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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와 김상곤 혁신위원장이 무언가를 교감하고 있는 가운데, 사이에 낀 이종걸 원내대표가 어색한 표정으로 문재인 대표를 바라보고 있다(자료사진).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지난 18일 민주 창당 60년을 자축한 새정치민주연합 당사(黨史)에 길이 남을,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혁신위원회가 등장했다.
김상곤 혁신위원장을 우두머리로 하는 새정치연합 혁신위는 23일 마무리 기자회견을 열며 이른바 '11차 혁신안'이라는 폭탄을 당내에 터뜨렸다.
김한길·안철수·정세균·문희상·이해찬 전 대표의 실명을 일일이 거론하며 적지출마 또는 불출마·용퇴를 권고했다. 또, 실명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하급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공천 신청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며, 사실상 박지원 전 원내대표의 공천 배제를 시사했다.
과감한 인적 쇄신을 내세운 듯 하지만, 뜯어보면 친노에는 한없이 성기고 비노에게는 더없이 촘촘한 그물눈이라는 평이다.
당장 하급심 유죄 판결시 공천 배제라는 조항만 해도 친노에 해당하는 안희정 충남도지사와 주류인 설훈 의원은 해당되지 않는다. 이들은 공직선거법을 위반했지만 단서 조항에 있는 '자신의 선거운동에 해당하는 경우'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당내에는 지난 2012년 대선의 국정원 여직원 감금 사건으로 기소돼 재판받고 있는 의원들도 있다. 하지만 혁신위 정채웅 대변인은 "국정원 여직원 문제로 기소된 분들은 정치적 상황 속에서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에 아직 하급심에서 유죄 판결이 나지도 않았지만, 설령 나더라도 당연히 적용되지 않는다"고 친절하게 주석을 달았다.
이처럼 친노나 주류, 또는 당권을 위협할 우려가 없는 인사들은 빠져나갈 구멍이 산재해 있는 반면 실명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적지에 출마하라고 요구한 대상들은 하나같이 비노의 구심점이거나 문재인 대표의 당권을 잠재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인물들이다. 더욱 의아한 것은 이들이 이미 적지(敵地)에 지역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한길 전 대표는 19대 총선 후보 등록을 불과 일주일 남기고 친노 한명숙 지도부가 서울 광진갑으로 가라고 강요하자, 두 말 않고 이 지역에 출마해 당선됐다. 김한길 전 대표는 이전까지 한 번도 광진갑에서 출마한 적이 없었다. 또, 광진갑은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권택기 의원이 53.8%의 득표율로 통합민주당 임동순 후보(35.8%)에 압승을 거둔 지역이다.
정세균 전 대표는 고향인 전북 무주·진안·장수에서 내리 4선을 한 뒤, 19대 총선에서 당으로부터 이미 적지 출마 요구를 받아 서울 종로로 지역구를 옮겨 당선됐다. 이미 적지로 옮겼는데 또 어디로 옮기란 말인지 의문이다.
서울 광진갑과 종로 등은 이들이 빠져나갈 경우 오히려 새누리당에 의석을 무난히 안겨줄 수 있다는 점에서 총선 승리라는 방향과도 배치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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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보선 전 대통령은 1963년 대선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석패한 뒤, 유진산 의원 축출 시도 등 당권 장악에 열을 올린 끝에 1967년 대선에 재도전했으나, 오히려 더 큰 표 차이로 졌다. ⓒ연합뉴스 사진DB
결국 이미 적지에 지역구를 두고 있는 계파 수장들에게 새삼 다시 적지 출마를 요구한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총선을 최선을 다해 승리하는 무대로 삼기보다는 문재인 대표를 잠재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각 계파 수장들의 집단 자결의 장으로 만들겠다는 의도가 읽힌다.
당초에는 당내 대표적인 비노 중진 의원이며 문재인 대표와 각을 세우고 있는 이종걸 원내대표와 박영선 전 국민공감혁신위원장도 백의종군 대상에 포함됐다. 그러나 막판에 빠졌다. 그 이유 또한 '너무 비노만 겨냥한 것으로 보일 수 있어서'라고 알려졌다. 스스로 제 발이 저렸던 모양이다.
비노 계파의 수장들을 전부 제거하려고 시도함으로써 분열을 가속화하고, 승리할 수 있는 지역구를 패배로 뒤바꾸는 등 오히려 총선 패배를 향해 달려가는 듯한 모습의 이면에 숨은 의도는 뭘까.
이미 총선 패배를 피할 수 없다고 보고, 총선에 패배하더라도 우격다짐으로 대선에 도전하겠다는 문재인 대표의 의지가 투영된 혁신안이라는 평이다.
문재인 대표의 지극히 미흡한 리더십, 거기에 친노를 향한 국민들의 분노와 적개심으로 이미 총선에 승리하기는 어려워졌다. 총선 불출마를 공언한 뒤 내년 총선 승리를 공약으로 내걸고 2·8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문재인 대표로서는 초조하고 난처한 상황이다.
