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년4개월 만에 미국 명문 3개대학 조지 워싱턴대 학사, 하버드 석사, 프린스턴 박사 학위 취득.
    이승만의 미국 유학기록은 한국은 물론 아마도 세계에서 찾기 힘든 신기록 아닐까.
    미국인 천재청년도 아니고 배재학당 2년 학습이 전부인 한국인 30세 유부남이 어떻게 이런 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가. 이승만이니까 가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과연 ”이승만은 세계사에 드문 희대의 인물“--[대한민국의 기원]을 쓴 이정식 교수가 되풀이 하는 말이다. 유영익 교수는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에서 ”한국에 군계일학(群鷄一鶴)이오, 미국에도 전무후무한 기록“이라고 평가한다.

    ◆미국 유학계획, 한성감옥서 다 짰다

    이승만은 미국 유학을 언제 결정했을까. 선교사들의 권유와 도움으로 유학을 결심했다는 설이 많지만 필자는 ‘한성감옥에서 이미 스스로 결심하고 준비했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이승만이 남긴 수많은 옥중기록과 논설 중에 ‘미국흥학신법’(美國興學新法) 즉 ‘미국의 교육을 일으킨 신법’이라 해제하여 쓴 긴 논설이 있다. 이승만은 글머리에 1872년 명치유식직후 주미일본공사가 미국정부에 부탁하여 받은 것으로 미국정부의 교육부에서 채록한 자료라면서 ‘미국의 교육진흥에 관한 새 제도’라는 부제도 붙여놓았다.
    “예수교로 백성 교육”을 주창한 청년 이승만이 기독교 국가 미국의 교육제도를 알고 싶어 이 자료를 구해 들여와 읽고 해설까지 써 놓은 것이 틀림없다. 
    이 글에 미국식 교육제도를 설명하면서 뉴욕, 워싱턴, 필라델피아 등 미국 동부에 산재한 이른바 ‘아이비리그’ 명문 대학교들도 소개한다. 특히 미국 건국 전 1636년에 청교도들이 세워 가장 오래된 하버드 대학은 하버드 개인이 거금을 투자해 세계 일류로 육성한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이승만은 이때 유학할 대학들을 다 골라 놓았을 터이다.

    이 글과 함께 눈길을 끄는 결정적 메모가 남아있다.
    <유학생이 생계유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거리. Works of Students for Earning Livehood>가 그것이다. 잔디깎기, 나무 톱질하기, 우유배달, 식당 웨이터, 상품판매, 급사, 타자, 신문 기고, 야간 개인교수 등등 21개 일거리를 적어놓았다.
    유학 결심이 없었다면 감옥에서 왜 이런 메모까지 남겼을까. 이승만은 이때 스스로 생계를 해결할 고학을 작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이 선택한 ‘고학 알바’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독립운동’이다. 공부하며 틈틈이 교회들과 YMCA등을 순회하며
    미국인들 앞에서  ‘한국의 독립’을 강연하고 거기서 나온 성금으로 생활비를 충당한 뒷날 기록들은 눈물겹다. 볼티모어 장로교회에서 9달러, 워싱턴 제일침례교회에서 7달러40센트...등등. 유학생 이승만은 가계부 적듯이 입출금을 꼼꼼이 적어 남겼다. 그는 유학기간 140여회의 순회강연을 펼친다.
    만주나 중국으로 망명한 독립 운동가들이 중국인을 상대로 ‘독립 강연’ 캠페인을 장기간 벌였다는 기록이 과연 있었던가?

    감옥서 석방되자 도미 준비...추천서 19통 챙겨

    1904년 8월7일 마침내 5년7개월 만에 석방된 이승만은 [제국신문] 주필 일을 하면서 미국 갈 채비를 서두른다.
    첫째, 선교사 게일을 찾아가 ‘세례’를 요청한다. 세례교인으로 미국에 가야 기독교인으로서 인정받고 싶어서였다. 장로교 게일은 이승만에게 워싱턴 커버넌트 감리교회 목사 햄린((Lewis T. Hamlin)에게 세례 받으라며 추선서등 소개장 3통을 써주었다. 이 밖에도 이승만은 언더우드 7통, 벙커 등 도합 19통의 추천서를 받았다. 이 추천서들 사본이 이승만의 일기장에 첨부되어 지금도 남아있다.

