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군정 한인민정장관 안재홍, 좌우합작의 김규식, 하지 사령관. 이들은 '미군정 연장 음모'로 들통난 <시국대책요강>이란 문서 때문에 곤경을 치른다.
    ▲ 미군정 한인민정장관 안재홍, 좌우합작의 김규식, 하지 사령관. 이들은 '미군정 연장 음모'로 들통난 <시국대책요강>이란 문서 때문에 곤경을 치른다.
     ★미군정 연장 음모 ‘시국대책요강’ 드러나 대혼란

    미국이 한국독립문제의 ‘유엔 이관’을 발표한 직후, 난데없이 ‘미군정 연장’을 기획한 ‘시국대책요강’이란 문서가 정국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9월25일자로 작성된 문서의 주요내용은 이러하다. 
    ▶한국의 진정한 독립과 통일은 미군 정부의 노력에 의하여 성취될 것으로 믿는다.
    ▶우리 3천만 한인은 미군정부를 자신의 정부로 여겨야 한다. 군정부에 협력하여 이것이 사실상 우리 정부로 변형되도록 함이 우리의 사무이다.
    ▶미군사령관이 남한에서 주권을 장악한다. 그가 제3자적 입장이 아니라 우리의 민족적 입장에서 주권을 행사하기를 우리는 그에게 기대한다.

    요컨대, 미군정 하지(Hodge) 사령관이 한국의 주권을 행사하여 통일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문서를 폭로한 이승만 측 ‘총선거촉진국민대회’에서는 “한인 민정장관 안재홍과 좌우합작의 김규식, 미군정 사법부장 김병로(金炳魯)가 연서로 서명하여 이 문서를 미군 정부에 ‘군정연장 청원서’로 제출했다”고 주장하며 안재홍의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에 안재홍과 김규식은 ‘비민주적 모략’이라고 부정하였는데, 마침내 11월5일 안재홍이 ‘시국대책요강’ 전문을 공개하고 9월 하순에 작성했음을 인정하며 그 동기를 “민족독립국가 완성을 위한 노력이었다”고 설명한다. ([민세 안재홍선집2] 지식산업사, 1983)

    이승만은 이 문서가 하지 사령관의 의중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면서 정치인들의 분파주의를 매도한다. “어찌 공산당 뿐이리오, 우리 독립을 방해하는 개인이나 단체는 ‘독립방해자’로 인정하여 민간의 포용을 받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우리 살길을 찾을 수 있다.”
  • ▲ 우익단체들이 '미군정 연장 절대 반대' '이승만 박사 절대 지지' 등 플래카드를 들고 미군정 참여 세력의 군정연장 음모를 규탄하는 집회를 연일 열었다.(자료사진)
    ▲ 우익단체들이 '미군정 연장 절대 반대' '이승만 박사 절대 지지' 등 플래카드를 들고 미군정 참여 세력의 군정연장 음모를 규탄하는 집회를 연일 열었다.(자료사진)
    ◆유엔 총회, 결의안 통과...이승만, 동유럽형 공산화 우려

    10월30일 유엔총회 제1위원회(정치위원회)가 “남북한 총선거를 감시할 유엔 한국인시위원단을 파견한다”는 미국 결의안을 찬성 41표, 반대 0표, 기권6표로 가결하였다.
    이승만은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여운형의 근로인민당을 비롯한 10여개 정당들이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움직임 때문이다. 자칭 ‘중간파’를 내세운 이들은 ‘임정집권’을 주장하는 세력과 박헌영의 공산당서 버림받은 좌익들이 대부분인 것이다. 

