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서 51.6% 최다득표로 대통령 당선된 날이 정치인생 '정점'20대 총선 패배로 결정타… 사상 첫 '전직 대통령 출당' 불명예
  • ▲ 박근혜 전 대통령(사진 왼쪽)은 2004년 17대 총선 당시 천막당사 시절을 이끌며 불리했던 판세 속에서 최선의 성과를 거둬냈다. 사진은 지난 2007년 3월 재연한 천막당사에서 강재섭 대표최고위원과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천막당사에 관해 소개하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모습. ⓒ뉴시스 사진DB
    ▲ 박근혜 전 대통령(사진 왼쪽)은 2004년 17대 총선 당시 천막당사 시절을 이끌며 불리했던 판세 속에서 최선의 성과를 거둬냈다. 사진은 지난 2007년 3월 재연한 천막당사에서 강재섭 대표최고위원과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천막당사에 관해 소개하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모습. ⓒ뉴시스 사진DB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자유한국당에서 출당(黜黨)됐다. 지난 1997년 한나라당에 입당한 이래, 영욕(榮辱)의 20년 정당인생에 오점의 마침표를 찍었다.

    한국당 홍준표 대표는 3일 오후 기자간담회를 열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출당을 공식 발표했다. 전직 대통령 중에 임기말 지지율 급락으로 여당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자진 탈당한 사례는 무수하나 윤리위 징계까지 받아가며 강제로 출당당한 사례는 처음 있는 일이다.

    ◆18년 칩거 끝 1997년 IMF 사태 계기로 정계입문

    박근혜 전 대통령은 1974년 모친 육영수 여사를 흉탄에 잃은 데 이어, 5년 뒤인 1979년 10·26 사태로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마저 서거하면서 청와대에서 퇴거해 신당동 사저에 칩거했다. 이후 명목상 영남대 이사장 등을 맡았지만, 7년간 출근한 날은 단 하루에 불과할 정도로 18년 동안 철저한 칩거와 은둔의 기간을 거쳤다.

    이런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정계입문의 길을 열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IMF 사태였다. 1997년 국가부도 위기에 몰리면서 '박정희 향수'가 극대화되고 '이인제 바람'이 일자,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를 찾아가 정계입문을 타진했다.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후보 지지 선언을 하며 한나라당에 입당하는 방식으로 정계에 입문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지선언·입당 기자회견에서 "국민과 돌아가신 아버지가 일으켜세운 나라인데 어떻게 하다가 이 지경까지 왔느냐, 안타깝다"며 "조금이라도 이 나라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책임을 다하는게 나의 도리"라고 천명했다.

    비록 지지 선언을 한 이회창 총재는 그해 대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패배했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은 한나라당에 남아 이듬해 치러진 대구 달성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며 화려하게 원내에 입성했다.

    신군부 시절 총애받으며 탄탄대로를 걷다 정권교체에 즈음해 신(新)여권인 새정치국민회의로 넘어간 엄삼탁 후보를 꺾어 전국적으로도 화제가 됐다. 이후 박근혜 전 대통령은 대구 달성에서 19대 총선까지 내리 5선을 하게 된다.

  • ▲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 2008년 3월 23일 국회 정론관에서 친이명박계의 낙천에 맞서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는 말을 남긴 뒤 나서고 있다. 사진 왼쪽은 당시 비서실장이었던 유정복 현 인천광역시장. ⓒ뉴시스 사진DB
    ▲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 2008년 3월 23일 국회 정론관에서 친이명박계의 낙천에 맞서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는 말을 남긴 뒤 나서고 있다. 사진 왼쪽은 당시 비서실장이었던 유정복 현 인천광역시장. ⓒ뉴시스 사진DB

    ◆"대전은요" 한마디로 판세 뒤엎으며 '선거의 여왕' 등극

    2002년 이회창 후보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다시 충격패하며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리는 나라의 암흑기였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 개인의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크게 도약한 시기였다.

    친노(친노무현)·친문(친문재인) 정권은 불법대선자금, 이른바 '차떼기' 문제를 물고늘어지며 적폐청산으로 보수 세력을 고사(枯死)시키려 들었다.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 본인이 노골적으로 선거에 개입하려 들면서, 결국 국회에서 탄핵이 의결되기에 이르렀다.

    탄핵 역풍(逆風)으로 한나라당이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당의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나섰다. 여의도 당사를 국가에 헌납하고, 당의 현판을 떼서 '천막당사'로 옮겼다.

    그 결과, 17대 총선에서 궤멸 위기였던 한나라당은 121석을 확보하며 기사회생했다. 세상을 뒤엎을 기세였던 열우당의 '황색 바람'도 과반을 겨우 넘는 152석을 내주는 선에서 선방할 수 있었다.

