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과 스탈린의 오래된 이념전쟁은 마침내 유혈 충돌로 폭발한다.
    1946년 5월 1차 미소공동위가 깨진 뒤 스탈린이 남한전역에 총파업과 폭력시위, 도시 폭동, 농민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7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으로부터 ‘신전술’(미군정타도 폭력투쟁) 지령을 받은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주도권 도전에서 김일성에게 패배한 좌절감을 만회하기 위하여, 김일성이 못하는 남한민중폭동을 전개하여 스탈린에게 자기만의 능력을 과시한다. 스탈린의 용병술에 놀아나는 남북 ‘동족상잔’ 비극의 시작이다.
    1946년 가을, 해방 1년 뒤 남한 전역을 뒤집어놓은 총파업과 폭력-학살사태, 그 현장 지휘자는 박헌영이고 그 총사령탑은 스탈린의 명령을 수행하는 ‘한반도 공산화 총책’ 슈티코프(Terenti Shtykov)였다. 그는 1945년 4월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부임하면서 한반도 공산화 각본을 짜고, 해방후 정치담당 부사령관으로서 북한군정의 사실상 총사령관역, 즉 사실상 ‘북한 총독’ 역할을 수행하였고, 1948~1951년 북한주재 초대 소련특명전권대사로 아예 평양에 부임, 6.25침략전쟁을 현장에서 총지휘한다.
  • ▲ 해방직후 대학로 동숭동에 있던 경성제국대학 모습, 1946년 미군정이 국립종합대학으로 만들어 서울대학교가 된다.
    ▲ 해방직후 대학로 동숭동에 있던 경성제국대학 모습, 1946년 미군정이 국립종합대학으로 만들어 서울대학교가 된다.
    ◆9월 총파업-10월 대구 폭동...데모대 ’시체 장사‘ 첫 등장

    총파업에 앞서 박헌영의 신전술은 ’국대안(國大案) 반대 투쟁‘에서 시작된다
    모스크바에서 돌아 온 박헌영은 인민위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등 산하단체에 ‘정당방위의 역공’전술을 선언, ”테러는 테러로, 피는 피로써 갚자“는 폭력투쟁 지침을 내려보냈다. 전평 의장 허성택은 대규모 파업투쟁을 추수가 끝나는 10월 하순으로 기획했다. 추수를 끝낸 농민들도 참여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때, 미군정이 7월 13일 국립종합대학교(서울대) 설립을 발표했다. 일본이 만든 경성제국대학(법문학부, 의학부, 이공학부)과 수원 농림전문학교 등을 합해 한국 최초의 종합대학을 만들겠다는 안이다. 박헌영은 무릎을 친다. 젊은이들을 총동원할 절호의 기회를 미군정이 제공하기 때문이다.
    투쟁을 개시하자 전국 중학교(현 고등학교) 이상 절반 쯤이 동맹휴학에 참여했다. 학생들이 등록을 거부하고 동맹휴학에 휩쓸려 ”친일 교수 배격, 경찰의 학원 간섭 정지, 집회 허가제 폐지, 국립대 행정권 조선인 이양, 미국인 총장 한국인 대체“ 각종 구호가 등장했다. ‘국대안은 학원의 자유를 말살하는 미국의 식민정책이다’는 현수막을 학교마다 걸었다. (이영석 [건국전쟁] 조갑제닷컴, 2018).
    열기는 무르익었다. 미군정이 박헌형 체포령을 내린 9월7일 이틀후 박헌영은 10월예정 총파업을 9월로 앞당긴다. 소련의 지령에 따른 것이었다.
  • ▲ 북한 공산화 총책 슈티코프와 그의 일기(국사편찬위 발간).  슈티코프는 60권의 일기를 남겼다.
    ▲ 북한 공산화 총책 슈티코프와 그의 일기(국사편찬위 발간). 슈티코프는 60권의 일기를 남겼다.
    ★슈티코프, 박헌영에게 파업지침-200만엔 전달
    해방부터 6.25까지 남북한에서 일어난 공산당의 모든 사건들은 스탈린의 작전이다.
    이를 증명하는 기록들은 1990년대 초 소련정부가 공개한 문서들이며, 그중에서도 평양의 소련군정 레베데프 비망록과 ‘총독’격인 슈티코프가 남긴 60권의 일기가 생생한 증언을 남겨주고 있다. 
    ”그(슈티코프)가 조선에 있건 연해주군관구에 있건 또는 모스크바에 있건 간에 그의 참여와 결재 없이 북조선에서 이뤄진 조치란 하나도 없었다” 스탈린의 지시대로 북한정권 만들기에  핵심역할을 맡았던 정치총책 레베데프(예비역소장)의 증언이다. 
    1991년부터 3년간 중앙일보사 취재팀이 소련을 방문하여 발굴한 자료는 일간지에 연재하였고 《발굴자료로 쓴 한국 현대사》를 출간했다. 10년후 200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방대한 일기 중에 한반도 관련 내용을 발췌 번역하여 《쉬띄꼬프 일기(1946∼1948)》를 냈다. 거기 9월총파업 관련대목만 뽑아보자.