    이승만은 11월4일 새로운 상황전개에 새로운 정국관과 대책을 피력한다.
    “우리는 허영이나 혁식상 독립보다 사실적 국권회복하려는 것이니, 민의에 따라 국회를 세워서 신성불가침의 정권을 확보하는 것이 우리의 독립이다....(중략)....유엔 대표단이 와서 남북총선거를 감시한다는 것은 소련이 불응하면 그 결과는 남한 총선거로 귀결 될 뿐이니, 기왕에 미소공위로 인연하야 오륙개월 세월을 허비한 후 또 다시 시일을 허비할 필요도 없고 형편도 허락지 않는 것이다. 설령 유엔의 결정대로 남북총선거가 된다 할지라도 유엔대표단이 미-소 사령관들과 다소간 협의가 될 것이니, 그 결과로는 진정한 민의대로 진행하기가 어려울 것이요, 파괴분자들이 참가되는 날은 정부나 국회에 들어가서 파괴를 일삼을 것이니, 남들 보기에 한인들이 자치능력이 있다 없다 하는 수욕(羞辱:수치와 치욕)의 구실을 만들 것이다. 
    또한 북한의 공산군이 남한침범을 준비한다는 보도가 자주 들리는 이때에 우리는 하루바삐 정부를 세워서 국방군을 조직해 놓아야 남한이 적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경향신문]1947.11.5.)
    따라서 유엔감시하의 총선거는 의외의 위험한 부작용이 크므로 이승만은 미리 총선거를 실시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독촉국민회와 한민당 등 우익 14개 정당-단체들은 11월15일 서울운동장에서 ‘유엔결정감사 및 총선거촉진 국민대회’를 열고, 여러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그 가운데 “갈 곳이 없게 된 공산분자들이 중간파 명의를 둘러쓰고 12정당합동회의라는 것을 만들어 남한에 공산정권을 세우려 획책하고 있다”고 맹공을 퍼부었다. 
  • ▲ 유엔총회가 남북한 총선거를 감시할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파견키로 결의한 기사. 조선일보 1947년11월16일자 1면 보도.ⓒ조선DB
    ▲ 유엔총회가 남북한 총선거를 감시할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파견키로 결의한 기사. 조선일보 1947년11월16일자 1면 보도.ⓒ조선DB
    ★마침내 유엔 총회 결의안 통과...총선감시 임시위원단 구성

    11월14일 유엔 총회서 드디어 한국결의안이 찬성 43표, 반대 0표, 기권 6표로 통과되었다. (기권6개국은 소련, 백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유엔을 통과한 역사적 결의안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1) 선거에 의해 선출된 한국 대표들이 한국문제 심의에 참여하도록 초청한다. 그 대표들이 한국국민에 의해 공정하게 선출되는 것을 감시하기 위해 한국 전역에 걸친 여행, 감시, 협의를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UNTCOK)를 설치한다.
    2) 유엔 위원단이 한국 국민의 자유와 독립을 조속히 달성시키는 문제를 협의할 수 있고, 국회(National Aseembly)를 구성하여 한국중앙정부(National Government of Korea)를 수립할 대표들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가 늦어도 1948년 3월31일 이전에 실시되어야한다.
    3) 선거후 가능한 한 빨리 국회를 소집, 중앙정부를 수립하고 그 사실을 위원단에 통보한다.
    4) 중앙정부가 수립되는 대로 위원단과 협의, 자체의 국방군을 창설하고, 이에 편입되지 않은 모든 군사단체 및 준군사단체를 해산시키며, 남북한의 군사령부와 민간기관으로부터 정부의 기능을 인수하고, 될수 있는대로 가능하다면 90일 이내에 점령군을 완전히 철수시키도록 점령국과 조정한다.
    5) 위원단은 상황의 진전에 따라 유엔총회의 임시위원단(소총회)와 협의할 수 있다.
    6) 회원국들은 위원단이 책임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모든 원조와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

    이어서 유엔총회는 9개국으로 UNTCOK을 구성,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중국, 프랑스, 인도, 필리핀, 엘살바도르, 시리아, 우크라이나를 지명했는데, 소련 연방국 우크라이나는 거부했다. 

