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롯데호텔 앞에서…'조선공산당 창당대회 터 표석 건립 기념행사'1925년 4월 17일 오후 1시… 98년전 '조선공산당'과 시간까지 맞춰행사주최 노동당 '조선공산당 선언' 낭독…'인터내셔널歌' 제창北 국회의장 허헌·문화상 허정숙·김원봉 등 소개… 묵념까지6.25 주범 박헌영, 소련 지시로 '공산당' 주도… 주최측 "감회 새롭다"
  • ▲ 원외정당인 노동당이 지난 2021년 6월에 서울시 중구청에 제안해 2023년 3월 29일에 설치된 '조선공산당 표석'이다. '광복단결사대 활동지 및 조선공산당 창당대회 터'를 제목으로 하는 이 표석에는 '이곳은 1920년 8월 24일 미 의원단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휘 아래 광복단 결사대와 암살단이 조선총독 및 일본 고관을 처단하려 모였던 아서원 자리이다. 1925년 4월 17일 여기서 열린 창당대회에서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어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라는 문안이 새겨져 있다. ⓒ정상윤 기자
    ▲ 원외정당인 노동당이 지난 2021년 6월에 서울시 중구청에 제안해 2023년 3월 29일에 설치된 '조선공산당 표석'이다. '광복단결사대 활동지 및 조선공산당 창당대회 터'를 제목으로 하는 이 표석에는 '이곳은 1920년 8월 24일 미 의원단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휘 아래 광복단 결사대와 암살단이 조선총독 및 일본 고관을 처단하려 모였던 아서원 자리이다. 1925년 4월 17일 여기서 열린 창당대회에서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어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라는 문안이 새겨져 있다. ⓒ정상윤 기자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질서를 양대 축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한복판에 '조선공산당 창당대회 터' 표석을 설치하고, 그 앞에서 '조선공산당 선언'까지 낭독하는 일이 벌어졌다. 

    원외정당인 노동당(옛 진보신당연대회의)은 98년 전 '조선공산당 창당대회'가 열렸던 중국음식점 아서원(雅敍園) 터인 서울시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 앞(을지로1가 180-6)에서 17일 오후 '조선공산당 창당대회 터 표석 건립 기념행사'를 열었다. 조선공산당 창당대회가 시작된 4월 17일 오후 1시로 시간까지 맞춰 행사를 시작했다. 

    '조선공산당 창당대회 터 표석'은 2021년 6월 2일 이들 노동당이 서울 중구청에 신청, 올해 3월 29일 롯데호텔 앞에 설치됐다. 표석의 제목은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표석분과의 요청에 따라 '광복단결사대 활동지'가 들어간 '광복단결사대 활동지 및 조선공산당 창당대회 터'로 정해졌다.

    표석에는 "이곳은 1920년 8월 24일 미 의원단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휘 아래 광복단 결사대와 암살단이 조선총독 및 일본 고관을 처단하려 모였던 아서원 자리이다. 1925년 4월 17일 여기서 열린 창당대회에서 조선공산당이 결성돼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고 적혔다.
  • ▲ 원외정당인 노동당이 17일 오후 서울 중구 아서원(雅敍園) 터에서 '조선공산당 창당대회 터 표석 건립 기념행사'를 열었다. ⓒ조문정 기자
    ▲ 원외정당인 노동당이 17일 오후 서울 중구 아서원(雅敍園) 터에서 '조선공산당 창당대회 터 표석 건립 기념행사'를 열었다. ⓒ조문정 기자
    노동당 관계자들이 행사와 관련해 입을 열었다.

    이종회 노동당 공동대표는 "우익들에게 훼손당할까 봐 자리조차 숨겨놓은, 이름 모를 '빨치산 선배들'의 비석을 보면서 '그 삶이 내 삶이구나'라고 생각했었다"며 "(표석을 보니) 정말 감회가 새롭다"고 했다. 이 공동대표는 '진보네트워크센터' 대표와 미등록 정당 표방단체인 '사회변혁노동자당' 대표 등을 역임한 바 있다.

    현린 노동당 문화예술위원장(본명 박성철·전 노동당 대표)은 허헌·허정숙 부녀, 한위건, 김원봉 등 조선공산당에 기여한 인물들을 소개하면서 "이들은 당시 남쪽에서 사회주의자에 대한 탄압이 심해서 월북을 많이 했는데 북을 선택했다기보다는 남한에 있을 수 없어서 월북했다"며 문제의 월북자들을 '독립운동가'로 포장했다. 