    둘째, 이승만은 민영환-한규설을 만나 미국에 정부대표로 가도록 건의한다. 러일전쟁 종전협상을 서두르는 미국에게 ‘대한독립’을 도와달라고 설득하라는 주문이었다. 
    왜냐하면, 감옥에서 나와 다시 [제국신문]에 논설을 쓰던 이승만은 그 논설 때문에 일본 헌병사령부가 신문을 정간시켰고 “전쟁에서 이겨 한국을 손아귀에 넣자 그 생명자체를 말살하기에 이르렀으니” 조미수호조약에 의거 미국의 힘을 이용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민영환은 이승만을 주미공사로 임명하겠다며 고종을 만났다(이승만 영문자서전 초록: 출간안됨). 결과는 “영어 잘하는 이승만을 미국에 파견하는 것으로 그친다.
    그 즈음 어느 날 밤 이승만의 집에 궁녀가 나타나 “폐하께서 단독 면담을 원하시니 입궐하자”고 전하였다. 이승만은 쌓였던 증오감이 북받쳐 즉석에서 거절한다. “4,200년 왕통사상 가장 허약하고 겁많은 임금”으로 경멸하던 이승만이다. “금전과 밀서를 주려고 불렀겠지만 황제면담을 거부한 것을 후회해본 적 없다”고 했다. ([청년이승만 자서전] 이정식 지음)
  • 1904년 11월 이승만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청계천 모전교 근처 사진관에서 찍은 가족사진.ⓒ연세대이승만연구원
    ▲ 1904년 11월 이승만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청계천 모전교 근처 사진관에서 찍은 가족사진.ⓒ연세대이승만연구원
    ◆마지막 가족사진! 
    이 사진은 이승만이 도미하기 직전 기념으로 서울시내 사진관에서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이다.
    이승만은 양복차림, 그 옆에 서있는 오른쪽 여성이 조강지처 박씨 부인이다. 1890년 한동네  15세 동갑내기로 결혼하여 아들 봉수(모자 쓴 어린이)를 낳았다. 6대독자가 낳은 7대독자는 미국유학중 미국에 데려왔다가 전염병에 걸려 숨진다. 그 옆에 앉아있는 노인이 이승만의 아버지 이경선 공, 맨 왼쪽이 이승만의 맏누님(우태명씨 부인)이고 봉수 뒤에 서 있는 소년은 누님 아들이다. 이승만 어머니 김씨 부인은 1896년 8월 갑자기 별세하였다. 
  • 1902년 12월 최초의 하와이 이민 계약노동자 121명을 싣고 호놀루루로 간 미국기선 갤릭호(하와이 이민사 박물관)
    ▲ 1902년 12월 최초의 하와이 이민 계약노동자 121명을 싣고 호놀루루로 간 미국기선 갤릭호(하와이 이민사 박물관)
    ◆이민선 3등 객실...‘자유의 항해' 스타트

    1904년 11월4일 서울을 떠난 이승만은 다음날 제물포에서 미국선박 오하이오 호(S.S. Ohio)에 올라 미국을 향해 떠난다. 품속엔 난생처음 해외여행 여권과 여러사람이 준 여비, 그리고 아메리카 신천지 유학을 도와줄 추천서 19통이 들어있다.
    1902년부터 하와이 이민 계약노동자들을 실어날으는 선박 최하급 선실에 자리 잡은 이승만은 이 날부터 일기를 쓴다. 항해일지처럼 ‘Log Book’이라 이름붙인 일기는 40여년 지나 해방후 귀국할 때까지 쓰는 ‘독립운동 항해 기록이다.
     ‘Log Book of S.R’은 2015년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김영섭 원장(연세대 교수)이 영문과 국문 영인본과 번역본을 출간하였다.

    부산을 거쳐 일본 고베(神戶)항에 도착, 일본 교회에서 강연을 하고 청중들이 거둬주는 여비를 받았다. 이 돈은 뒷날 이승만이 워싱턴에서 교회 순회강연을 하며 생활비를 버는 고학생활의 첫 성금이 된다. 

