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휙 던진 장미꽃 한 송이-李承晩 대통령의 서양 부인 사랑법

    <한창 차례로 편지들을 타이핑하고 있는데
    창 밖에서 장미꽃 한 송이가 휙 날아들어 내 앞의 타자기 위에 떨어졌다.>

    프란체스카   

    *아래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8일
    李承晩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쓴 日記 중 일부이다.
    서울이 유엔군에 의하여 수복된 후 부산에서 경무대로 돌아온 대통령은
    전쟁 지도에 바빴다. 그런 가운데서 보여준 너무나 인간적인 斷面이다.  

  • ▲ 경복궁 경회루에서 기자들의 요청에 포즈를 잡은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자.
    ▲ 경복궁 경회루에서 기자들의 요청에 포즈를 잡은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자.
    나는 점심 식사 후 쉴 사이 없이 책상 앞에 앉아서
    외국으로 보낼 電文과 편지들을 타이핑하느라고 바쁜 오후를 보냈다.
    한창 차례로 편지들을 타이핑하고 있는데
    창 밖에서 장미꽃 한 송이가 휙 날아들어 내 앞의 타자기 위에 떨어졌다.

    깜짝 놀라 창밖을 내다보니 대통령이 저편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생각해보니 오늘은 우리의 결혼기념일이다.
    이 와중에도 잊지 않고 한 송이 꽃을 던져주는 대통령의 포근한 마음씨에
    나는 행복감에 젖었다.

    16년 동안의 결혼생활을 통해 대통령은 단 한 번도
    내게 돈을 주고 산 선물을 준 적이 없다.
    그러나, 한 송이 꽃이나 한 개의 사과 같은 것을 주더라도
    그때마다 방법이 신기롭고 걸맞아 나를 한없이 즐겁게 해주곤 한다.  
    결혼 당시만 해도 한국의 민족지도자가 서양여자와 결혼한다는 데 대해
    독립운동을 함께 하던 동지들이나 대통령을 지지하는 동포들의 실망과 반발이 대단했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신랑의 호주머니는 항상 비어 있었다.
    결혼비용은 모두 신부인 내가 부담했었고
    심지어 결혼반지도, 친정식구들이 알았다면 기절했겠지만 내 돈으로 샀었다.

    다만, 대통령은 언제부터인가 호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던
    녹두알만한 제주도産 진주 알 한 개를 결혼선물로 나에게 주었을 뿐이다.
    나는 그것으로 반지를 만들어서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데
    경사스런 때든지 파티에 갈 때만 이 반지를 낀다.  
  • ▲ 1934년 뉴욕에서 결혼한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여자가  하와이에 도착, 교민들의 꽃 레이를 골고 있다.
    ▲ 1934년 뉴욕에서 결혼한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여자가 하와이에 도착, 교민들의 꽃 레이를 골고 있다.
    결혼 후에도 외국여자인 나를 아내로 맞은 대통령의 어려움은 한둘이 아니었다.
    결혼 직후 하와이 교포들이 대통령을 초청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대통령의 독립운동 동지들이 대통령에게
    서양 아내는 동반하지 말고 혼자만 오라는 전보를 두 차례나 보내 왔다.
    나는 남 몰래 많이 울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때 하와이 여행에 나를 동반했다.
    하와이에 가까워지자 대통령은 배 위에서 나에게
     “아마도 이번에는 우리를 환영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지 모르지만
    다음에는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배가 하와이에 도착한 후 우리를 맞아들인 동지회에서
    3,700여명의 동포들을 불러 모아 당시의 한인 집회 사상 가장 큰 잔치가 되었다.  

    그날 이처럼 많은 동포들이 모이게 된 것은 우리 부부를 환영하는 따뜻한 마음도 있었겠지만
    서양인 신부인 나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더 컸을 것이다.
    나는 이때부터 한국인의 아내로서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내 마음 속 깊이 사랑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기파랑 발행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p186>
  • ▲ 절약과 검소의 여왕 프란체스카, 헌 옷을 깁는 바느질을 하고 있다.
    ▲ 절약과 검소의 여왕 프란체스카, 헌 옷을 깁는 바느질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