    ◉1946년 9월9일: 박헌영은 당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 묻고 있다. 
    ◉9월19일: 박헌영의 향후 활동 방향에 대한 전문을 작성하여 로마넨코로 하여금 박헌영에게 전달하게 했다.
    ◉9월 28일: 남조선 재정지원을 위해 200만엔을 지급하다. 남조선 파업투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리다. 경제적인 요구들, 임금인상, 체포된 좌익 활동가들의 석방, 미군정에 의해 폐간된 좌익신문들의 복간,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의 철회 등의 요구들이 완전히 받아들여질 때까지 파업투쟁을 계속한다. (스탈린 지시 사항).

    요컨대, 슈티코프가 박헌영 및 김일성에게 내린 지침들은 모두 모스크바 당중앙 스탈린에게 건의하여 ‘승인’받은 것들이었다. 총파업을 비롯한 모든 투쟁은 그 시기와 방법, 목표, 자금지원까지 슈티코프가 스탈린의 승인을 받아 ‘결재’하고 명령을 전달 수행하고, 이를 다시 스탈린에게 보고하는 절차를 빠짐없이 거쳤음이 소련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외).

    ★철도파업, 식량수송 차단...식량난 일으켜 전국 폭동 불질러
    9월23일 서울 용산 철도국 노조원 3천여명이 전면 파업 농성을 개시한다. 부산, 전남 철도노조가 합세하며 파업은 금방 교통, 체신, 전기, 금속, 해운, 식료 등 전평산하 전국노조들로 확산되었다. ‘국대한 반대’ 학생들과 함께 전국은 ‘반미 시위’에 뒤덮이고 말았다. 미군정은 노조의 요구에 응하여 협상했지만 ‘처우개선’등 그 요구들은 더 큰 투쟁을 부르는 불씨일 뿐이다.
    총파업과는 별개로 박헌영은 소련의 지령대로 레닌의 10월혁명을 기념하는 남조선 혁명투쟁의 봉화를 올렸다.

    바로 10월 전국 폭동이다. 이를 위한 사전작업이 총파업이었던 셈이기도 하다. 사전작업이란 가뜩이나 부족한 식량배급을 철도 파업으로 곡물수송을 봉쇄해버린 것. ‘식량난 궐기’를 계획한 대로 시작된 시위는 10월1일 저녁 대구역 앞에서 돌을 던지는 수천 명 시위대의 폭력에 경찰이 발포, 1명이 숨지는 사태가 일어났다. 
    다음 날 시위대는 시신을 메고 대구 경찰서를 점거해 무기를 탈취, 경찰과 총격전을 벌인다. 시체를 본 시민들은 폭동으로 돌변하여, 관공서는 물론, 잘사는 집들과 우익인사들의 민가를 습격, 불 지르고 식량과 생필품을 약탈, 닥치는 대로 집단린치를 가하며 찌르고 죽였다.
    ”미군정의 식량정책 실패“ ”굶어죽는 한국인을 살려내라“ ”쌀을 달라. 밥을 달라“는 구호를 만들어 가장 원초적인 요구를 폭발시킨 전술의 성공이다. 전국의 부녀자들까지 들고 일어났다. 밥주걱을 들고 시위대에 동참한 주부들의 외침은 증오의 폭력을 부채질하여 약 2개월간 남한은 무법천지가 되었다.