    고베에서 사이베리아 호(S.S. Siberia)로 바꿔타고 하와이 호놀루루에 내린 것은 11월29일 아침이다. 긴 항해동안 이승만은 [제국신문]에 기행문과 논설을 써보내 게재한다.
    배재학당 동문 윤병구(尹炳求) 목사 등 교민200여명이 한인교회에서 열어준 환영회에서 이승만은 장장 4시간 열변을 토하여 한많은 이민 노동자들을 감동시켰다. 자신도 울고 청중도 울었다.

    12월16일 샌프란시스코 도착. 이승만보다 1년 먼저 미국에 온 안창호(安昌浩)는 만나지 못했고 로스앤젤레스로 이동하여 1주일을 보낸뒤 대륙횡단 산타페(Santa Fe) 열차를 타고 시카고를 거쳐 마침내 목적지 워싱턴에 도착한 날이 12월31일 그해 마지막날 저녁7시다.
    펜실베이니아 애비뉴의 작은 호텔에 여장을 푼 이승만은 그길로 햄린목사를 찾아갔다.
    게일 선교사의 간곡한 추천서를 읽은 햄린 목사로부터 4월23일 부활절에 ‘세례’를 받는다.
  • 조지 워싱턴대학 유학생 이승만. 오른쪽은 대학내YMCA 강연회 연사로 뽑힌 다른 학생들과 이승만(맨아래) 홍보전단.ⓒ연세대이승만연구원
    ▲ 조지 워싱턴대학 유학생 이승만. 오른쪽은 대학내YMCA 강연회 연사로 뽑힌 다른 학생들과 이승만(맨아래) 홍보전단.ⓒ연세대이승만연구원
    ”한국 천재“ 칭찬받으며 조지 워싱턴 대학교 3학년 편입

    걱정하던 대학입학은 뜻 밖에도 순조로웠다. 2월에 워싱턴 사교계의 VIP 햄린 목사는 이승만을 조지 워싱턴 대학교 니덤(Charles W. Needham) 총장에게 소개한다. 면접 결과 ”대단한 재능의 소유자다. 배재 대학 수준이 이렇게 높으냐“며 대뜸 3학년에 편입시켜 주는 게 아닌가. 게다가 장차 귀국하여 교역자가 되고 싶다하니 등록금 전액에 상당한 교회 장학금까지 마련해 주었다. 유학기간이 짧아지고 학비 걱정이 가벼워졌다.
  • 1905년 8월4일 미국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났을 때 예복을 입은 유학생 이승만.ⓒ연세대이승만연구원
    ▲ 1905년 8월4일 미국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났을 때 예복을 입은 유학생 이승만.ⓒ연세대이승만연구원
    ◆첫 대미 외교 – T.루즈벨트 대통령 만나 ‘독립’ 호소

    30세 늦깎이 한국 유학생이 강대국 미국 대통령을 만났다. 
    한국 민간인으론 최초의 일 – 옥중저서 [독립정신]에서 ”외교를 잘해야 나라를 지킨다“고 실천강령에서 주장한 이승만의 첫 외교무대, 그것도 미국 하원의원과 국무장관을 만나고 대통령까지 만나는 최상급 외교 시험대이다. 이승만은 쓰라린 시험을 맛본다.

