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스탈린과의 '독립전쟁'을 외치는 이승만. 오른쪽은 스탈린.
    ▲ 스탈린과의 '독립전쟁'을 외치는 이승만. 오른쪽은 스탈린.
    스탈린이 이럴 줄 알았다. 박헌영의 ’신전술‘ 폭력투쟁이 스탈린의 ’폭동전술‘임을 직감한 이승만은 칼을 뽑았다. 이승만을 배제시키고 좌우합작에 매몰된 미군정은 예상도 못한 사태 전개에 속수무책이다. 이때, 이승만의 “맨주먹 반공투쟁‘이 미군정의 구세주가 된다. 
    바로 북한 탈출 ’반공 청년‘조직들의 대반격이 그것이다. 이승만은 귀국직후 ’독립촉성중앙협의회‘(약칭 ’독촉‘)를 구성하며 ’독촉청년회‘를 조직, 자신을 찾아오는 탈북청년들을 포용하여 후원해왔던 터이다.

    ◆대한노총 총재 이승만, 40개 청년단체 합쳐 좌익 파업 해산

    ★9월7일 미군정의 박헌영 체포령이 내린 날, 서울 정동교회에서는 독촉국민회 제3회 전국 대표자대회가 열렸다. 면단위까지 망라한 대표 1,400여명이 조직 강화를 이승만 총재에게 일임한 모임에서 이승만은 이례적 성명을 발표한다.
    ”오늘까지 독립이 지연되는 것은 소수 극렬공산분자들이 정권을 차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좌우합작으로 전선통일을 해보자고 애쓰던 것도 다 헛일이 되었다. 외국 지령을 받아 독립을 방해하는 분자들은 자멸케 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나갈 길은 오직 한 덩어리가 되는 것뿐이다.“(조선일보 1946.9.8.)
  • ▲ 이승만이 설립한 대한독립노동총연맹의 후신 대한노총 11년차 대의원대회 장면(1957). 오른쪽 인물은 초대위원장 전진한, 건국내각의 사회부장관이 된다.
    ▲ 이승만이 설립한 대한독립노동총연맹의 후신 대한노총 11년차 대의원대회 장면(1957). 오른쪽 인물은 초대위원장 전진한, 건국내각의 사회부장관이 된다.
    ★9월12일 종로YMCA 강당에서 ’대한독립청년단‘ 결단식이 열린다. 대한건국청년회, 역도청년회 등 21개 우익청년단체가 통합하는 행사에 참석하러 가던 이승만은 창덕궁 돈화문 앞을 지날 때 총격을 받는다. 총탄 4발은 승용차 뒷 유리창을 뚫지 못해 이승만 부부등 5명은 무사하였다. 축사를 하려고 연단에 오른 이승만의 말에 장내엔 폭소가 터졌다.
    ”지금 내가 여기 오는 길에 어디서 땅땅 소리가 나기에 아이들이 딱총놀이 하는 줄 알았더니 나한테 권총을 쏜 모양이더라. 네발씩이나 쏘고 나를 못 맞혔으니 그 사람은 아마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인줄 믿는다.“(선우기성 [한국청년운동사] 금문사, 1973)
    이승만은 대한독립청년단 총재로 추대되었다.

