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親朴, 박근혜를 배신한 속내…태풍의 근원지, 유승민은 왜?
  •  

    청와대와 국회 사이의 거리는 약 10km.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4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춘추관과 국회를 수시로 왕복하면서 그리 멀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최근들어 상당한 거리감이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이는 여의도 정치권에 대한 환멸과 괴리감 때문일 터다.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리는 핵안보정상회의 참석차 자리를 비웠음에도 청와대가 뒤숭숭하다. 눈 앞에서 펼쳐진 배신의 충격을 아직도 지우지 못하는 분위기가 짙다. 곳곳에서 난무한 배신의 정치. 정치권과 거리를 두는 박 대통령의 불편한 심기가 일정부분 반영된 듯 했다.

    [배신의 정치] 1순위를 꼽으라 하면, 단연 유승민 의원이 떠오른다. <편집자 주>

     

    #. 새누리당, 어제의 동지는 오늘의 적

    지난 29일 새누리당 대구시당에서 열린 선거대책위 발대식은 유승민 성토장을 방불케 했다.

    친박(親朴) 조원진 의원의 발언 내용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개혁에는 사심이 없다. 사심 없는 대통령의 개혁에 딴지를 거는 것이 북한에만 있는 줄 알았다. 필리버스터를 9박10일 동안 하는 야당만 있는 줄 알았더니, 우리 당에도 딴지를 거는 사람이 있더라. 박근혜 정권에서 원내대표를 한 사람이 모든 일마다 안다리를 걸었다. 야당이 사회적경제기본법을 해달라고 하면서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과 바꾸자고 하는데 야당이 주장하는 것을 누가 법안으로 발의했나."

    사실상 유승민 의원을 겨냥한 것이었다.

    행자부 장관을 지낸 정종섭 후보(대구 동구갑)는 유승민 의원이 박근혜 대통령의 사진(尊影) 반납을 거부하자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정종섭 후보는 "탈당할 때까지 대통령을 괴롭히다가 선거 때가 되니 박 대통령의 사진까지 내걸고 존경하듯 이야기하는 건 자기 모순"이라고 꼬집었다.

    "평소에 대통령과 각을 세우고, 대통령을 비난하고 당을 떠나지 않았느냐. 탈당한 뒤에 다시 대통령 존영을 보물처럼 대하는 이유가 도대체 앞뒤가 전혀 안 맞는 것 같다. 정치라는 것은 정말 정도(正道)로 가야된다. 유권자가 보더라도 다 앞뒤가 안맞는다는 걸 다 안다. 정당 정치가 제대로 되려면 자기 입장과 자기 철학을 분명히 하고, 정당과 맞으면 거기에서 계속 가는 거고 아니면 반대 당으로 가야 한다."
       
    유승민 의원도 한때는 친박이었다.

    막역한 동지들의 사이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것인지 생각하면 할수록 한숨만 짓게 된다.

    정치 무명이었던 유승민 의원을 발탁하고 성장할 수 있는 양분을 제공한 제1의 은인이 박근혜 대통령임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표의 추천에 의해 정치권에 입문한 유승민 의원. 2004년 비례대표 의원과 대표 비서실장 발탁, 텃밭인 대구 동구을(乙) 지역 보궐선거 지원 등 그가 초기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 박근혜 대통령의 역할은 가히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TK 지역에서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박 대통령은 유승민 의원에게 각별한 신임과 지지를 보내면서 그를 성장시켰다.

    그랬던 유승민 의원이 비박(非朴) 후보의 중심에 서서 박 대통령에 맞서고 있는 현 상황을 보면 참으로 씁쓸하고 안타깝기만 하다. 그는 이제 배신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 ▲ 2007년 7월 25일 대선 경선 당시, 박근혜 캠프 측 유승민 의원이 여의도 사무실에서 이명박 예비후보 땅 투기 관련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뉴시스
    ▲ 2007년 7월 25일 대선 경선 당시, 박근혜 캠프 측 유승민 의원이 여의도 사무실에서 이명박 예비후보 땅 투기 관련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뉴시스


     
    #. 2002년 대통령 선거, 그 후...

    이회창 후보의 낙선으로 당시 한나라당은 정권 탈환에 실패했고, 10년 야당의 가시밭길을 걷게 됐다. 2004년 한나라당은 당시 차떼기 사건 등 부패 이미지로 침몰하기 직전이었다.

    그런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당시 박근혜 대표는 대대적인 쇄신으로 한나라당을 침몰위기에서 구해냈다. 정치 무명인 유승민 의원을 비례대표로 발탁한 것도 이 때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2005년 유승민 의원을 비서실장으로 임명해 중용했다. 그에게 정치인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이 함양될 수 있도록 측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2005년 17대 국회의원 대구 동구을(乙) 보궐선거 과정에서 해당 지역과는 전혀 인연이 없었던 유승민 의원에게 기회를 부여했다.

