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후 성시백 이재복등 남로당 거물들 모조리 색출 검거 숙군 4천7백명, 6.25중 군 반란 막아...박정희 전향시켜 40세 때 군 고위층 비리 수사하다 부패세력에 암살당해

  • “내가 잡혔으니 남한은 이제부터 잠잠해질 거요”

    이것은 해방 후 암약한 남로당 거물 이재복(李在福·46)이 잡힌 순간 지껄인 말이다.
    대구폭동(1946.10.1.)과 여수-순천 군반란사건 등을 지휘한 남로당 군사총책 이재복, 그를  검거한 김창룡(당시 육본 정보국 대위)는 “이 사건이 간첩망 소탕 작업 중에 가장 힘들었다”고 회고한다.
    가명만 5개에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는 이재복을 찾느라 김창룡 정보대원들은 엿장수, 두부장수, 참기름장수 등을 가장하여 서울 시내를 샅샅이 뒤졌다. 만 3개월이 지난 어느날 신당동 살림집을 확인한 김창룡은 토요일 새벽 3시 대원들과 급습, 도망치려는 이재복 부부를 격투 끝에 체포한다. 안방 천장에서 쏟아진 기밀문서들은 당시 제주4.3폭동 후 진행하던 ‘숙군(肅軍)’ 작업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이재복을 이어받은 군사총책은 박정희였다. 김창룡이 신당동 지하방으로 쳐들어갔을 때 박정희 소령은 권총의 총번을 줄칼로 뭉개고 있었다. 요인 암살을 위한 준비작업 중에 덮친 것. 김창룡이 “똑똑한 군인 살려서 반공에 써먹자”고 백선엽 정보국장에게 건의하여 박정희를 구한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박정희도 군부 내 남로당 조직망을 자백하여,  좌익 장병 약 4700여 명을 숙청, 덕분에 6.25전쟁 중 군 반란은 없었다. 
  • ▲ 김창룡 장군이 생전에 쓴 회고록 원고.
    ▲ 김창룡 장군이 생전에 쓴 회고록 원고.
    ▶김창룡 장군(특무대 소장)이 암살당하기 전에 구술과 집필로 남겨놓은  ’간첩 잡은 이야기‘ 원고가 1,600장이나 된다. 미망인 도상원(都相媛) 여사가 좌파정권하에서 출판을 미루고 있던 중에 최근 차녀 김미경(스위스 거주, 첼리스트)와 막내 김미영(바이얼리니스트, 유복녀) 두 딸이  “부친 명예회복을 위하여” 책으로 묶어내었다.

    제목은 <숙명의 하이라루>(청미디어 발행). 하이라루(海拉甫)는 일본군에 징집된 청년 김창룡의 배속지 만주 최북단 소련과 국경지대 도시 이름이다. 관동군 특수부대원이 되어 국경을 잠입하는 소련 공산군이나 간첩들을 적발하는 임무, “공산주의와의 숙명적 역사는 여기서 첫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고 김 장군이 썼기 때문에 붙여진 제목이다.

    혹한의 굶주림부터 중국집 ’뽀이‘로 거지로 갖가지 위장으로 5년 동안 고투, 모순덩어리 공산당 색출에 집중한 하이라루 반공 체험에서 김창룡은 ’적색주의는 타도해야 할 인류의 적“이라는 신념과 사명감으로 뭉쳐지게 된다.

    이 책에서는 ‘희대의 거물간첩 성시백’ 사건 등은 아쉽게도 제외했는데, 이는 김구와 한국독립당 등을 고려한 조처인 것 같다. 김 장군이 직접 증언하는 간첩사건들은 3부로 나눠 수록, 주요 사건을 골라본다. 
    ★국제공산당 왕근례 체포 ★소련 장교 타살과 38선 월남 ★초대 군감사령관 이병주 사건 
    ★제1연대 장병 몰살 음모 ★오일균 소령-김종석 중령-최남근 중령 체포기 ★남로당 군사부 이재복 및 김영식등 일당 타진 ★남로당 조직부장 이중업 검거 ★남로당 위원장 김삼룡-이주하의 말로 ★밀매음여성 유격대 ★국군 위문 가장한 여학생들 사건 ★천인공로할 197명 학살사건 ★공산당의 남북협상 음모 내막 ★중공 간첩 사건 ★북한 유격 총사령관 남도부 체포기 ★제2의 위조지폐사건 ★대남 평화사절 위장 붉은 밀사의 최후 ★조선왕조실록 탈취사건 ★김성주와 김일성 ★김일성 부인 김정숙과 전속 간호원 조옥희 & 홍명희 딸 ★6.25동란 발발의 진상. 

  • ▲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에서 김창룡 특무부대원들을 접견하며 격려하고 있다.(1955)
    ▲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에서 김창룡 특무부대원들을 접견하며 격려하고 있다.(1955)
    ▶”이승만과 김창룡 때문에 공산 통일을 못했으니 철천지 원수들이다.“
    6.25 패전 이후 북한정권과 남북한 좌익들이 한결같이 앙심을 품고 저주하는 말들은 놀랍게도 오늘날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유족들은 장군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했지만 장녀는 끝내 화병을 얻어 쓰러지고 말았다.
    김창룡 장군의 회고록은 대한민국 건국사이여 반공투쟁사이다. 아니 김 장군의 일생이 그러하다. 
    ”내 한몸 바쳐 자유통일 그날을 보고야 말리라.“
    아깝게도 젊은 나이(40세) 출근길에 뜻밖의 저격을 받아 김 장군은 목숨을 잃었다. 범인은 공산당이 아니라 같은 군부 내 견제세력의 하수인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나라가 망했어, 나라가 망했어“를 되풀이 외치며 통곡했다고 한다. 얼마나 애통했던지 아들을 잃은 듯, 사건 당일 ‘김창룡 장군 공적 찬양 담화문’(1956.1.30.)을 발표하고, 저격범 수사에 대한 담화문(2.2)에서는 ”범인이 외국으로 도주하면 국군과 경찰과 전 민중의 수치“라며 전력검거를 촉구하였다.
    장례식 조사(2.3)도 직접작성, ”총 맞고 병원에 가는 도중 부하들에게 ‘남북통일 못 보고 죽는 것은 유감이나 당신들이 내 목적을 이루게 하라’ 말하고 운명하였으니 살아있는 우리가 그의 자기희생과 충렬을 모범 삼아야 한다“며 안타까움을 두고두고 달래지 못하였다.

    김 장군의 암살범 현역 대령과 일당은 사형과 처벌을 받았지만, 그 배후로 알려진 강모 장군 등은 석방되었다. 범행 동기는 김창룡 장군이 군부 고위급 비리를 깊이 수사했던 것과, 같은 함경도 출신 관련자 모 고위 장성의 지령으로 심증과 소문만 남아 유령처럼 돌아다닌다. 

    66년이 흐른 현재, 북한 김정은이 유사시 핵무기 사용을 공언하고,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는 끝내 분단작전에 돌입하고 있다. 

    정권교체기 한국에서는 ‘검수완박’이라는 부패권력 놀음이 한창이다. 황장엽의 ‘간첩 5만 명’설이 나온 지도 30년, 국군 특무대장 김창룡과 반공검사 오제도의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정작 지금 필요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