    ★9월23일 ’전평‘의 총파업에 대응한 대한독립노동총연맹(약칭 대한노총)은 긴급회의를 열어 이승만을 총재로 추대하기로 결의한다. 대한노총은 1945년 12월21일 이승만이 결성한 ’독촉 청년총연맹‘의 후신조직이다. 이때 위원장엔 전진한(錢鎭漢,1901~1972)이 취임하였는데 이승만은 2년 뒤 건국정부 수립때 그를 초대 사회부장관으로 임명한다.
    대한제국 말기 20대 청년시절 만민공동회 투쟁 때에도 천민취급 받던 백정, 신발장수, 쌀 장수 등을 연사로 내세우며 스스로 서민을 자처했던 이승만은 뒷날 자유당을 결성할 때에도 ”나는 쌍놈 당을 만들겠다“며 ’노동자-농민 정당‘을 당명으로 주장하기도 한다.(조용중 [대통령의 무혈혁명] 나남, 2004)
    대한노총 총재는 당시 한국노동자들의 대표, 이승만은 40여개 청년단체가 결성한 파업대책위원회와 손잡고 ’전조선파업대책협의회‘를 조직하고, 미군정 간부들과 협의를 거쳐 공산당의 전국파업 진압작전을 짰다. (조선일보, 1946.10.2.)
    마침내 9월30일 파업진압 청년대는 미군정 경찰(수도경찰청장 장택상)과 함께 용산역의 좌익 철도파업 현장부터 급습, 해산시키는데 성공한다. 노동자들은 직장에 복귀하고 극렬분자 1,700여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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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합의를 깬 배신자 소련은 물러가라"는 영문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하는 서북청년회(1948).
    ★이승만은 파업사태가 일단 진정되자 정읍선언 직후 결성했던 ‘민족통일본부’의 이름으로 ‘격문’을 발표한다. 요지는 오로지 독립쟁취를 위해 싸우자는 ‘독립전쟁’ 선포에 다름 아니다.
    ”독립을 위하여 노력해야 할 우리는 모든 문제를 독립문제와 결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일체의 행동이 우리의 독립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비판한 뒤에 행동을 결정하라. 한사람 한사람의 이익이 전체의 이익과 부합할 때에만 ‘애국적인 행동’이 된다...(중략)...공산주의가 세계를 혁명시킬 줄 믿던 한인 공산파들은 마음을 고쳐서 민주주의 독립완성을 위해 사생결단하기로 하자. 만일 그렇지 못하면 공산파들은 우리와 함께 살기를 바랄 수 없음을 명심하라. 다시는 외국의 지휘를 받지 말며 파업이나 분란을 일으키는 공작을 포기하라. 먼저 국권을 회복한 후 우리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자.“ (대동신문, 1946.10.2.~3)
    ‘반공 청년’들은 똘똘 뭉쳐 이승만의 진두지휘에 따라 전국의 파괴분자 공산당과 싸우는 ‘건국전쟁’ 전선으로 총출동한다. 처음 수천명이던 전사들은 금방 9만여명을 헤아린다.
  • ▲ 청년단체를 이끈 지도자 이승만(왼쪽)과 서북청년회 지도자 문봉제와 손진.
    ▲ 청년단체를 이끈 지도자 이승만(왼쪽)과 서북청년회 지도자 문봉제와 손진.
    ◆”청년들의 중심은 언제나 이승만이었다“

    ”너무 고달파서 너무 외로워서 돈암장에 수시로 찾아갔다.
    어깨를 다독거려주는 이승만 박사의 손길이 너무나 그리웠고
    그것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큰 힘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북한을 탈출해 서울에 집결한 청년들의 눈물겨운 증언이다.
    (이하 인용-참고문헌: 손진 [서북청년회-건국과 6.25] 건국이념보급회,2014. 서북청년회 [대한민국 건국 청년운동사], 이주영 [서북청년회] 백년동안, 2014. 이영석 [건국전쟁] 2018).

