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겪어보지 못한 20대에 던진 메시지…"자신에 대한 개혁이 성장의 동력"
  • ▲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 사진은 그가 복당하면서 소감을 밝히는 모습이다. 그는 지난 6일 부산대학교에서 강연을 이어갔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 사진은 그가 복당하면서 소감을 밝히는 모습이다. 그는 지난 6일 부산대학교에서 강연을 이어갔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그의 정치 인생은 기구하다. 국가 최고 권력자의 최측근들이 걸었던 추락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그는 삐딱하다. 아니 삐딱했기 때문에 그런 기구한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삐딱하긴 해도 그는 진지하다. 자기는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다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거란다. 그래서 더 그랬나 보다. 최근 '강연 정치'로 행보를 시작한 유승민 의원의 언중(言中)에는 박정희와 박근혜의 냄새가 여전히 진동했다.

    유 의원은 지난달 30일 서울대학교 강연에서 재벌개혁과 중복지, 법인세 인상 등을 주장한 데 이어 지난 6일 부산대학교 강연에서는 '보수 개혁론'을 폈다.

    두 강연은 정치와 경제, 각각 다른 주제를 다루는 듯 했다. 그러나 둘 사이에 '박정희'라는 키워드를 넣으면 서로 묘하게 연결되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었다.

    그는 지난 6일 부산대학교 강연에서 보수의 나쁜 이미지를 가리켜 '기존의 있는 것을 지키려는 세력, 기득권 세력'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보수할 만한 과거가 없고 현존 질서를 수용할 수 없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미래를 위한 혁명이라고 했다. 특히 자신을 개혁하는 혁명을 강조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정확히 그랬다. 그 역시 당시 시대에 순응하기보다는 급진적 변화를 원한 사람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국가가 주도해 근대에서 벗어나 현대로 발돋움할 수 있는 경제적 발판을 만들었고, 국민에게는 '할 수 있다'는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국민 개개인에 자기 개혁의 메시지를 던진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유승민 의원에 의하면 그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단연 진보적인 인물이다.

    앞서 지난달 30일 그가 주장했던 '혁신경제'의 핵심 역시 새로운 기업들에 창업금융을 아낌없이 지원해 신생 대기업을 만들어내자는 데 있었다.

    중화학 공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해 1세대 기업가들과 경제 성장을 이룬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전략과 꼭 닮아 있다. 다만 자본과 노동력을 집중 투자했던 박정희 정부와는 달리 '새로운 요소'들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유 의원은 강연에서 장기적 안목에 따른 경제 정책을 펴기 위해 '안정적 정권'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 "한다면 4년 중임 대통령제가 좋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실 유승민 의원과 박정희 전 대통령은 좋은 인연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의 아버지인 유수호 전 의원과 박 전 대통령은 악연으로 얽혀있다. 유수호 전 의원은 박정희 정권 시절 판사복을 벗었다. 정치권에서는 유수호 전 의원의 당시 판결이 박 전 대통령에게 미움을 샀다는 말이 떠돌았다.

    그런데도 유 의원은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부터 쭉 박근혜 대통령을 따랐다. 그는 친박의 지략가로 불릴 정도로 핵심 측근이었다. 현재 박근혜 대통령이 강조하는 '창조경제'는 그가 말한 '새로운 요소'에 집중하는 것이 핵심이다. 창의를 기반으로 창조적 파괴, 궁극적으로는 문화 융성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에게서 박정희 전 대통령 같은 안정적인 고속 성장의 시대를 꿈꿨던 게 아닐까.

     

  • ▲ 유승민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을 15년 전부터 따랐지만, 원내대표가 된 이후 사이가 멀어졌다. 사진은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이 원내대표 자리에서 물러날 당시 모습.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유승민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을 15년 전부터 따랐지만, 원내대표가 된 이후 사이가 멀어졌다. 사진은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이 원내대표 자리에서 물러날 당시 모습.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집권 후 유 의원의 정치 운명은 갈렸다. 청와대 입성 후 철저히 배제된 유승민은 '청와대 얼라들'이란 말로 확실히 권력의 눈 밖에 났다. 원내대표에 있으면서 불거진 대통령과의 갈등은 그를 무소속 출마라는 사지(死地)로 이끌었다. 오랜 갈등과 반목 끝에 유승민은 고개를 숙였지만, 끝내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총선 내내 비판을 받으면서도 박근혜 대통령의 사진을 선거 사무실에 걸고 뛰었다.