    이후 박근혜 전 대통령은 대표최고위원으로 노무현정권 시절 대여(對與)투쟁에 앞장섰다. 사학법 등 '4대 망국 입법' 저지에 나서며 장외투쟁으로 지지층을 결집하고 선명야당의 한길을 걸었다.

    이런 국면에서 맞이한 2006년 지방선거는 한나라당이 전반적으로 우세했지만, 대전광역시만은 한나라당 박성효 후보가 열우당 염홍철 후보에 비해 유독 열세였다.

    좀처럼 줄어들지 않던 격차는 선거유세 도중 괴한에 피습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병원에서 깨어나며 첫마디로 "대전은요?"라고 묻자 거짓말처럼 뒤집어졌다. 짧은 한마디로 광역시 하나를 뒤엎은 이 사건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칭을 얻는 계기가 됐다.

    ◆MB에 경선 패배했지만 "경선 때 일들 모두 잊자" 승복 연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나라를 망국(亡國)으로 이끈 대가는 처절했다. 현직 대통령과 집권여당 열우당의 인기는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고, 정권교체는 대선을 치러보기조차 전에 기정사실이 됐다.

    국민들은 대선 본선보다도 한나라당 경선에 더욱 관심을 갖는 상황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지층의 충성도가 높았으나 외연 확장에 한계를 보였다. 교통환승요금체계 개편과 청계천 복원 등으로 큰 실적을 올린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민심이 쏠렸다.

    2007년 8·20 전당대회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당원과 대의원 경선에서 승리했으나 국민여론조사를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내주며 경선에서 패배했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이 때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한다"며 "오늘부터 나는 당원의 본분으로 돌아가 정권교체를 이루기 위해 백의종군할 것"이라는 승복 연설을 남겼다.

    "경선 과정의 모든 일들을 하루아침에 잊을 수가 없다면, 며칠 몇날이 걸려서라도 잊자"고 통크게 제안한 승복 연설은 전당대회장에 모여 있던 당원들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경선 패배에도 불구하고 후일을 기약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 ▲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 2012년 12월 19일 밤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뒤 환한 표정으로 국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 2012년 12월 19일 밤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뒤 환한 표정으로 국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 MB정부서 오히려 당내 입지 강화

    '현직 대통령이 차기 잠룡(潛龍)을 붙일 수는 없어도 떨굴 수는 있다'는 말이 있다.

    이명박정부가 들어서자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당내 주류로 올라선 친이(친이명박)계에 의해 위험인물로 지목됐다. 정권교체 직후 치러진 2008년 18대 총선에서 친이계는 이방호 사무총장의 주도 하에 친박계 거세 전략에 나섰다.

    친박 핵심들이 잇달아 공천에서 탈락하자, 박근혜 전 대통령은 언론 앞에서 눈물을 보이며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는 말을 남겼다. 이는 친박계 거세 전략의 파탄을 불러왔다. 심지어 '친박 낙천'을 주도했던 이방호 사무총장의 정치생명마저 끝장났다.

    "살아서 돌아오라"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개별적 지원을 받은 친박계는 친박연대가 14석, 김무성·유기준 의원 등 이른바 '친박 무소속 연대'가 12석을 확보했다. 이들 친박계가 총선 후 복당하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내 기반은 오히려 더욱 탄탄해졌다.

    '붙일 수는 없어도 떨굴 수는 있다'는 현직 대통령조차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정책에 잇단 제동을 걸었으나, 그 과정에서 '세종시 행정중심복합도시 계획' 등 국익에 반하는 결정에 동조한 것은 오점으로 남게 됐다.

    ◆비대위원장으로 19대 총선 승리 이끌어… 보복 낙천은 오점

    2011년 10월, 오세훈 전 서울특별시장의 사퇴로 치러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가 무소속 박원순 후보에게 패하고, 급작스런 '안철수 바람'이 일어나는 등 정계가 어수선해졌다.

    이듬해가 총선과 대선이 동시에 치러지는 '정치적 빅매치'가 벌어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박근혜 전 대통령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이해말 다시금 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보수정당의 전통적인 당색(黨色)이던 파란색을 빨간색으로 바꾸는 파격을 보였다. 당명도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변경했다.

    이러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혁신은 외견상 성공을 거두며, 19대 총선에서 맞붙은 민주통합당 한명숙 대표를 KO시켰다. 다만 이 과정에서 4년 전의 원한을 잊지 않고 친이계를 대거 '보복 낙천'한 것은, 자신의 임기 동안 집권여당 내의 분열과 반목의 씨앗을 뿌렸다는 점에서 단견으로 지목된다.