  • ★이승만의 새로운 우려...“유엔위원단 오기 전에 총선거 해야”

    ‘남북한 총선 결의안’이 유엔을 통과함에 따라 국내외 파문이 소란하다.
    첫째, 소련은 이미 모스크바 결정이 있으므로 유엔은 한국문제에 관여할 권한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여 기권하였다. 따라서 유엔총회 결의안의 시행을 소련이 거부할 가능성이 높았다.
    둘째, 남북한총선거에 대하여 유엔감시단이 상대할 선거주체가 북한은 인민위원회라는 정부가 존재하는데 반하여 남한의 한인대표는 미군정 자문기관 입법의원 뿐이다. 
    셋째, 선거법도 남한엔 미정상태였고, 남북한 공동적용 선거법의 필요성 등도 첨예한 문제다.
    이와 관련 이승만의 고뇌와 위기의식은 커져만 갔다. 특히 유엔감시위원단을 구성한 9개 국가들중 중립국 인도나 친소국가들을 보면서 그는 노심초사의 나날을 보낸다. 
    ▶남한에 한인정부대표가 존재하지 않으니 유엔위원단은 북한을 통치하는 김일성의 북한인민위원회 견해에 비중을 두고 진행하려는 편의주의에 흐르지 않을까.
    ▶이승만이 가장 우려하는 상황은 새로 수립될 연립정부의 ‘국가정체성’ 문제였다. 유엔위원단이 본질은 도외시한 채 형식상으로만 ‘독립모양’을 갖춘 정부를 만들어놓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한반도는 소련이 동유럽에서 구사한 공산화 성공 무대를 가설해주는 꼴이다. 폴란드나 체코처럼 연립정부를 세워놓고 공산당이 금방 ‘숙청’을 통해 권력을 독점하는 방식, 만약 유엔위원단이 북한에 이끌려서 그런 환경을 제공해주고 떠난다면 결단코 안될 일이다. (올리버 [이승만의 대미투쟁] 앞의 책)

    임박한 위기감을 주체 못하는 이승만은 11월18일 “총선거를 즉시 실시하라”고 선언한다.
    “남조선 총선거를 반대하는 분자들이 두 가지 문제를 일으켜서 선전하는데, 한가지는 남방에서만 정부를 세워서 서울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서북(북한 평안도-함경도)을 떼어버리려는 계획이라 하나니, 이는 지방열(지역감정)을 고취하여 민족분열을 시켜 당파적 세력을 추진시키려는 계획이니 그 뜻이 심히 음험하다...(중략)...또 한가지 선전은 유엔위원이 조만간 내도하리니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낫다고 한다. 이는 자초로 이박사가 침니자이니 믿지 말고 우리가 자율적으로 전취하자고 경향에 은근히 선전하던 인사들 측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장하는 남조선총선거는 1년 전부터 시작하여 미국무성에서 언명하였고 하지 중장이 선언으로 과도입법의원에서 법안만 통과되면 곧 실행한다고 한 것인데, 그후 백방으로 연기하여온 바 공개로 막지는 못하고 핑계만 하고 있는 중이라....(중략)....
    가장 긴요한 점은 유엔위원이 언제 도착하든지 우리가 선거를 하루바삐 행하여 민의로써 성립한 국회가 있어야만, 그 위원들이 우리 민족의 정당한 대표와 협의 합작애서 민의대로 해결할 것인데, 그러히 아니하고 앉아 기다리면 그 위원들이 누구와 의론하며 누가 합작할 것인지 우리는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 중장이 자기의 의사만을 실시하려는 중에서 우리는 중립파라 좌우합작파라 하는 모든 정객드의 분규 혼잡한 상태는 유엔위원들의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어서, 그 결과는 과거 양년간 경험에 다시 빠지게 되리니 심히 위태한 사정이다. 그러므로 일반민중은 지금에 다 된 독립만을 완성키 위하여 모든 선동에 파동이 되지 말고 하루바삐 선거를 진행하여 국권을 세워 남북통일을 속히 이루기로 일심 매진하자.” ([동아일보] 1947.11.19.)
  • ▲ 이승만을 이화장으로 연일 방문한 김구.(사진은 돈암장때 모습).
    ▲ 이승만을 이화장으로 연일 방문한 김구.(사진은 돈암장때 모습).
    ★김구 “소련의 거부로 남한만 정부 세워도 단독정부 아니다”