    미군정은 경북에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미군은 출동하지 않았다. 
    일본 경찰이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렀던 대구, 그 불길은 서울, 수도권, 영남, 호남, 충청까지 번져 박헌영이 조직한 지방 인민위원회와 전평의 총궐기 폭력투쟁과 농민반란은 12월 중순까지 전국 73개 시군에서 계속된다. 미군 보고서는 경북에서만 경찰과 시위대 양쪽에서 170명이 숨지고 180여 명이 다친 것으로 집계하였다. 박헌영은 ‘미군정 타도를 겨냥한 스탈린 신전술’로 남한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월북하였다. 
  • ▲ 1946년 시위가 일어난 전국 지역 표시 지도.(정해구[10월 
 인민항쟁연구] 열음사,1998)
    ▲ 1946년 시위가 일어난 전국 지역 표시 지도.(정해구[10월 인민항쟁연구] 열음사,1998)
    ★슈티코프, 박헌영에 300만엔 추가 지원...농민투쟁 교시
    다음은 [쉬띄코프의 일기 1946-1948] 중에서 ‘10월폭동’ 관련 부분이다.
    ◉1946년 10월 1일: 서울에서는 노동자들과 경관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여 2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중략)...서울에서 시위를 시작할 예정이다. 3백만 엔을 더 요청하고 있다.
    미군정은 초급 당단체들에 발송된 박헌영의 미군정 반대투쟁 지령문을 몰수했다.
    ◉10월 2일: 3백만 엔의 지원과 집회 개최를 허용하는 지시를 내리다.
    ◉10월 7일: 10월 6일 박헌영이 남조선을 탈출하여 북조선에 도착했다. 박헌영은 9월 29일부터 산악을 헤매며 방황했는데, 그를 관에 넣어 옮겼다.
    ◉10월 8일: 남조선에서 전평 의장 허성택이 도착했다.
    ◉10월 21일: 김일성과 대화하다...(중략)...부산에서 농민들의 진출이 시작되었다. 그(김일성)는 향후 투쟁을 어떻게 전개해야 할지 묻고 있다. 그에 의하면 빨치산 부대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반동진영과 민주진영 사이에 전투가 전개되고 있다. 그는 빨치산 투쟁을 본격적으로 개시해야 할지 혹은 자제해야 할지 묻고 있다. 박헌영과 대화하다...(중략)...파업투쟁은 폭동으로 성장 진화했다.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에게는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다. 그들의 향후 투쟁방침에 대해 교시를 내려 줄 것을 요청하다. 가까운 시일에 농민들의 투쟁이 개시될 수 있다.

  • ★박헌영, 관속에 누워 월북=해방후 6차례나 밀입북 하여 김일성의 지시를 받아야했던 박헌영은 마침내 김일성 밑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당시 박헌영이 장례행렬을 꾸미고 관속에 시체로 위장해 숨어서 월북했다는 보도가 나왔는데 공산당 측에선 한사코 부인하였지만 슈티코프가 일기에 적어 놓았다. 
    하지 미군사령관은 박헌영의 체포에 소극적이었다.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 직접 박헌영 체포에 나서자 하지는 ”그를 체포하면 국제적 트러블이 난다“며 말렸다고 한다.(장택상 ‘나의 교우 반세기’ [신동아]1970년7월호). 협상상대 소련이나 좌익 폭동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는데, 제 발로 도망가도록 ‘월북 몰이’로 유도했다는 주장이 그럴 듯하게 들린다. 
     
    ★‘시체 투쟁’의 원조=1980년대 5공 시절, 주사파의 폭력시위 때 대학생이나 노동자의 분신자살 사건이 툭하면 일어나곤 했다. 보다 못한 시인 김지하는 ‘시체 장사 그만하라’는 글을 썼다가 곤욕을 치렀는데 그 원조격인 ‘시체장사’(혁명 불쏘시개) 수법이 해방 후 남로당 투쟁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증언이 있다.

    실제로 10월폭동에 가담했던 대구사범 학생 김계철의 뒷날 증언이다. 
    ‘대구의 스탈린’ 이재복(李在福, 1906~49)과 박상희(박정희 전대통령의 형), 황태성 등이 그때 그 현장의 주역들이다. 박상희도 시위 중에 경찰 총에 피살되었는데 당시 월북했던 김계철은 40여년 뒤 중국으로 탈출, 1994년 귀국하여 10월폭동의 자기체험을 다음과 같이 폭로한다. 
    “1946년 9월 하순 한 좌익 선배가 쪽지를 봉투에 넣어 주면서 대구의대 학생 대표에게 갖다주라고 했다. 김계철은 봉투를 들고 가다가 쪽지를 펴 보았다. ‘시체 4구를 준비하라’로 시작되는 메모였다. 학생 대표는 읽어보더니 옆에 있는 학생에게 ‘되는가’고 물었다. 그 학생이 김계철을 데리고 해부실로 가더니 약물에 담겨있는 시체와 붕대에 감겨있는 송장들을 보여주면서 ‘본 대로 전하라’고 했다...다음날 흰 가운을 입은 학생들이 들것에 들고나와 시위를 선동하는 데 써먹은 시체는 전날 경찰의 총격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김계철이 보았던 해부실 시체였다.”(조갑제 [박정희 전기] 1권 ‘군인의 길’ 2007).

    ★경찰보다 앞장 선 청년들=박헌영의 총파업-폭동을 진압한 것은 미군정의 경찰과 경찰의 요청을 받은 청년단체들이다. 미군은 단 한명도 진압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 사령관은 본국의 훈령 때문에 소련과의 협상과 좌우합작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한순간에 전국을 휩쓰는 유혈폭동을 감당할 경찰력은 없었다. 경찰이 부탁하기도 전에 뛰어나가 맨주먹으로 공산당과 싸운 청년들은 누구였던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