    ‘해방군’을 자처한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 무차별 약탈과 착취, 시베리아 추방과 강간, 집단학살까지 자행하는 공포의 세월, 일본군보다 더 무섭고 야만적인 만행에 주민들은 피난 보따리를 쌌다. 마을마다 청년들이 밤낮으로 경비를 섰고 소련군이 나타나면 비상을 걸어 도망치고 숨어야 했다. 여자들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습격하는 바람에 남자 옷을 입고 얼굴에 숯 검뎅이 칠을 했다. 견디다 못해 들고 일어나 ”소련군 물러가라“며 집단항거를 벌였다. 그 주민들의 자발적 ‘반공 의거’ 주요 사건만 다음과 같다. (정당 주도 반공투쟁은 제외).
    ▶해주 반공의거사건(1945.9.16.) 황해도 해주, 사상자 불명,.
    ▶함흥 반공학생의거(1945.11.7.) 함남 함흥, 학생 사상자 약 50명.
    ▶용암포 반공시민시위(1945.11.16.) 평북 용암포, 사상자 13명.
    ▶신의주 반공학생의거(1945.11.23.) 평안북도 신의주 6개 중학교 3,500명 궐기, 사망 40~50명, 부상 350명 이상, 검거 및 시베리아 유형 약 2,000명. 
    ▶평양 반공의거(1946.3.1.) 평양, 3.1절 행사 김일성 암살 시도 실패 후 무차별 탄압.
    ▶평남 주민반공의거(1946.3.13.) 평안남도 일대 곳곳에서 주민 봉기. ▶함흥 반공학생의거(1946.3.23.) ▶양양 반공학생의거(1947.12) 강원도 양양군 학생 봉기 ▶평양 반공청년의거(1950. 2) 등, 6.25침략전쟁 이전 기록을 찾을 수 있는 사건들만 이러하다. 
    특히 신의주 반공학생 궐기 집회 때는 소련군이 폭격기를 동원, 학생들을 무차별 난사하여 희생자가 많았고, 당시 남한으로 탈출한 청년 학생들과 주민 등 피난민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 ▲ 서북청년회 지도자 손진 지음 [서북청년회가 겪은 건국과 6.25] 표지.(건국이념보급회 발행, 이승만 총서-6, 2014)
    ▲ 서북청년회 지도자 손진 지음 [서북청년회가 겪은 건국과 6.25] 표지.(건국이념보급회 발행, 이승만 총서-6, 2014)
    ★”남한이 더 빨갛구나.“
        지역별 조직 만들어 ‘북한실정 설명회’ 순회강연

    서울에 모인 탈북청년들은 망연자실했다. 남한은 미군이 있어 북한보다 나을 줄 알았는데 공산당 조직들이 거미줄같이 짜여있고 미군정은 ‘공산당도 합법정당’이라며 방관상태 아닌가.
    ”큰일났다. 남한이 더 빨갛게 물었으니 남한이 먼저 공산화되는 게 아니냐“
    자연스레 지역별로 탈북청년들이 모였다. 함경도 출신 ‘호림장(虎林莊)’을 비롯하여 묵정동 대원장(大元莊), 해방촌 천막합숙소 등 100명이상 수용하는 합숙소만 50여개나 되었다. 
    ”공산당을 모르는 남한동포들을 계몽시키자“ 청년들은 ‘북한실정 보고회’부터 열었다.
    순회강연 하면서 북한의 소련군과 공산당의 만행을 포로하자 좌익들이 공격을 가해왔다. 원한맺힌 반공 청년들은 자신도 모르게 솟구치는 ‘증오와 복수의 투지’로 뭉쳐 반격, 번번이 물리치는데 성공하였다. 
  • ▲ 1946년 미군정과 함께 구성한 민주의원 회의를 마치고 나온 이승만과 김구(창덕궁)
    ▲ 1946년 미군정과 함께 구성한 민주의원 회의를 마치고 나온 이승만과 김구(창덕궁)
    ★”김구에 실망...혁명가는 될 망정 정치가는 못된다“ 평가