    이승만은 이화장으로 김구를 자주 불러 논의를 거듭한다. 김구와의 합작이 중요한 때다.
    11월30일에도 이승만을 방문하고 경교장에 돌아온 김구는 의미심장한 담화를 발표한다.
    “유엔결의안을 지지”한다고 입을 연 김구는 소련의 보이콧과 관련하여 견해를 밝혔다.
    “혹자는 소련의 보이콧으로 인하야 유엔안이 실시 못된다고 우려하나, 유엔은 그 자신의 권위와 세계평화의 건설과 또 장래에 강력의 횡포를 방지하지 위하야 기정방침을 변하기가 만무다. 그러면 우리의 통일정부가 수립될 것은 문제도 없는 일이나, 만일 일보를 퇴하야 불행히 소련의 방해로 인하야 북한의 선거만은 실실하지 못할지라도 추후 어느 때든지 그 방해가 제거 되는대로 북한이 참가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의연히 총선거의 방식으로서 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
    그것은 남한이 단독정부와 같이 보일 것이나 좀더 명백히 규정하자면 그것도 법리상으로나 국제관계상으로 보아 통일정부일 것이요, 단독정부는 아닐 것이다.
    우리 독립을 전취하는 효과에서는 그 정부로 인정받는 것이 훨씬 좋을 겋이다. 이승만 박사가 주장하는 정부는 상술한 제일의 경우에 치중할 뿐이지 결국에 내가 주장하는 정부와 같은 것인데 세인이 그것을 오해하고 단독정부라 하는 것은 유감이다. 
    하여튼 한국문제에 대하야 소련이 보이콧하였다고 하여 한국 자신이 유엔을 보이콧 하지 않은 이상 유엔이 한국에 대하야 보이콧할 이유는 존재치 아니할 것이다.” ([동아일보]1947.12.3.)

    김구는 12월 1일에도 이승만을 방문하고 국민의회 44차 임시대회에 참석하여 자진의 지지자들에게 “이박사의 주장과 자기의 주장이 조금도 다른 점이 없다”는 덤을 강조하였다.
    동시에 그동안 보류되었던 이승만의 한국민족대표자대회와 김구의 국민의회의 통합교섭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12월3일엔 ‘공동협상서’가 발표되었다.
    김구는 다음날 두 단체의 통합으로 “나와 이승만 박사는 통일된 조국의 자주독립을 즉시 실현하자는 목적이 완전히 일치한 것이다. 우리 양인 간에는 본래 다를 것이 없는 것이며 설혹 일시에 소이(小異)가 있다 해도 즉시로 일치를 구할 수 있는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 ▲ 암살된 장덕수. 오른쪽 사진은 김성수, 이활, 신성모, 장덕수(오른쪽 끝)
    ▲ 암살된 장덕수. 오른쪽 사진은 김성수, 이활, 신성모, 장덕수(오른쪽 끝)
    ◆장덕수 암살...미군정, “배후는 김구” 지목 수사

    이때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張德秀,53세)가 피살되었다. 해방후 세번째 암살.
    12월2일 저녁 설산(雪山) 장덕수는 동대문 밖 제기동 자택 청설장(聽雪莊)에서 오늘도 당간부들과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를 논의한다. 11월 14일 유엔총회가 통과시킨 ’유엔감시 남북한 총선 결의안’에 따른 한민당의 집권전략이 발등의 불이다. 
    그동안 거론되던 김구의 한국독립당과의 통합문제는 김구의 임정봉대론(임정집권론)에 막혀 장덕수는 “합당이 아니라 헌당(獻黨;당을 바치는 것)”이라며 반대 입장에 서있었다. 
    “임정봉대론은 비현실적인 김구의 권력욕일 뿐, 궁지에 빠진 한독당을 합당으로 구해줄 이유가 없다”는 당론이 지배적이었다.  
    게다가 송진우에 이어 여운형까지 암살되자 미군정과 친밀한 장덕수도 임정봉대세력을 의심하게 되었고, 유학과 독립운동을 함께한 선배동지 송진우를 잃은 분노가 깊어져 있었다. 