    이제와 무소속 당선과 복당이 이뤄졌고, 차기 대선을 준비하는 새누리당에서 유승민 의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지난 박근혜 정권 4년간 대통령에게 바랐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유승민의 시각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의 기대에 부응했었던 걸까.

    삐딱한 유승민의 시각으로 박근혜 정부를 바라본다면, 국민을 하나로 묶어 미래먹거리를 찾아냈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을 직접 견주기는 어렵다. 박정희 대통령처럼 혁명적인 변화를 이끌었다고 평가하기도 어렵다. 박근혜 아젠다 '창조경제'가 현재 어떤 성과를 내고 있는지도 아직은 불분명하다. 향후 성공 가능성에 대한 확신도 불투명하다.

    '규제 완화로 인한 경제성장' 역시 무엇이 실현됐는지 의문부호가 늘어간다. 규제완화라는 방향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다. 되레 '단통법' 같은 강력한 시장규제 정책들이 들어섰다. 급기야는 휴대전화의 경우, 신제품보다 15개월 이상 된 오래된 휴대전화가 잘 팔리는 기현상도 목격됐다. 도서정가제의 어두운 단면을 일컫는 책통법을 비롯한 여러 신조어가 생겨났다. 창의력을 기반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경제를 이끈다는 창조경제와는 방향이 정반대인 정책들도 한편으로는 우후죽순 생겨난 셈이다.

    이 같은 엇박자 속에 '잠재성장률' 같은 지표는 일관되게 내림세다. 정치권과 상당수의 국민은 '저성장의 늪'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은 달랐다' 유승민 의원이 강연마다 지적하는 부분이다. 눈부신 경제 발전기보다 지금이 인프라와 자본 면에서 훨씬 훌륭하다. 더 이상 자본과 노동력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명확한 방향도 잡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동력을 보여주지 못해 경제를 반등시키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실망감이 서려 있다.

    지금의 한국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보다 더 많은 인재가 있고, 더 많은 자본이 있고, 더 많은 정보가 있다. 경제 전반에 충격을 던질만한 예산과 동력은 많아졌건만 새로운 동력으로 치환하는 것에는 실패했다는 설명이다.

    다만, 박 전 대통령 시절보다 동력 측면에서 후퇴한 것이 있다면 정치일 것이다. 지난 19대 국회 후반기부터 20대 국회까지, 박근혜 정부는 여야의 극한 대립 속에 의회의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했다.

    노동개혁 5법, 서비스발전기본법 등이 박근혜 정부의 핵심 정책을 지원해줄 법안들이 2년 이상 국회에서 잠을 잤다. 자신이 펴려는 정책에 대한 법률적 뒷받침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오히려 야권에 의해 '제왕적 대통령제'의 사례로 치부됐다.

    유 의원이 막강한 권력의지를 지닌 영국의 노동당을 좋은 사례로 꺼내 든 것도, '4년 중임제'와 '내각제 개헌'을 꺼내 든 것도, 이런 대목에는 공감대가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쏟아내는 그이지만 한편으로는 박 대통령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도 녹아 있었다.

    그는 여러 차례의 강연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의 밑에서 정치를 시작한 이유, 그리고 갈라서게 된 이유를 우회적으로 풀어내는 중이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 국민들에게 새로운 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거대한 충격파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역설 중이다.

    그는 이 모든 이야기를 박정희 전 대통령을 경험해보지 못한 90년대 중반에 태어난 대학생들에게 털어놨다. 박근혜 대통령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그리워한 유승민 의원의 강연이 젊은이들에게 충격을 줬을까. 앞으로 변화를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