    38선을 넘어온 청년들은 처음에 김구부터 찾아갔다. 황해도출신 독립운동가이자 임시정부 주석이기에 북한이 고향인 청년들은 저절로 김구의 경교장으로 향하게 되었다고 한다.
    ”기다리시오. 지금 주석께서는 휴식중이라서...“ 경호원들이 제지하고 시간을 끌었다.
    한참 기다린 끝에 2층으로 안내받은 청년들은 저절로 무릎 꿇고 큰 절을 올렸다. 
    금빛 칠을 한 높은 의자에서 절을 받은 김구는 청년들의 간곡한 애원을 듣더니 한마디 던지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이 잘들 해보시오.“ 그리고는 묵묵부답이다. 
    근엄한 분위기에 질린 청년들은 또 큰절을 하고 물러나왔다. 막막한 서울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탄식하던 청년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이승만 박사에게 달려갔다. 돈암장에선 경호원이 있는지 없는지 무사 통과였다.
    ”잘 왔소이다. 얼마나 고생들이 많겠소, 그러잖아도 그대들을 만나고 싶었다네“
    벌떡 일어선 이승만은 차례차례 청년들의 두 손을 잡고 악수하며 격려부터 하였다.
    청년들은 쌓인 한이 풀리듯 북한과 남한의 실정을 토로하며 ‘북한실정 보고회’를 설명하고 지원을 부탁하였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협력을 약속한 이승만은 ‘돈봉투’를 쥐어주었다.
    ”젊은이들이 잘 먹어야 할 텐데 어떡하나. 힘을 내서 싸우되 아까운 청년들이 피를 흘려서는 안되오“ 등을 두드리며 서양식 악수를 하고 안아주는 이승만의 친부모 같은 격려에 감격한 청년들은 눈물을 흘렸다.
    ”말없이 엄하던 김구 선생과 너무 달랐다. 이승만 박사는 북한 실정을 꼬치꼬치 캐묻고 조만식 선생의 안부도 물으며 우리 이야기를 한시간 가까이 들어주셨다. 그러면서 외세를 몰아내지 않고는 독립할 수 없으니 우리 힘을 다 합해 Build-up하자고 하셨다. 나올 때는 경비에 보태라면서 1,000원을 주셨다.“ 탈북청년조직 지도자 문봉제(文奉濟,1915~2004)의 증언이다.(이영석, 앞의 책). 문봉제는 건국후 치안국장과 교통부장관을 지내게 된다.
    경북출신 반공청년지도자 손진(孫塡,1920~2017)은 저서에서 말한다.
    ”김구 앞에서는 무조건 엎드려 큰절을 했지만 이승만 박사와는 친구처럼 선채로 악수만 하였다. 그 분은 동네 할아버지를 만나는 기분이었다. 우리들은 ‘김구는 혁명가는 될망정 정치가는 되지 못한다’고 평가하였다.“ 
  • ▲ 해방후 좌익과 투쟁하다 순국한 청년들 17,274명의 위패를 봉안한 반공청년운동 기념비 앞에서 추모제를 지낸 동지들(1969). 비석에 '짧은 일생을 영원한 조국에'라고 새겼다.(손진 소장 사진)
    ▲ 해방후 좌익과 투쟁하다 순국한 청년들 17,274명의 위패를 봉안한 반공청년운동 기념비 앞에서 추모제를 지낸 동지들(1969). 비석에 '짧은 일생을 영원한 조국에'라고 새겼다.(손진 소장 사진)
    ◆전국 ‘좌익청소’작전...제주4.3폭동에서 6.25까지

    1946년 ‘10월폭동’ 진압작전이 고비를 넘기자 목숨을 걸고 공산당과 싸웠던 청년들이 모여 11월30일 ‘서북청년회’(약칭 ‘서청’)을 정식 발족시킨다. ‘서북(西北)’은 평안도 관서(關西)와 함경도 관북(關北)을 합친 이름, 탈북 반공청년들의 ‘이승만 지지’ 통합조직이다. 
    그들의 목표는 ▶공산당의 선전선동에 휘말리는 남한 동포 계몽 선도 ▶북한에 자유의 소리를 전하고 북한 지하 동지들과 연합하는 대북공작 ▶최후의 승리까지 ‘타공멸공(打共滅共’ 완수였다.
    새벽에 일어나면 ‘서청가(西靑歌)’로 시작하는 하루, 가사는 남북통일의 염원 그것이다.

    우리는 서북청년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나가 38선 넘어 매국노 쳐버리자
    진주(眞珠) 서북, 지옥 되어 도탄을 헤맨다
    동지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서북에
    등잔 밑에 우리 형제, 원수한테 밟힌 꽃송이
    동지는 기다린다, 어서 자가 서북에.

    그동안 대한민국에서 무시하고 폄하해온 서청은 당시 최고의 지식층이다. 문맹80% 한반도에서 중졸이상이 수만명 수준이던 시절, 서청 멤버들은 최소한 중학교(5년제, 고교과정포함) 졸업생이었고 일본, 미국등 유학생들이 상당수로 지휘부를 맡았다. 