    운명의 그 날도 해가 저물어 회의중인 사랑방에 저녁 밥상이 들어왔다.
    일행이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경찰이 장부장님을 찾아왔다”는 전갈을 받는다.
    장덕수 부인 박은혜(朴恩惠 1904~1963, 뒷날 경기여고교장)이 대신 나가 보았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경찰복차림의 청년과 검은 옷 입은 청년이 서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
    “긴한 일이라 장 박사님을 직접 뵙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부인은 경찰관인지라 아무 생각 없이 방안의 남편에게 알렸다. 
    숟가락을 놓은 장덕수도 별 의심 없이 방문을 열고 성큼 나섰다. 
    말문이 열리기도 전에 경찰관과 청년의 칼빈 총이 불을 뿜었다.
    탕 탕 탕---그대로 쓰러진 장덕수는 숨을 거둔다.

    ◉장덕수 약력◉
    황해도 재령출신(1894), 일본 와세다대학 졸업, 중국에 건너가 신한청년당, 26세때 귀국하여 동아일보 창간(1920)때 주필-부사장, 1923년 미국유학, 이승만의 독립운동단체 ‘동지회’ 참여, 허정 등과 ‘삼일신보’ 창간, 이승만의 독립운동 적극 지원, 1936년 귀국, 동아일보 취체역, 이승만의 ‘흥업구락부’ 설립, 해방후 이승만의 ‘독립촉성 중앙협’ 이론가 활동, 김성수와 한국민주당 창당, 미소동위 참여 지지, 남한단독정부 수립 찬성, 김구와 합작 반대.
  • ▲ 김구가 장덕수 암살 배후자로 지목되어 수사받는 중, 미군정 재판정에 증인으로 출두하여 발언하는 모습.(왼쪽)
    ▲ 김구가 장덕수 암살 배후자로 지목되어 수사받는 중, 미군정 재판정에 증인으로 출두하여 발언하는 모습.(왼쪽)
    ★“백범 선생의 지시 받아 죽였다” 백범 측근의 진술...범인들 일치

    범인 2명은 이틀 후 붙잡혔다. 종로경찰서 경사 박광옥(朴光玉,23)과 연희대학 3년생이자 초등교사 배희범(裵熙範,20)이었다. 
    이들은 김구가 귀국후 새로 조직한 ‘대한학생총연맹’ 간부들이자 한독당원으로 밝혀진다.
    그들은 김구가 중국에서 윤봉길-이봉창과 그랬듯이 태극기를 배경으로 수류탄을 들고 "나는 조국 대한의 완전독립을 위하여 혁명단원으로서 내 생명을 바치기로 서약함. 민국 29년 [1947년] 8월 26일. 대한혁명단 000"라고 쓴 혈서를 가슴에 붙인 사진을 찍었다. 범행과 김구 배후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물이었다.
     