    대학입학 문제와 함께 중요한 사명은 미국에 대한 ‘독립지원 요청’이다. 이승만은 서둘러 친한파 하원의원 딘스 모어(Hugh A. Dinsmore)를 만나 국무장관 헤이(John M. Hay) 면담 주선을 부탁하였고, 2월20일 딘스 모어 의원과 함께 헤이 장관을 30분 면담한다. 헤이는 조미수호조약의 의무를 이행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지만 7월1일 돌연 사망하였다. 
    낙담하던 차에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William H. Taft)가 일본 방문길에 호놀루루에 들렀다. 
    윤병구와 교민들은 8월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열린다고 발표된 러일전쟁 강화회의에 이승만과 윤병구를 파견하기로 정하고 미국대통령에게 제출할 탄원서를 만들었다. 태프트 장관의 소개장과 탄원서를 가지고 윤병구는 워싱턴 이승만을 찾아가 백악관에 대통령 면담신청을 한다. 
    의외로 금방 정해진 면담은 1905년 8월4일 오후 3시30분 뉴욕 롱아일랜드 오이스터 베이(Oyster Bay) 사가모어 힐(Sagamore Hill) 여름 백악관(Summer Whitehouse), 두 사람은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Jr.)를 직접 만났다.
    외교관 차림의 이승만은 탄원서를 제출하며 ”각하께서 언제든지 기회 있는대로 조미수호조약에 입각하며 불쌍한 나라를 위험에서 건져주시기 바랍니다“고 거듭 간청하였다. 
    루즈벨트는 미소를 지으면서 ”중대한 사안이니 이 문서를 공식루트를 통해 다시 보내주면 강화회의에 올리겠다“고 답하는 것이었다. 기대이상의 반응에 접한 두 사람은 뛸 듯이 기뻐하며 그 길로 기차를 타고 워싱턴 한국공사관 대리공사 김윤정을 찾아갔다. 이게 웬일인가. 어이없게도 김윤정은 ”본국 훈령이 없어서“라며 필요한 절차를 거부한다. 분노한 이승만은 온갖 설득과 협박까지 해봤으나 맹수같은 흑인 경비명이 쫓아내고 문을 잠갔다. 김윤정은 이미 일본에 매수되어있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이승만은 민영환에게 보고서를 보냈다.

    그뿐인가. 이승만 자신도 국제문제를 잘 안다 했지만 그때 ‘루즈벨트의 연막작전’에 속아 넘어간 것을 어찌 알았으랴. 
    루즈벨트는 일본을 방문한 태프트 장관이 가쓰라 일본총리와 ‘밀약’을 맺은(7.27) 뒤에야 대한제국의 ‘특사’를 형식적으로 만나주었던 것이다. ‘일본의 한반도 장악과 미국의 필리핀 통치’를 양해한 ‘태프트-가쓰라 메모’는 1924년 존스홉킨스 대학의 덴네트(Tyler Dennett)가 발굴해낼 때까지 아무도 몰랐다.  

    이승만은 이때의 ‘미국 배신’을 잊지 않고 와신상담, 용미(用美) 전술에 기막힌 무기로 활용한다. 특히 6.25 휴전 협상때 한미동맹 요구를 기피하는 미국의 목덜미에 이 배신의 칼을 꽂아 굴복시킨 일은 유명하다.

    ★9월5일 포츠머스에서 러일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제2조는 이렇다.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 군사, 경제상의 우월한 이익을 갖는 것을 인정하고 일본정부가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보호 및 감리 조치를 취하는데 대하여 방해하거나 간섭하지 아니할 것을 약정한다’
    이미 8월12일 체결된 2차 영일동맹협약 제3조에도 영국은 일본의 한국 지도 감리 및 보호 조치를 인정한다고 명문화 되었다. 이로써 양국의 양해를 얻은 일본은 11월18일 고종을 협박하여 ‘을사조약’ 체결을 강행한다.
  • 이승만을 줄곧 도와준 민영환과 한규설.ⓒ뉴데일리DB
    ▲ 이승만을 줄곧 도와준 민영환과 한규설.ⓒ뉴데일리DB
    ◆민영환의 자결...”우리집은 누가 돌봐주나“

    11월18일, 고종이 끝내 일본의 압력에 굴복,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유일하게 반대하던 의정대신 한규설은 파면되고 감옥에 갇힌다.
    반대 상소를 계속하던 민영환도 끌어내자 이틀후 그는 자결하였다.
    11월30일 민영환 순국 소식을 접한 이승만의 충격은 남다른 것이었다.
    독립협회를 적극 지원해주고 감옥살이 할 때 자기집 생활비까지 지원해주었으며 석방운동에 앞장섰고 이승만을 미국에 보내면서 ‘집 걱정은 말라’던 두 사람의 지원자 민영환과 한규설이 하루 아침에 사라졌다.
    이승만은 국가존망과 가족 생계가 아득하다. 
    이때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있는데 영문 메모가 눈을 끈다. ‘Min Young Whan is dead. Who will Support our home?’
    민영환이 죽었으니 우리 집은 누가 지원해주나?