    허헌은 1948년 월북해 북한의 최고인민회의장(우리로 치면 국회의장), 김일성대학 총장 등을 지냈다. 그 딸인 허정숙은 미국 콜럼비아대학 유학을 거쳐, 북한에서 문화선전상을 지냈다.

    사회주의 노동자 단체인 '노동자역사 한내'의 나영선 답사팀장은 "단지 '지난 역사를 되새겨보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지들 스스로께서 이 땅의 역사였던 사회주의 운동을 계승하겠다는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강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사회주의 운동의 실천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정상천 노동당 사무총장은 "선배 사회주의자들을 생각하면서 잠시 묵념하는 시간을 갖자"며 행사 참석 인사들과 머리를 숙였다. 이어 "지금으로부터 98년 전 당시의 고민이 여전히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며 '조선공산당 선언'을 낭독했다.

    노동당은 앞서 행사 홍보를 위해 배포한 웹자보에서도 "조선공산당 창립총회는 1925년 오후 1시에 아서원에 모인 김재봉, 김찬(김낙준), 주종건, 윤덕병, 진병기, 조동호, 조봉암, 송봉우, 김상주, 유진희, 독고전, 정운해, 최원택, 이봉수, 김기수, 신동호, 박헌영, 홍덕유 등 19인이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을 조직했다"며 조선공산당 선언 내용을 실었다. 
  • ▲ 김일성(왼쪽)과 박헌영(오른쪽). ⓒ뉴데일리DB
    ▲ 김일성(왼쪽)과 박헌영(오른쪽). ⓒ뉴데일리DB
    좌파 진영이 떠받드는 박헌영은 누구인가?

    조선공산당 설립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인 박헌영은 일제 해방 후 김일성과 '6.25 남침'을 일으킨 원흉(元兇)으로 꼽힌다.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창당대회'의 주역이자 조선공산당의 지도자로, 해방 후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을 결성해 갖가지 사건을 일으켰다. 특히 '남로당 20만 봉기설'을 주장해 6.25 남침 거행에 힘을 실은 장본인으로 잘 알려졌다.

    몰락한 양반의 '서자' 출신인 박헌영은 '홍길동전'을 즐겨 읽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사회에 대한 불만을 1921년 중국 상하이에서 임원근·김단야·최창식 등과 함께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해지부'에 입당함으로써 자신의 불만을 해소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에까지 오른 그는 "조선공산당을 조직하라"는 '코민테른'(1919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공산당에 의해 조직된 국제 공산당 기구)의 지시를 받고 1922년 4월에 김단야·임원근과 귀국하다 일본경찰에 발각돼 징역 1년 6월을 복역하게 된다. 

    박헌영은 1924년 만기 출소한 뒤 '신흥청년동맹'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훗날 월북해 북한의 국회의장 격인 최고인민회의 의장에 오른 허헌이 사장으로 있던 '동아일보'에 기자로 입사한다. 기자 신분으로 전국을 누비며 공산당 조직 기반을 닦은 그는 홍증식의 추천으로 1924년 9월 '조선일보'로 이직한다. 홍증식은 사회주의 운동을 위해 언론계에 침투한 인물로 훗날 월북해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등을 지냈다.

    남로당에서 박헌영의 비서였던 박갑동은 저서 '박헌영-그 일대기를 통한 현대사의 재조명'에서 홍증식이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기자들을 대거 조선일보에 추천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조선일보에는 박헌영뿐 아니라 김태연, 임원근, 김단야, 조봉암, 남로당 출신 홍남표(월북 후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역임), 김준연, 신일용 등이 입사했다.

    사회주의자들이 포진된 당시 언론계였기에 여러 '필화'가 발생했고 '조선공산당 창당대회'를 열기 위한 명목으로 '조선기자대회'가 열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헌영을 비롯한 '사회주의 기자'들은 1925년 4월 15일부터 17일까지 '조선기자대회'를 연다고 일제 경찰에 거짓 신고하고, '조선공산당 창당대회'를 비밀리에 열었다. 

    조선기자대회 마지막 날인 17일에 열린 '간친회'에 일경의 시선이 집중된 틈을 타 박헌영을 비롯한 김재봉, 김찬, 조봉암 등 코민테른 파견원들이 주축인 화요파는 북풍회와 함께 조선공산당 창당대회를 열었다. 박헌영은 그다음 날인 4월 18일에 자신의 신혼집에서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하고 스스로 책임비서에 올랐다. 