    이런 사실이 확인되자 미군정 경찰은 범인의 배후로 김구와 국민의회를 지목하였다. 국민의회 재정부장 신일준(辛一俊)과 비서부장 조상항(趙尙恒), 최중하(崔重夏, 뒷날 최서면崔書勉)등 10여명을 연행하였다. 한독당 중앙위원으로 김구의 측근인 김석황(金錫璜)이 중간배후로 찍혔다.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서울대출판부, 1997)
    미군정은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을 위원장으로 한 수사위원회를 구성, 수사망을 좁혀 들어갔다.
    김석황의 입에서 “백범 선생의 지시를 받았다”는 진술이 나왔다. 그는 김구에게 보낼 편지를 가지고 있다가 압수당해 꼼짝없이 실토한 것이다. 공범들의 진술도 일치하였다. 
    김구가 “나쁜 놈, 죽일 놈”으로 좌표를 찍으면 암살대상이 되었다는데 몇 명이 더 남았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즉, 김구 주석의 집권을 절대시하는 ‘임정봉대’세력이 훈련된 조직 청년들을 동원하여 반대측 ‘죽일 놈’으로 찍힌 장덕수를 제거한 살인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경무부장 조병옥은 기자들이 “배후를 왜 밝히지 않느냐”고 추궁하자 이렇게 말했다.
    “전위단체 8명중 1명을 체포하지 못했고, 배후관계는 4단계로 나누어져 있는데 제1단계가 미체포이므로 그 전모를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 
    4단계에 김구 등 고위층이 관련되어있음을 시사하는 대답이었다. 수사위원장 장택상은 간부 몇 명이 더 관련되어있다면서 국민의회의 집회허가도 보류시켰다. ([동아일보] 1947.12.11.)
    1948년 2월 26일 군정장관 윌리엄 딘(William F. Dean)은 총격한 박광옥, 배희범을 비롯, 배후 김석황, 조상항, 신일준 등 10명을 범인으로 발표하였다.

    처음부터 “배후에 김구“를 지목했던 미군정은 김구의 소환 방식을 ‘증인’으로 정하고 트루먼 미국대통령 이름으로 소환장을 발부하기로 변측을 택한다. 미군정 검찰총장 이인은 ”임정 주석을 범죄 피의자로 부르면 민심 동요가 걱정되었기 때문“에 정치적 배려를 해야했다고 말한다. (이인 [반세기의 증언] 명지대 출판부, 1974).

    이듬해 3월 12일 미군정 법정은 김구가 출석한다는 뉴스에 방청객이 초만원이다.
    증인석에 책상다리로 앉은 김구는 질문마다 “모르오. 아니오...”를 연발, “나는 왜놈 말고는 죽이라 하지 않았소”라며 결백을 주장했다. 
    미군 법무관들이 증거를 제시하며 압박하자 김구는 증언을 거부하며 “더 할말이 없으니 나는 가겠소” 퇴장하였고, 범인들은 “모략이다” 외치며 법정소란을 일으켰다. 3월15일 재판정에 두번째로 출두한 김구는 모르쇠로 일관한다. 우여곡절 끝에 결과는 ‘김구 무혐의’로 마무리된다. 

    이렇게 매듭지어진 것은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하지 미군정사령관이 장택상에게 수사를 “중지”시켰기 때문으로 알려졌으나, 일찍부터 임정을 지원했던 칠곡(漆谷) 거부의 아들 장택상도 놀라고 곤혹스러워했다고 한다. 뒷날 아버지 장택상의 [창랑(滄浪)일대기]를 펴낸 장택상의 딸은 이런 증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아버지는 임정의 명예를 위해 살인범으로 만들 순 없다며 기록을 모두 없애겠다고 말씀 하셨다.” 
    미군정 사람들은 ‘임정집권 쿠데타’를 시도한 김구의 폭력적인 이력전모를 파악하고 있었기 에 “ruthless(무자비)하고 unscrupulous(부도덕한) 인물”로 평가해왔다는데 암살사건이 거듭되자 “김구는 백범이 아니라 흑범, 블랙타이거(Black Tiger)"라 불렀다고 미 군정측 정보보고서들이 기록을 남겼다. 

    엎친데 덮친 격이 된 국민의회는 분열된다. 궁지에 몰린 김구의 한독당도 세 조각이 났다. 1947년 12월 ”지지세력을 잃은 김구는 측근만 남고 고립되었다“는 학자들의 평가가 많다. 과연 ‘외로워진 백범’은 1948년 새해 초부터 충격적인 변신을 보여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