    서청은 경성방송국에 교섭하여 한국최초의 ‘대북 방송’도 시작하였다.
    매주 금요일밤 9시 여자 아나운서가 ”지금부터 서북청년회의 대복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는 멘트와 함께 ‘자유의 소리’를 전하는 프로그램이다. 공산주의 비판, 서청활동 소개, 이승만 등의 자유독립운동, 이 방송을 듣고 남행을 결심했다는 북한동포가 늘어난다는 소식도 빠지지 않았다.
    그들은 38선 요소요소에 북한출입 비밀통로도 만들었다.
  • ▲ 대한노총의 후신 한국노총이 '멸공통일'이란 '승공' 행진을 벌이고있다. (1960년대 자료사진)
    ▲ 대한노총의 후신 한국노총이 '멸공통일'이란 '승공' 행진을 벌이고있다. (1960년대 자료사진)
    ▶▶▶‘좌익이 탈취한 기업’ 되찾기...산업현장 정상화

    서청은 기업들을 탈취한 좌익노조를 분쇄하여 ‘기업의 구세주’로 큰 지지를 받았다.
    해방당시 우리기업은 대부분 일본인이 경영하다 떠나간 ’적산(敵産)‘이었고 한국인이 세운 기업도 ’친일‘ 딱지가 붙었다. 미군정 통치가 지지부진하면서 이 기업들은 이른바 ’자치‘의 이름으로 좌익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 장악해버렸다.
    대표적 사례가 영등포 ’경방(경성방직)‘과 고무공장, 사장은 인촌 김성수의 아우 김연수, 당시 가장 규모가 큰 이곳은 전평위원장 허성택이 직접 장악하여 난공불락이었다. 서청에 ”경영권을 찾아 달라“는 SOS가 날아들었다. (손진, 앞의 책).
    서청 조직이 공식출범하기 전, 레슬링의 스타 황병관(黃炳寬) 등을 비롯한 ’맨주먹 투사‘들을 모아 3대의 트럭을 몰고 쳐들어갔다. 전평 노조원들은 용광로에 달군 철봉을 휘두르며 역습, 난투극이 벌어진 공장은 쏟아진 기름과 불길과 피 범벅의 아수라장이다. 
    공산당에 부모형제 고향을 잃은 반공투지를 이길 장사는 없었다. 전평은 항복했다. 전평의 본거지격인 경방이 정상화되자 ”우리도 살려주오“ 전국에서 구원의 비명이 몰려왔다. 
    인천의 동양방직, 조선화학비료, 조선기계, 조선제마, 조선차량, 조선알미늄, 노다 정유 등등 전평 깃발을 뽑고 대한노총 깃발을 꼽았다. 동시에 서울의 경전(京電: 한전), 철도, 석탄공사, 대한중석 등 주요 공기업도 차례차례 탈환작전에 성공하였다.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던가. 이승만의 대한노총 산하 청년단체, 노동단체, 학생단체의 반공투쟁이 해방 경제의 생명줄 산업현장을 정상화 시켰던 ’독립전쟁‘ 그것이었다.

    ▶서청의 원망◀ ”해방직전 송진우는 왜 일본총독의 정권인수 제의를 차버렸던가. 좌익 여운형이 재빨리 가로채 ’건국준비위‘를 조직하고, 이를 박헌영이 ’인민공화국‘ 만들어 전국을 장악하게 하다니....만일 송진우가 먼저 정권을 인수하였다가 늦게 진주한 미군정에 넘겨주었더라면 남한에 공산당은 소수로 몰려 쫓겨났을 것을...천추의 한(恨)이로다.” (손진, 앞의 책).
  • ▲ 6.25전쟁이 나자 입대한 서북청년들 만드로 구성된 '백골부대' 마크(왼쪽). 손진 선생이 가슴에 달았던 '대한유격대' 기장과 KLO 특별부대 배지.(손진 소장품 사진).
    ▲ 6.25전쟁이 나자 입대한 서북청년들 만드로 구성된 '백골부대' 마크(왼쪽). 손진 선생이 가슴에 달았던 '대한유격대' 기장과 KLO 특별부대 배지.(손진 소장품 사진).
    ▶▶▶’북한실정 폭로‘ 강연에 공산당 ’죽창 부대‘의 습격