    그러나 1925년 10월 15일 신일용이 작성한 "소련의 힘을 빌어야 조선이 독립할 수 있다"는 내용의 사설로 '조선일보 제3차 정간사건'이 발생하자 박헌영은 임원근, 김단야 등과 함께 해직됐다. 이후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11월 30일 아내 주세죽과 일본 경찰에 잡혀 복역하게 됐지만, 옥중에서 자신의 배설물을 먹으며 '정신병자' 행세를 해 1927년 11월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박헌영은 그다음 해인 1928년 11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해 코민테른 비서부가 사회주의 간부급을 육성하기 위해 직영하는 특수대학인 '국제레닌학교'에서 공부한다. 조선공산당은 1928년 12월에 해체됐다.

    그러나 박헌영은 1929년 11월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재조직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1931년 3월 김단야와 사회주의 기관지 '콤뮤니스트'를 발간해 '조선공산당 재건방침'을 수립했으며 1945년 8월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해 1945년 9월 8일 사실상의 '조선공산당 창립대회'를 열었다. 

    이후 박헌영은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과의 3당 합당을 준비하다가 자신의 지지세력을 중심으로 1946년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을 결성했다. 그러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남로당은 △1945년의 조선정판사위조지폐사건 △1946년의 9월총파업사건과 △10월폭동사건 △1947년의 3·1절 충돌사건 △8·15폭동 △1948년의 2·7총선방해투쟁, △4·3투쟁(제주도 무장투쟁) △여수·순천반란사건 △1949년의 국회프락치사건 등 정치·사회의 불안을 조성하기 위한 파괴활동을 지속했다. 

    박헌영은 미(美) 군정이 자신을 비롯해 '조선정판사위조지폐사건'에 연루된 남로당 핵심 간부들을 검거하려 하자, 그 하루 전인 1946년 9월 5일 관 속에 누워 영구차 행렬로 위장한 채 월북한다.

    그는 북한에 머물면서도 남한 내 공산주의 세력을 장악하기 위해 '박헌영 서한'을 통해 남로당의 활동을 조종하며 김일성과 소련의 눈에 들기 위한 권력투쟁을 벌였다. 

    이는 1995년 중앙일보가 보도한 "소련 점령군 스티코프 대장이 수상에 여운형, 부수상에 박헌영과 김규식, 내무상에 김일성, 산업상에 김무정, 교육상에 김두봉, 선전상 오기섭, 노동상 홍남표, 계획경제위원장 최창익 등을, 나머지 농림상·재정상·교통상·체신상·보건상·상업상 등은 미국이 추천한 인사로 임명한다는 내용의 임시정부 조각안을 미소공위 개최 직전인 46년 3월 7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등에 긴급 보고했다"는 소련 극비문서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박헌영은 스탈린에게 김일성을 비판하는 편지를 보내 1946년 7월 20일쯤 모스크바에서 김일성과 함께 스탈린을 만나지만, 이 회견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을 재신임했다. 1948년 9월 9일 북한에 정권이 수립되자 김일성은 수상, 박헌영은 부수상 및 외상에 취임했다.

    박헌영은 1950년 4월 스탈린에게 "전쟁이 시작되면 남한의 20만 남로당원이 봉기해서 인민군의 진격을 도울 것"이라며 '남로당원 20만 명 봉기설'을 주장해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과 함께 '6.25 남침'을 전격 추진했다. 그는 인민군 중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지만, 전쟁 후 세력을 공고화한 김일성에 의해 1956년 7월 19일에 미국의 첩자로 몰려 처형된다.

    한편, 이날 노동당 인사들은 기자에게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주의는 북한, 러시아식 사회주의와는 다르다"며 강변했다. 그러나 이들이 이날 점심을 위해 찾은 곳은 북한 김일성의 친동생인 김영주가 다녀갔던 '용금옥'(서울 중구 다동)이라는 추어탕 전문점이었다. 

    1973년 남북 회담에서 북측 대표로 참석한 부주석 박성철이 "용금옥은 지금도 잘 있습니까"라고 물어본 일화와, 1990년 남북회담을 위해 서울을 방문한 북한 총리 연형묵이 이틀 연속 용금옥 추어탕을 먹었다는 일화는 여전히 회자된다.

    이날 행사는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인터내셔널가(歌)' 제창으로 마무리됐다. '3대 세습 권위주의 독재 정권'인 북한도 지난 2021년부터 당 대회에서 인터내서널가를 불러왔다. 일반 사회주의 국가를 지향하는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