    그래서일까. 이승만의 ‘강연 알바‘는 더욱 많아지고 바빠졌다. 그의 연설이 인기를 끌자  YMCA등 곳곳에서 초청도 많아졌다. 그해 12월엔 뉴욕과 메릴랜드까지 9회나 뛰어다녔고 이듬해 1월엔 8회, 아들 태산(봉수는 아명)이 숨진 순간에도 교회서 강연을 하고 있었다.
  • 조지워싱턴대학때 뉴잉글랜드의 국제기독학생모임에 참석한 이승만.(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연세대이승만연구원
    ▲ 조지워싱턴대학때 뉴잉글랜드의 국제기독학생모임에 참석한 이승만.(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연세대이승만연구원
    ◆ 미국 독립기념일 행사에서 벌어진 일

    조지 워싱턴 대학때 1906년 6월말, 이승만은 매사추세츠주 노스필드에서 열린 ’만국 기독학생 공회‘에 대학대표로 참석했다. 한국인으론 처음이다. 이 회의에서 미국 독립기념일 축하행사가 열렸다. 각국 깃발이 걸린 홀에는 남녀 3,000여멍 참가자들이 각기 제나라 의상을 입고 축하연설을 들으며 미국국가와 만세를 불렀다. 이어서 국가별로 순서에 따라 일어나 경축하는 차례였다. 
    일본 학생 4명이 ’일본 만세‘를 부르고 중국학생 10여명이 일어나 국가와 만세를 불렀다.

    그때 이승만이 벌떡 일어나더니 강단에 올라가 주최자에게 말했다.
    ”나는 한국 학생인데 혼자 경축하겠습니다.“
    주최자는 흔쾌히 그러라며 장내에 알렸다.
    이승만은 무대에 올라 힘차게 ’독립가‘를 불렀다. 
    그리고는 ”대한제국 만만세“를 세 번 부르고 ”아메리카 만만세“를 세 번 불렀다.
    청중들은 박수와 환호를 지르며 이승만에게 몰려와 악수를 청하였다.

    이날 행사를 이승만은 편지로 써서 서울의 [제국신문]에 보내어 3일 연속 크게 보도되었다. 이어 [대한매일신보]도 전문을 전재하여 장안에 화제를 일으킨다. ([이승만과 김구] 제2권, 손세일 지음, 조선뉴스프레스. 2015)
  • 1905년 미국에 온 아들 태산을 돌봐줄 기독교가정을 찾는 워싱턴 타임즈 신문기사. 오른쪽은 디프테리아로 숨진 태산의 묘비.(필라델피아 공원묘지에서 필자 찍음)ⓒ뉴데일리DB
    ▲ 1905년 미국에 온 아들 태산을 돌봐줄 기독교가정을 찾는 워싱턴 타임즈 신문기사. 오른쪽은 디프테리아로 숨진 태산의 묘비.(필라델피아 공원묘지에서 필자 찍음)ⓒ뉴데일리DB
    ◆독립운동 강연다니다가 7대독자를 잃다

    서울의 박씨 부인은 아들 봉수를 박용만 편에 미국으로 보냈다. 나중에 자신도 미국에 갈 생각을 했다고도 전해진다. 대학편입 두 달 만에 아들까지 돌봐야 했던 고학생 이승만, 더구나 그는 대학수업 못지않게 ‘독립운동’에 몰두해 있었다. 교회들과 기독교 단체 등 어느 모임이든지 달려가 일본의 압제에 몰린 한국의 현실과 역사를 알리는 강연을 진행하고 있던 이승만이다. 그것은 독립운동이자 강연장 청중의 성금을 받아 생활비를 충당하는 일이었다. 