    ◉미군정의 ’국방 경비대‘가 좌익 소굴=1946년 1월 미군정이 설립한 ’국방 경비대‘는 공산당의 소굴로 변했다. 미군정이 중립을 지킨다며 입대 청년들의 사상검증을 전혀 안했기 때문이다. 군대까지 점령한 공산당은 인민위원회, 전평, 민애청(민족통일애국청년동맹) 등으로 남한사회를 장악하고, 서청의 ’북한실정폭로‘ 현장 등을 조직적으로 공격하였다. 
    가장 사망자가 많았던 영동(永同(동)) 참극을 보자. 읍내에서 강연을 마친 서청대원 10명이 잠든 합숙소를 습격한 국방경비대 200명은 칼로 무자별 난자하고 도망쳤다. 현장에 도착한 남선(南鮮) 파견대장 임일(林一, 함북 청진출신)은 처참한 동지의 시신을 끌어안고 통곡하며 복수를 다짐하였다. 당시 국방경비대의 좌익들이 우익에 가한 폭력은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다.

    “당하면 보복한다” 서청의 처절한 멸공작전=전국의 공산당 조직들은 서청의 북한실정 폭로강연이 전국을 순회하기 시작하자 ’죽창부대‘를 만들어 기습공격, 잔인한 학살을 자행하였다.  대원들이 무참히 피살되자 서청은 좌익응징에 나섰다. 우선 영동의 국방경비대 좌익부대를 새벽2시에 급습, 불지르고 복수를 했다. 이때부터 당하는 족족 보복하였고 지역이나 기관에 숨은 좌익분자 색출과 제거작전을 본격적으로 벌였다. 임일의 눈부신 활약에 좌익에서 ’임일 장군‘이란 별명을 붙였다. 날마다 덤벼드는 공산당의 죽창에 찔리고 쓰러지던 그때, 주요사건 몇 개만 적어보자.
    ▶좌익교사들이 장악한 학교들에 포진, 극좌 교사들을 추방하고 학생들 선도.
    ▶대전 메이데이 행사장 3만 인파를 혼자서 맨주먹으로 해산시키다.
    ▶공주 강연회를 위해 금강교를 건너가던 대원들이 다리 중앙에 이르자, 다리 밑에 매복했던 공산당 100명 죽창부대가 양쪽에서 습격, 서청회원 1명 즉사 15명이 절명직전.
    평북 출신 사망 청년의 아버지가 달려와 눈물을 훔치며 가슴을 쳤다. “일본군으로 나가 싸우다 죽기도 했는데, 건국을 위해 공산당을 무찌르다 갔으니 그리 원통할 것도 없구나. 남은 사람들은 꾸준히 싸워 고향을 찾아가야지...”
    ▶부산지검 남로당 검사 정수복을 출근길에 권총 암살. 부산 좌익신문 사장인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 박경영을 서청대원히 자택으로 찾아가 권총으로 암살.
    ▶부산극장서 좌익이 미소공동위 축하예술제 개최, 다이너마이트 던져 무대 폭파.
    ▶목포극장서 북한실정 폭로 강연중 죽창부대에 피습, 중상자 다수.
    ▶논산-강경 중학(고교) 학생들이 밤중에 합숙소 습격, 보복 못하고 제적시켜.
    ▶광주 전남방직공장서 공산당 색출하던 대원이 피살 암매장됨, 지도부 소탕전.
    ▶박헌영과 이강국의 고향 예산, 공산당이 강연회 대원들을 포위공격.
    ▶서산서 전세버스로 이동중 60여명 서청 대원들, 매복한 수백명이 기습하여 도끼로 난자질하고 불질러 전원 피살. 2명만 목숨을 건지다. 
    ▶김원봉의 고향 밀양에서 수백명 죽창부대 기습, 식사 중 7명은 죽음의 위기, 유도선수 공원태(孔元泰)가 출입문을 몸으로 막으며 외쳤다. “내가 막을 테니 어서 도망가라” 6명은 뒷문으로 도망쳤다. 혼자 힘으로 어찌 당하랴. 출입문이 부서지고 공원태는 죽창에 무수히 찔려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부산 번화가 대낮의 결투, 좌익 경남본부 제거작전. 민애청-민전-해운동맹 등 3개소를 동시에 습격하여 장악함. 간판들을 떼어내 불태우고 ’서북청년회‘ 간판으로 바꿔 달았다. 시민들이 수군거리자 서청대원 반성환이 나섰다.
    “우리는 38선을 넘어온 청년들입니다. 지금 이시간에 북에선 우리 부모와 누이들이 소련군과 공산당의 약탈과 폭력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련에게 나라를 넘기려는 매국도당을 타도하기 위하여 최후의 1인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가 쓰러지면 시민 여러분들이 우리의 시체를 넘어 서북에서 신음하는 우리 형제자매를 구출할 줄로 믿습니다.”
    모여든 시민들의 뜨거운 박수가 터졌다. 대원들은 ’서청가‘를 목메어 불렀다.
    ▶군산, 이리, 전주, 남원 등 곳곳에서 죽창에 찔려 죽고 둔기에 머리를 맞아 죽었다. 소식이 없어 찾아보면 골목길에 엎어져있고 웅덩이에 쳐박혀 있었다.
    ▶10월폭동의 대구=임일 대장이 “경북의 좌익은 10월폭동 후 기세가 꺾였을 텐데...” 말하자 서청의 선우경식이 맞받았다. “아니요. 여전히 모스크바입니다. 남로당 도책(道責) 이상훈이 서청을 대구에서 몰살시킨다고 떠들고 있지요.”
    달성공원 합숙소 피습. 칠성동 다리 건너다 죽창 공격에 8명 사상. 대구역전 공회당 찬탁대회장의 전기줄을 끊고 급습하여 지도부 난타 해산. 좌익신문사 파괴, 전평등 주요당원 납치하여 포항으로 끌고가 배에 실어 북한으로 보냈다.
  • ▲ 서북청년들이 선발대로 인천 앞바다 팔미도 등대(왼쪽)를 켜고 항로를 안내했던 미군 상륙작전 부대(오른쪽)..
    ▲ 서북청년들이 선발대로 인천 앞바다 팔미도 등대(왼쪽)를 켜고 항로를 안내했던 미군 상륙작전 부대(오른쪽)..
    ★’고향 찾기 통일전쟁‘=대한민국이 건국되는 1948년까지 3년간 서청이 진행한 ’좌익 청소‘사건들은 한마디로 ’고향찾기 통일전쟁‘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우리는 혁명가도 군인도 아니다. 단지 북한의 내 고향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남북 공산당을 타도하는 길 밖에 없다고 굳게 믿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죄라더냐?” 
    죽창부대와 목숨을 건 살육전이 한바탕 끝나고 나면 서북청년회 청년들은 부모형제가 그리워 눈물을 펑펑 쏟아내곤 하였다.