    당시 해당 지역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정권 실세인 이강철 후보의 당선이 예상된다는 말이 나왔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동구을(乙) 지역에 상주하면서, 유승민 의원의 당선을 위해 불철주야(不撤晝夜) 경주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지원을 기다리던 많은 후보들에게 원성을 사면서도, 정권의 핵심 실세와 격돌한 유승민 의원이 승리할 수 있도록 최선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선거 과정을 지켜 본 이들은 "어떻게 남을 위해 저렇게 열심히 뛸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 ▲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와 새정치민주연합 이종걸 원내대표가 국회 본회의 장에서 손을 잡고 걷고 있는 모습. ⓒ뉴데일리 DB
    ▲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와 새정치민주연합 이종걸 원내대표가 국회 본회의 장에서 손을 잡고 걷고 있는 모습. ⓒ뉴데일리 DB

     

     

    #. 유승민, 개인정치의 서막(序幕)

    유승민 의원은 새누리당 원내대표 시절 박근혜 정부의 정책 기조를 무시하고 반대 주장을 펴면서 청와대에 큰 부담을 안겼다는 악평을 받고 있다.
     
    자신의 이념((理念)을 당 정체성과 의원들의 공감보다도 우선시하고, 심지어 집권 여당 원내대표의 역할과 직분을 망각한 채 차기 대권을 향한 개인플레이에 몰두했다는 비판이다.

    그 결과, 5개월여 원내대표 임기 동안 당-청(黨靑) 연대 정책기조는 무너졌으며 국정 운영에 있어 상당한 혼선이 초래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유승민 의원은 공무원연금 협상 과정에서 자의적 해석·합의를 밀어붙였다. 지난해 5월 12일 원내대표 취임 100일 간담회에서는 본인의 협상 재량권이 별로 없다는 언급을 남겨 파문을 일으켰다. 청와대가 실질적 협상에 관여한다는 인상을 남기게 한 계기였다.

    이러한 발언은 고스란히 깡통진보 진영의 먹이감이 됐다. 평양-전체주의 추종 세력과 깡통진보 측이 '유승민 띄우기'에 열중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여여(與與) 갈등의 판을 유승민 의원이 깐 셈이다.

    2015년 4월 8일 유승민 의원의 새누리당 교섭단체 연설은 당을 두 쪽으로 쪼개는 도화선이 됐다.

    "10년전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양극화를 말했습니다. 양극화 해소를 시대의 과제로 제시했던 그 분의 통찰을 저는 높이 평가합니다."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임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정치권은 국민 앞에 솔직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재벌 대기업은 지난날 정부의 특혜와 국민의 희생으로 오늘의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녹색성장과 4대강 사업, 그리고 창조경제를 성장의 해법이라고 자부할 수는 없습니다."

    "사회적경제는 국가도, 시장도 아닌 제3의 영역에서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경제활동으로서, 복지와 일자리에 도움이 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역사적 진화라고 생각합니다."
     
    당 지도부와 이렇다 할 협의도 없었다. 유승민 의원이 당 정체성과는 상반되는 사회주의적 이념을 강조하자 새정치민주연합이 환호했다. 다음날 제1야당 몫으로 연설을 했던 문재인 대표의 연설이 완전히 묻힐 정도였다.

    전체주의 추종 세력이나 기뻐할만 한 계급투쟁식 연설으로 인해 유승민 의원은 당내 의원들과 격한 갈등을 빚었다. 심지어 김무성 대표도 당론이 아니라며 불쾌한 내색을 감추지 못했다.

    교섭단체 대표로서의 연설은 개인의 이념과 의견을 말하는 자리가 아니다. "정부의 국정 운영에 협조하고 힘을 보태주어야 할 여당의 원내대표가 어떻게 대통령을 공격할 수 있냐"는 원성이 빗발쳤다. "집권 여당 원내대표 직분을 망각하고 차기 대권주자의 길을 추구한 개인정치"라는 비난이 나오는 이유였다.

     

  • ▲ 박근혜 대통령을 비난하며 새누리당을 탈당한 유승민 의원. ⓒ뉴데일리 DB
    ▲ 박근혜 대통령을 비난하며 새누리당을 탈당한 유승민 의원. ⓒ뉴데일리 DB

     

    #. 대한민국 헌법 제1조와 유승민의 헌법 제1조

    유승민 의원은 최근 새누리당을 탈당하면서 또 다시 헌법 조항을 언급했다.

    지난해 7월 청와대와 갈등을 빚다가 원내대표를 사퇴할 때도 유승민 의원은 헌법 조항을 들고 나왔었다.

    "저의 정치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의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지난해 7월 8일)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옵니다. 국민 권력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2항입니다. 오늘 저는 헌법에 의지한 채 저의 오랜 정든 집을 잠시 떠나려 합니다." (3월 23일)

    자신이 원내대표에서 물러났던 것은 지금의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식이다. 또한 국민으로부터 나온 권력이 아니어서 그것을 자신이 실현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무소속으로 출마를 하게 됐다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결과적으로 청와대를 겨냥한 발언이다. 사회주의적 이념을 갖고 있는 유승민 의원의 머리속에서나 나올법한 말이었다.