  • ▲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구속기간 연장으로 하급심 판결이 최대 내년 6월 지방선거까지 미뤄지게 됨에 따라, 자유한국당이 더 이상 출당 결정을 미룰 수 없게 됐다는 분석이다. 사진은 구속기간 연장 뒤 처음 재판정에 출석하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모습. ⓒ뉴시스 사진DB
    ▲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구속기간 연장으로 하급심 판결이 최대 내년 6월 지방선거까지 미뤄지게 됨에 따라, 자유한국당이 더 이상 출당 결정을 미룰 수 없게 됐다는 분석이다. 사진은 구속기간 연장 뒤 처음 재판정에 출석하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모습. ⓒ뉴시스 사진DB

    ◆대통령 당선일이 정치인생 '정점'… 이후 내리막

    2012년 치러진 대선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은 마침내 문재인 후보를 꺾고 헌정 사상 첫 여성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51.6%의 과반 득표인데다, 1577만3128표를 득표해 득표수로도 역대 최다 득표를 기록했다. 이날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정치인생의 정점이었다.

    '선거의 여왕' 프리미엄에 임기 중반까지 지속된 40%대의 '콘크리트 지지층'의 존재로, 정치권 일각에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3김의 사례를 넘어, 임기가 끝난 뒤까지 현실정치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 같다"는 섣부른 예측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오만과 독선이 되레 박근혜 전 대통령 정치인생의 내리막길을 불렀다.

    일부 친박(친박근혜) 세력들만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행태는 민심 뿐만 아니라 당내에서도 반발을 불렀다. 결국 집권 2년차인 2014년 7·14 전당대회에서 자신이 지원한 서청원 의원이 낙선하고 김무성 의원이 대표최고위원이 오르는 모습을 박근혜 전 대통령은 면전에서 목도해야만 했다.

    집권 3년차인 2015년에는 또다른 '멀박'인 유승민 의원이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당의 '투톱'에 대한 장악력을 잃자, '국회법 파동'으로 반격을 가해 유승민 의원을 이른바 '찍어내기'했으나 오히려 이는 당의 분열을 가속화했다.

    극심한 분열과 반목 속에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의 '막장 공천' 사태가 겹치고, 일부 친박 핵심 인사들의 '진박(眞朴) 마케팅'이 민심을 등돌리게 하면서, 집권 4년차에 치러진 지난해 총선은 새누리당의 참패로 끝났다.

    ◆헌정사상 첫 탄핵 대통령에 이어 정당사상 첫 '출당 대통령'

    박근혜 전 대통령의 정치인생은 이 총선 패배로 결정타를 맞았다. '선거의 여왕'으로서 한 번도 선거를 져본 적이 없던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서는 처음 겪는 시련이었으며, 원내 다수 의석을 야당에 넘겨줬다는 점에서 이후 탄핵으로 가는 시발점이 됐다.

    이해 말에는 이른바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면서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발의·의결되기에 이르렀다.

    지난해 12월 9일 탄핵소추안의 가결로 직무정지에 처해진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이듬해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탄핵결정으로 헌정 사상 첫 '탄핵된 대통령'으로 남게 됐다. 수모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3주 뒤인 3월 31일에는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직후 치러진 대선에서 참패한 한국당은 혼란에 빠졌다. 일부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1심 선고를 기다려 신중히 처분을 결정하자고 주장했지만, 지난달 13일 구속기간이 6개월 연장되면서 1심 판결은 언제 내려질지 기약할 수 없게 됐다.

    한국당 강효상 대변인은 3일 당사에서 열린 브리핑에서 "숙려기간을 더 갖고 1심 판결 후에 (출당)하는 게 어떠냐는 의견이 있어서 홍준표 대표는 지금까지 늦춰왔다"면서도 "구속기간이 또 연장돼서 1심 판결이 언제 이뤄질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되면 2심 판결은 지방선거까지 늦춰지게 된다"며 "이것은 한국당을 박근혜당으로 가두려는 정부·여당의 노림수이고, 프레임에 갇혀서 지방선거에서 폭주하는 정부·여당에 대항해서 싸우기가 굉장히 어렵게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지난달 20일, 한국당 윤리위는 마침내 혁신위의 제안을 받아들여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 '탈당권유'의 징계를 내렸다.

    이후 이날 최고위에서 갑론을박(甲論乙駁)이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홍준표 대표가 "지도부의 모든 의견을 수렴하고 숙고해 결정을 내리고, 그 정치적 책임은 모두 내가 지겠다"고 단언함에 따라 박근혜 전 대통령은 출당되게 됐다.

    지난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이 모두 임기 중에 여당을 자진탈당하는 수모를 겪었으나, 자진탈당이 아닌 강제출당의 형식으로 당을 떠나게 된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처음 있는 사례다.

    '선거의 여왕'으로 군림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결국 정당사상 초유의 '전직 대통령의 강제출당'이라는 형태로 20년 영욕의 정치인생에 마침표를 찍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