    해방정국 3년, 소련과 싸우고 미국과 싸우는 이승만의 ’정읍선언‘ 정신으로 뭉친 반공투쟁의 전사들은 자나깨나 다시 찾아야 할 북한 땅을 통일시키려는 투지에 불탔고 그 중심은 누가 뭐래도 이승만이었다. 그들은 피의 대가도 바라지 않았고 자유통일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지푸라기처럼 내던졌다. 그 점에서 이승만과 청년들은 한 몸이었다.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장택상 경찰청장의 요청과 국방경비대의 지원 간청에 발 벗고 나섰다.
    ◉이승만의 건국외교작품 유엔결의에 의한 총선을 저지하려는 소련과 남로당의 제주4.3폭동이 확산되자 “도와 달라’는 SOS에 달려가 생명을 바친다. 
    ◉6.25침략전쟁이 터지자 이승만은 함경북도 출신 정일권을 육군참모총장으로 앞장세웠고, 서북청년들은 너도나도 군에 뛰어들어 북한군-중공군을 물리치며 낙동강 최후의 마지노선 구축에 몸을 던져 방벽을 쌓았다. 
    ◉인천상륙작전에선 맥아더의 선봉장이 되어 영종도를 사전 토벌하고 팔미도 등대 불을 켜서 상륙함대를 안내한다. KLO 특공대의 숨은 전공을 아무도 몰라줘도 개의치 않았다.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을 돌파하여 평양을 미군보다 앞서 탈환하였다. 대동강을 멀리 바라보며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가 마침내 고향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지금 우리는 기억하는가? 그들이 어디 갔는지를...<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