    깡통진보 진영에서 흔히 들먹이는 '헌법 조항'을 그럴 듯하게 포장한 화법이다. 이는 유승민 의원의 심리적 기저(基底)에 깔려 있는 '운동권 코스프레'로 요약된다.

    촛불시위 주제가로 알려진 '헌법 제1조'를 작사·작곡한 윤민석(43, 한양대 무역학과 84학번)을 떠올리게 만드는 대목이다.

  • ▲ 민주통합당 당가. ⓒ뉴데일리 DB
    ▲ 민주통합당 당가. ⓒ뉴데일리 DB

     

    윤민석은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의 당가(黨歌)를 작곡한 인물로 '헌법 제1조' 외에도 '김일성 대원수는 인류의 태양', '한민전 10대 강령' 등을 만든 운동권 가요 작곡가다.

    윤민석은 1992년 조선로동당 중부지역당 산하 단체인 애국동맹에 가입, 김일성 찬양노래를 작곡했으며 이 같은 좌익 활동으로 인해 국보법 위반으로 4차례에 걸쳐 구속됐다.

    같은 해 10월 6일 안기부 수사결과 발표를 통해 밝혀진 조선로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은 북한 노동당 서열 22위인 이선실(2000년 사망)과 함께 현재 통일운동가로 활동 중인 김낙중 등이 1995년에 공산화 통일을 이룬다는 전략 아래 펼친 건국 이래 최대 간첩사건이었다.

     

     

  • ▲ 1988년 8월 월간조선 좌담회에 참석한 유수호 의원(왼쪽)과 서울대 법대 안경환 교수. ⓒ조선닷컴 DB
    ▲ 1988년 8월 월간조선 좌담회에 참석한 유수호 의원(왼쪽)과 서울대 법대 안경환 교수. ⓒ조선닷컴 DB

     

    #. 유승민, 아버지의 그늘에 갇히다

    유승민 의원과 함께 서울대에서 학업한 동기·동문들은 평소 그의 말수가 많지 않았고 조용한 편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유승민 의원은 잘 알려졌다시피 고(故) 유수호 전 의원의 아들이다.  

    <조선pub>에 따르면, 13~14대 국회의원을 지낸 유수호 전 의원은 부산지법 부장판사로 재직하던 43세 때 판사 재임용에 탈락됐다.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주위에서는 그가 반(反) 박정희 대통령 시위를 주도한 학생을 석방시켜 정권에 밉보인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유승민 의원은 지난 2015년 월간중앙 12월호 인터뷰에서 당시 선친이 겪은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1971년 4월 27일 실시된 제7대 대선에서 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울산지역 개표 결과를 조작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부산지법 부장판사였던 아버지께서는 그해 8월 17일 조작을 주도한 당시 울산시장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습니다."

    "같은해 10월 27일엔 시위를 주도했던 부산대 총학생회장의 구속적부심에서는 그에게 석방을 허가했습니다. 증거 인멸이나 도주의 우려가 없다고 보신 거죠. 그 총학생회장이 나중 노무현 정부에서 행자부장관을 지낸 김정길 씨입니다."

    "선친께서 직접 말씀하신 적은 없지만, 아마도 그 두 사건이 재임용 탈락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제가 경북고에 갓 입학한 무렵이었는데 재임용 탈락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많이 우셨던 기억이 납니다."

    법복을 벗은 유수호 전 의원은 대구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고 대구지방변호사회 회장과 대한변협 부회장를 지냈다.

    그러던 중 유수호 전 의원은 5공 시절인 1985년 민정당 대구제1지구당 위원장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유승민 의원이 위스콘신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를 받은 직후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맞섰던 유수호 전 의원이 전두환 군부정권의 산물(産物)인 민정당에 참여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Irony) 그 자체였다.

    유수호 전 의원은 이후 13대 때 민정당으로 금배지를 달았고 14대 때는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 간판으로 당선됐다.

    갈지(之)자 정치행보가 이어졌다. 유수호 전 의원은 1992년 민자당을 탈당, 새한국당에 합류한 뒤 대선을 거치면서 국민당과 신민당으로 옮겨가며 의정활동을 이어갔다. 1995년 신민당이 자민련과 합당하면서 자민련으로 당적이 다시 바뀌었으나 이듬해 15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계를 떠나버렸다.

    유수호 전 의원의 이러한 행보는 유승민 의원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분석된다.

    운동권 트라우마와 컴플렉스가 엉키고 설킨 지금의 복잡한 심리 상태와 맞닿는 부분이다. 아버지에 대한 불만, 심리적 보상을 운동권 코스프레로 가린 내면으로 해석된다. 수퍼에고(super ego·초자아), 에고(ego·자아) 사이로 분출된 이드(id·욕구)로 요약된다. 아버지의 그늘이라는 무의식 속에 내제된 감정, 사고, 기억 등이 하나로 묶여 거친 반응을 일으키키지만 이를 가면으로 감추는 페르소나(persona)의 늪일 수도 있다.

    하(下)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