이승만이 사실상 유폐되었던 집 '마포장'의 위치 현재 모습, 새 건물에 음식점 간판이 보인다.ⓒ조선DB
    ★“집 비워달라” 돈암장서 쫓겨나...‘마포장’ 유폐...‘이화장’으로 이사

    무더운 여름 어느 날, 돈암장의 집주인 장진섭(張震燮)이 윤치영에게 말했다.
    “그만 집을 비워주시오. 내가 써야겠소” 장진섭은 이승만의 거실까지 자기 물건들을 들여놓았다. 하지의 사주(使嗾) 여부는 알길이 없지만, 미군정과 불화한다는 말을 듣고 나온 행동임이 분명하다. 윤치영은 염량세태(炎凉世態)를 실감하며 새집을 물색하겠다고 답했다.(윤치영 ‘나의 이력서’ [한국일보] 1981.9.12. 손세일, 앞의 책) 
    여기저기 돌아다녀 봤으나 마당한 집을 찾지 못하고 결국 미군정에 수소문하여 집을 구할 수 있었다. 마포지역 한강변 언덕에 일본총독부 정무총감이 여름 별장으로 쓰던 집, 미군 진주후엔 미군 대령이 기거하다가 떠나고 텅 비어있는 집이다. 
    [동아일보]는 이승만 박사가 8월18일 마포로 이사했다고 보도했다. 이때부터 ‘마포장’으로 불린 집엔 이승만 부부와 비서 3명(이기붕, 윤석오, 황규면)이 들었는데 집안이 정리되지 않아 짐도 다 풀지 못했다고 한다. 비서 윤석오의 증언을 들어보자.(윤석오의 증언).
    이승만이 작업복으로 갈아있더니 팔을 걷어부쳤다. 문을 닫아도 맞지않자 비서에게 연장박스를 가져오라 말했다. 하와이에서 쓰던 대패, 톱, 끌, 망치, 칼 등 연장이 가득한 상자에서 망치와 대패를 꺼내더니 문짝을 떼어내 자로 줄을 긋고 대패질을 한다. 숙련공 같았다.
    문을 달아 맞춰놓고는 씨익 웃은 이승만은 정원으로 나갔다. 버려진 고목을 도끼질로 쓰러트려 치우고 무성한 잡초를 모조리 뽑는 것이었다. 그것도 능숙한 목수처럼 정원사처럼.

    ‘마포장’에서 사실상 유폐생활하는 이승만은 명상과 사색으로 건국 구상을 다듬는다. 
    지금도 보존되어있는 ‘정부수립 성명’이란 문서는 붓글씨 친필로 '토지개혁'까지 다짐한다. 
    “이번에 세울 과도정부는 북한에 소련이 설립한 정권이나 남한에 미국이 설립한 민정부 등을 대신하는 게 아니라, 총선거로 정식 정부를 하루 속히 건설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한다”고 천명하고 정식정부가 수립되면 모두 자동적으로 해체한다고 셜명한다. 그 새 정부의 과제는 38선 철폐와 미소 점령군 철수 등 9개항으로서 ★파괴-분열-반역 분자 제재 특별법 제정 ★친일분자-사대주의 분자 처벌 특별법원 설치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하여 지주도 소작인도 손실이 없게하는 토지개혁 등이 두드러진다.
  • ▲ 이화장 뒷편 언덕에 서있는 조그만 정자, 이곳에서 이승만이 대한민국 건국내각을 조직하여 '조각당'이란이름이 붙었다.
    ▲ 이화장 뒷편 언덕에 서있는 조그만 정자, 이곳에서 이승만이 대한민국 건국내각을 조직하여 '조각당'이란이름이 붙었다.
    ★또 암살음모 적발=이승만은 직계조직 ‘독촉’을 총동원하여 선거 채비를 서두르고, 임시정부 법통론을 주장하는 임정세력으로부터 김구를 떼어내는 작업도 병행하였다.
    이 무렵, 놀라운 사건이 적발된다. 이승만 암살음모, 범인들은 마포장 경비 경찰 4명과 남한강 파출소 순경 1명이었다. 마포 경찰서장 윤우경(尹宇景)이 아슬아슬하게 검거한다.
    “마포장 경비순경 전원이 남로당에 가입하여 이승만 박사를 저격 살해할 음모를 적발 검거하였는데, 이것은 나의 운수도 윤 서장의 운수도 아니오, 이승만 박사가 정권을 잡을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장택상 수도경찰청장 훈시, 윤우경 [만성록晩省錄] 서울프레스, 1992).
    미군 방첩대(CIC)에서는 이승만과 김구 세력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김구 쪽 누군가가 이승만을 암살할 가능성을 우려하는 정보도 입수했다고 했다. 

    윤우경 서장과 이승만 측근들은 이래저래 집을 옮기자고 했다. 일본식 여름 별장 가옥은 가을 바람이 불자 계절보다 먼저 추워졌다. “이 박사는 심한 기관지염으로 눕고 저도 그렇습니다. 난방이 안 되어 전기난로 하나로 견디는데 그나마 전력이 약해 가열되지 않는 군요”(프란체스카가 올리버에 보낸 편지).
    윤치영이 다시 집을 구하러 나섰다. 실업가 33명의 도움을 받아 이화동1번지 김상훈의 집을 사게 되었다. 이승만의 정치활동을 지원하는 승려 백성욱(白性郁)이 자기 매부 권영일(權寧一), 전용순(全用淳), 신용욱(愼鏞頊), 홍찬(洪燦) 등 기업인의 뜻을 모은 것이다. (윤석오, 앞의 증언). 창경궁 동편 낙산(駱山) 자락에 앉은 그 집은 조선시대 인조(仁祖)의 셋째 왕자 인평대군(麟坪大君)인도 살았던 풍광 좋은 동네, 곧 ‘이화장(梨花莊)’으로 불린다. 
    마포로 쫓기듯 옮긴지 딱 두 달 된 날, 10월18일 이승만 부부 일행은 이화장으로 이사하였다. 올해로 76년째 ‘건국대통령의 집’이 된 그곳은 과연 ‘대한민국 탄생’의 명승지다. 선진국 같으면 ‘건국의 성지’가 되었을 이화장은 2009년 이명박 정부가 사적 제497호로 지정하였고, 지금은 서울 어딘가에 세워질 ‘이승만기념관 탄생’을 기다리고 있다. 
    자, 이화장에서 이승만은 또 어떤 드라마를 쓸 것인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