    생각다 못한 이승만은 친분있는 신문기자에게 부탁하여 [워싱턴 타임즈]에 아들을 맡아줄 기독교 가정을 찾는다는 기사까지 낸다. 그날로 희망자가 나타나 아들 태산을 필라델피아의 부유한 보이드 부인 집에 맡겼다. 그러나 그 부인은 태산을 자기집에 두지 않고 시립아동보호소에 보냈다.
     거기서 태산은 당시 무서운 전염병 디프테리아에 걸려 숨졌던 것이다.
    영어를 몰라 언어장애 등 이상증상을 보이고 우울증까지 겹친 소년,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사흘을 앓다가 눈을 감았다. 
    뒤늦게 전보를 받고 달려온 아버지 이승만은 ‘방역법’에 막혀 아들 시신도 보지 못했다. 그는 일기에 ‘슬프다’ 딱 한줄만 써놓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아들의 죽음과정을 적어 남겼다.([Log Book of S.R.] 이승만 일기)
    나라를 잃고 후원자 민영환을 잃고 유일한 혈육까지 한꺼번에 잃어버린 이승만은 무엇을 얻어야 할 것인가. 그의 공부와 독립운동 양면활동은 더욱 치열해진다.

    필자도 필라델피아에 묻힌 태산의 묘를 참배한 적이 있다. 
    조그만 묘비엔 ‘RHEE TAISANDH 1899~1906’이라 적혀있어 태산이 7살에 숨진 것으로 기록되어있는데 이는 당시 시립아동보호소의 착각으로 여겨진다. 
    이승만은 자서전에서 ‘열네살’로 말할 뿐더러 그가 배재학당에 들어갈 때 아들 나이가 세 살이었다고 회고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6대독자 이승만은 7대독자 아들을 어이없이 잃었고 다시는 후손을 생산하지 못한다.
    58살에 만난 30대 프란체스카 부인에게 이승만은 농반진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마미(호칭)는 다 좋은데 아이를 못 가지는 게 탈이야.“ 
  • 이승만이 미국유학 시절 자료를 보관했던 하버드 앨범 표지, 하버드 대학원생 이승만이 머물던 주택.ⓒ연세대이승만연구원
    ▲ 이승만이 미국유학 시절 자료를 보관했던 하버드 앨범 표지, 하버드 대학원생 이승만이 머물던 주택.ⓒ연세대이승만연구원
    ◆”나는 2년내 하버드 박사 돼야, 입학시켜 달라“ 

    이런 무모한 도전이 가능한가. 한성감옥에서 부터 하버드를 꿈꾸던 유학스케줄을 고집한 이승만 다운 용기였다. 미국 일류대학생도 힘든 것을 30대 동양남자가? 

    이승만은 스승 서재필에게 먼저 편지를 보낸다. 하버드대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박사를 하려는데 도움 말씀을 달라는 요청이다.
    서재필의 응답은 뜻밖이었다.
    "석사만 하고 귀국하라. 박사까지 할 필요는 없다"
    왜 그랬을까? 스승이 시샘하나? 
    미국시민이 되어 의학박사가 된 서재필은 미국여성과 결혼, 그때 필라델피아에서 문방구를 경영하고 있었다.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학사학위(B.A.) 취득을 앞둔 1907년 초, 이승만은 하버드 인문대학원장에게 단호한 편지를 쓴다.
    ”나는 동양학을 다년간 연마한 학자인데 하버드대에서 2년 내 박사학위를 얻게 해달라. 한국에 돌아가 해야 할 일이 많다. 조지 워싱턴대학에서는 2년 내 박사가 가능하다고 한다.“
    미국의 우수한 학생도 하버드 인문학 분야 박사를 따려면 최소 5년이 상식인데, 이를 모를 리 없는 이승만은 목표를 향해 정면돌파하는 신념과 용기를 여기서도 보여주고 있다.

    어처구니 없는 하버드 대학원은 논의 끝에 일단 ‘2년 시한 없는 입학’을 허가할 테니 석사과정부터 완수하라고 회답한다. 이승만은 두말없이 조지 워싱턴대를 졸업하자마자 보스턴으로 달려갔다.
    배재학당 입학순간 발견한 ‘자유의 신대륙’ 아메리카 독립운동의 요람 보스턴, 거기서 장차 ‘대한독립의 꿈’을 연마하며, 하버드 출신 미국 지도층과 대등한 대화와 협상력을 키울 수 있는 본거지 아닌가. 1907년 가을학기부터 1908년 봄까지 이승만은 ‘청교도의 자유 독립역사’를 호흡하면서 강연 순회도 계속하였다. 