이대로 총선에서 참패하면 김한길 전 대표와 박지원 전 원내대표 등 비노 대주주들의 공격과 범친노라는 이름 하에 전략적인 동맹 관계에 있었던 정세균 전 대표의 이반(離叛), 대권 주자 교체를 노리는 안철수 전 대표의 부상 등을 피할 길이 없다.
내년 4·13 총선의 개표가 끝난 이튿날인 14일 아침 "이길 수 있는 선거를 졌다"며 깊이 고개를 숙이고 침통한 모습으로 국회를 떠나는 문재인 대표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 하다. 총선 불출마까지 한 마당이니 꼼짝없이 원외(院外) 야인(野人)이다. 더 이상 정치적 재기는 불가능하고, 김해 봉하마을로 내려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지기 노릇이나 계속하는 수밖에 없다. 곧 국민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질 것이다.
자다가도 소리를 지르고 식은땀을 흘리면서 깨어날 시나리오를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그려볼 문재인 대표로서는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결국 총선에 지더라도 대권에 도전할 수 있는 길, 당내에서 자신을 흔들 수 있는 모든 잠재적 위협 세력을 총선 전에 모두 쳐내버려야겠다는 결론에 닿았을 것이다.
150석 얻을 의석을 130석으로, 아니, 120석·100석 혹은 80석이 되더라도,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결사옹위한 채 대선 후보로 끌어올릴 핵심 친노 지지층만 데리고 가자는 데 생각이 미쳤을 것이다. 다만 이렇게 일사불란하게 홍위병을 지휘하려면 아무래도 자신이 원외에 있어서는 곤란하니, 애초의 불출마 선언을 뒤엎고 다시 원내로 재진입할 수 있도록 혁신위가 호소하고 이를 심사숙고 끝에 수락하는 형식까지 고려했다.
물론 박주선·천정배 의원과 박준영 전 전남도지사에 비노 공천 학살에 따른 이탈자들까지 가세할 '야권 신당'도 총선을 통해 상당히 세를 불릴 것이다. 그러나 대선에서는 어차피 단일화를 해야 하므로 지난 2012년 대선에서 안철수 전 대표와 협상할 때 그랬던 것처럼 '나는 절대 안 물러날테니 네가 사퇴하라'고 벼랑끝 전술로 버티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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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회창 전 총재는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분패한 뒤, 2000년 총선에서 잠재적 라이벌이 될 수 있는 계파 수장들을 전부 숙청해 민국당으로 내몰고 당권을 완전 장악한 뒤 2002년 대선에 다시 한 번 출사표를 던졌으나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격차만 더 벌어진 채 또 졌다. ⓒ연합뉴스 사진DB
4·13 총선 이후 당권을 되찾을 김한길 전 대표(또는 정세균 전 대표나 박지원 전 원내대표)가 '야권 대통합'을 위해 박주선·천정배·박준영 신당과 협상 테이블을 여는 모습을 봉하마을에 낙향한 채 TV로 지켜보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시나리오다.
문제는 이런 시나리오가 정권 교체와는 거리가 백만 광년쯤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표가 이런 우격다짐으로 대선에 다시 한 번 도전한다고 해서 당선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역사적 사례가 이를 실증한다.
민정당 윤보선 후보는 1963년 대선에서 45.1%를 득표해 공화당 박정희 후보(46.6%)에게 불과 1.5%p 차이로 분패했다.
다시 한 번 대선에 도전해야겠다고 결심한 윤보선 후보는 신민당 통합 과정에서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유진산 의원을 당에서 축출하려고 하는 등 당권 장악에 열을 올렸다. 이 결과 잠재적 라이벌을 모두 물리치고 1967년 대선에 다시 한 번 도전장을 던질 수 있었다.
하지만 윤보선 후보는 1967년 대선에서 40.9%를 얻는 데 그쳐 공화당 박정희 후보(51.4%)에게 오히려 더 큰 격차(10.5%p)로 대패하는 망신을 자초했다.
1997년 대선에서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40.3%)에게 불과 1.6%p 차이로 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38.7%)도 마찬가지 사례다.
재차 대선에 도전할 뜻을 굳힌 이회창 후보는 2000년 총선 공천을 기회 삼아 자신과 당권 및 대권을 겨룰 우려가 있는 조순 전 서울시장·이수성 전 국무총리·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신상우 국회부의장·허주 김윤환 의원 등을 표적 숙청했다.
이들을 전부 민국당으로 몰아내고 당권을 완전 장악한 이회창 후보는 원하던대로 2002년 대선에 다시 출마했으나 46.6%를 얻는 데 그쳐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48.9%)에게 또 졌다. 격차도 2.3%p 차이로 더 벌어졌다.
이미 국민이 몹쓸 후보로 판정을 내렸는데 대선과 대선 사이에 낀 총선을 기회 삼아 비주류를 내몰고 당권을 장악해 억지로 대선에 출마했던 자들의 말로가 이와 같다.
이와 같은 말로가 뻔히 눈에 보이는데도, 총선 승리와 정권 교체를 위해 친노패권주의를 청산하라는 국민과 당원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 친노 지도부의 눈치를 알아서 살피며 문재인이 원하는 바만 다 관철시켜 준 것이 바로 김상곤 혁신위다. 60년 야당사에 실로 사상 최악의 혁신위로 기록될 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