    그때, 샌프란시스코로부터 난데없는 뉴스가 터진다.
    애국열사 장인환과 전명운이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권총으로 저격한 사건이다.
    스티븐스는 일본이 고용한 한국정부의 외교고문인데 ”일본 지배가 한국에 유익“ 운운 막말 선전을 계속하자 동포들이 격분했다. 3월23일 아침 기차역에서 그는 쓰러지고 만다.
    문제는 검거된 두 사람의 재판 변론을 영어 잘하는 이승만이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스티븐스 피격사전이 터지자 친일 분위기 미국 언론은 친일적 보도를 계속한다.
    따라서 캘리포니아는 물론, 동부지역도 한국인 기피 현상이 생겨나고 하버드대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승만의 역사학 지도교수는 면담을 피할뿐더러 과제논문들 심사도 않고 우편으로 돌려보내는 등 지식인들마저 따돌림 판이었다. 하버드냐, 변론이냐, 이승만의 고민은 깊었다.
    결국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거절한다. 첫째, 평소 무장투쟁은 이대로는 무익하다고 주장해온 것, 둘째 기독교신앙에서 폭력 살인을 거부한다는 것, 셋째 적국 일본의 선전꺼리만 되며 본국 동포를 탄압하는 빌미만 준다는 것, 넷째 지금은 실력양성이 먼저요 무장투쟁은 국제환경이 조성되면 미국과 함께 총력전을 벌이자는 것 등이었다. 
    특히 하버드대 석사 공부를 계속해야하는 현실적 필요성이 가장 큰 이유임은 물론이다.

    이래저래 하버드대 박사까지는 이런 분위기에서 불가능하겠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보스턴을 떠나 뉴욕으로 갔다. 유니언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기숙사에 머물면서 2년내 박사학위를 줄 다른 대학, 컬럼비아대학교나 시카고 대학을 물색하며 입학수속을 진행한다.
    그때, 또 하나의 ‘행운‘이 찾아왔다.
    서울서 옥중 이승만을 도왔던 선교사 홀(Ernest F.Hall) 목사와 우연히 마주친 일이다..
    홀 목사는 대뜸 말했다. ”주저 말고 당장 프린스턴대로 가자“며 기차표부터 끊는 것이었다.
    프린스턴대학과 프린스턴 신학원(Prinston Thelogical Seminary)을 나온 홀목사는 ”2년내 박사 가능할 것“이라며 이승만을 강력하게 이끌었다. 
  • 하버드 대학원 재학시절 급우들과 국제법 지도교수 윌슨(앞줄 가운데)ⓒ연세대이승만연구원
    ▲ 하버드 대학원 재학시절 급우들과 국제법 지도교수 윌슨(앞줄 가운데)ⓒ연세대이승만연구원
  • 프린스턴대 대학원생 이승만이 기숙사 Hodge Hall 숙소에 앉아있다. 책상에 테니스 라켓이 보인다.ⓒ연세대이승만연구원
    ▲ 프린스턴대 대학원생 이승만이 기숙사 Hodge Hall 숙소에 앉아있다. 책상에 테니스 라켓이 보인다.ⓒ연세대이승만연구원


    ◆프린스턴大서 2년만에 박사...최초의 국제법 학자

    프린스턴대 웨스트 대학원장은 이승만에게 ”2년내 박사과정을 끝낼 수 있도록 적극 돕겠다“는 약속과 함께 프린스턴 신학원 기숙사에서 무료로 기숙하라는 혜택까지 베풀었다.
    이승만은 뉴저지주 프린스턴 대학에서 외교학과 국제법을 전공하며 미국사, 철학사 등을 공부하고 신학교의 특별학생으로 1년간 신학도 연구하였다. 
    당시 대학총장인 윌슨(Woodrow Wilson), 대학원장 웨스트(Andrew West), 신학교 학장 어드만(Charles Erdman) 등의 각별한 총애를 받은 이승만은 엘리엇(Edward Elliot) 교수의 지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쓴다. 
    제목은 ’미국의 힘에 영향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다.
    즉, 오늘날의 국제법상의 전시중립(戰時中立), 교역의 중립을 다룬 것인데, 미국의 독립 1776년 이전과 그후 1872년까지 약 100년에 걸쳐 발전한 전시 무역의 중립에 미친 미국의 국제적 영향력을 검증해본 것이었다.
    이승만은 이 기간 크게 발전한 통상의 자유는 인류에 대한 큰 축복이며, 그 중심에 ”미국의 공헌이 절대적”이라고 결론짓는다. 영국등 유럽 해양강국의 반격를 제압하며 무역의 중립성을 역사적으로 크게 성장시킨 것은 “미국의 힘“이었으므로 ”아메리카 만세“라는 말로 논문을 끝맺는다. 

    이승만이 당시 독립분야도 아닌 국제법과 평소 주장하던 ‘자유통상 부국론’과 연결시켜 미국100년사에 걸친 해양경쟁 국제관계를 연구한 목적은 무엇일까.
    필자는 그것이 이승만의 미국유학 목적의 하나라고 추정한다.
    [독립정신]에서 명백히 밝힌 ‘미국과 동등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연대가 절대필요하다는 지정학적 인식에서 지정학적 접근법으로 ‘원교근공(遠交近攻)’의 현대적 버전을 만들려는 이승만의 ‘독립유지 전략’이 그 동기라고 본다.
    다시 말해 한미동맹 구축을 향한 출발점이 ‘국제정치와 국제법적 미국 탐구’ 논문인 것이다.
    그의 유명한 지미친미용미(知美親美用美) 전략의 사전 점검과 동력을 생산 축적하는 여정이 미국 유학이었다.
    이 논문은 이승만의 졸업2년뒤 1912년 1월 프린스턴대 출판부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된다.
    제1차 세계대전 중 공해상의 중립문제가 대두하자 이 단행본에 국제적 관심이 집중되어 
    ”당시 나는 중립교역에 대한 권위자로 인정되었다“고 이승만이 기록할 정도였다.(이승만 자서전 초록)

    ★하버드 대학원 석사학위(M.A.)는 1910년 2월23일 취득한다. 프린스턴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이승만은 석사학위 취득을 요청하였고, 하버드 대학원은 여름방학 기간 한과목을 더 수강하도록 하여 미국사 B학점을 받음으로써 석사를 수여하였다.
  • 프린스턴대학교 국제정치 국제법 박사 이승만과 프린스턴 대학서 출판한 박사논문 단행본.ⓒ연세대이승만연구원
    ▲ 프린스턴대학교 국제정치 국제법 박사 이승만과 프린스턴 대학서 출판한 박사논문 단행본.ⓒ연세대이승만연구원

  • ★이승만을 총애한 윌슨 총장은 집으로 데려가 가족만찬을 함께 즐기며 딸의 피아노 반주도 들려주었다. 윌슨은 주위 사람들에겐 ”이 사람은 미래 한국 독립의 구원자”(the future redeemer of Korean independence)라 소개하며 이승만과 한국독립문제와 미국 정책등 토론도 벌이곤 하였다. .
    프린스턴 대학총장으로서 마지막 졸업식은 1910년 6월14일, 윌슨과 대학원장 웨스트는 이승만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어깨에 전통적인 후드를 걸어주며 축하의 박수와 악수를 나누었다.
    윌슨은 직후 프린스턴 대학을 떠나 그해 뉴저지 주지사에 출마하여 당선되고 1912년엔 28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승만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도 참관한다.
    윌슨의 세 딸 중에 둘째 제시(Jessie Wilson)가 이승만에게 호감을 보였다고 하며, 자신의  결혼식땐 하와이에 망명중인 이승만에게 청첩장도 보내 화제가 되었다. 
    ▲사진=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면사포를 쓴 여인이 제시, 뒷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 윌슨 대통령과 윌슨 여사.(1913년 11월23일 제시 결혼식 기념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