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Repatriation) - 테사 교수의 진실추적 10년KBS 파노라마 [북송], 10년 간의 추적 끝에 밝혀진 북송사업 전모 폭로
  • ▲ 테사교수, 니가타항에서.
    ▲ 테사교수, 니가타항에서.


    25년 동안,
    9만 3,340명의 재일동포가
    북한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그리고
    그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부분이 남한 출신이었던 그들은 왜 북한으로 갔을까?
    그리고 그들은 어째서 최종적으로 [귀국자] 10만이라는 숫자가 된 것일까?

    재일조선인의 북송,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 니가타항 떠나는 북송선.
    ▲ 니가타항 떠나는 북송선.

    반세기 만에 드러난 진실.
    2004년 기밀 해제된 국제적십자위원회의 북송 관련 문건들과
    현재 일본과 한국으로 돌아온 탈북 귀국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북송 사업의 실체를 밝힌다.

    [인도주의]라는 미명 하에 힘없는 자들에게 행해진
    책략과 기만, 그리고 배신의 이야기.

    KBS 1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KBS 파노라마]는
    <북송 - 테사 교수의 진실추적 10년>이란 제목으로 2회에 걸쳐
    재일조선인 북송 사업의 실체를 파헤치는 시간을 갖는다.

    호주국립대학교 아시아 역사학자, 테사 모리스-스즈키 교수와 함께
    [그 은폐된 이야기]의 진실을 추적해본다. 

  • ▲ 국제적십자사 아카이브센터(문서고).
    ▲ 국제적십자사 아카이브센터(문서고).



    <1부 책략>

    ■ 테사 모리스 교수의 추적

    호주국립대학교 태평양 아시아 역사 전문가, 테사 교수는
    재일한인에 대해 조사하던 중 흥미로운 사실을 접하게 된다.
    1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갑자기 북한으로 건너갔는데, 
    냉전 시대에 자유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 국가로의 전례 없는 대량 이주라는 점,
    또 귀국자의 98%가 남한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테사 교수는 2004년, 30년 만에 기밀 해제된 국제적십자 문건을 통해
    북송의 실체에 접근하게 된다.
    10년 간의 추적 끝에 밝혀진 북송의 전모,
    도대체 북송을 둘러싸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 국제적십자사 아카이브센터(문서고).
    ▲ 국제적십자사 아카이브센터(문서고).

    ■ 일본의 북송 프로젝트

    당시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 재일동포는 60만 명.
    일본 내 최대 소수민족을 형성하고 있던 재일한인은
    규모만큼이나 일본에게 큰 고민거리였다.
    외무성 극비문서에서는 안전 보장 문제,
    생활 보호비 지원으로 인한 재정적 부담 등
    사회 혼란의 원인으로 재일조선인을 지목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하나. 그들을 되돌려 보내는 것이다.
    한국이든 북한이든 [상관없다]고 했다.

    국제적십자사 문서고에서 발견한 서한들을 보면
    이른바 북송 이야기로 알려진 재일동포 귀국 사업이
    58년이 아닌 55년부터 시작됐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무렵 외무성 요직에 있던 이노우에 마스타로 라는 인물이
    퇴직 후 곧바로 일본적십자사 외사부장에 취임했다.
    일본 정부와 긴밀하게 협력할 수 있는 [인물]이
    귀국사업의 핵심 조직인 일본적십자로의 취임.
    우연일까.
    전략적 선택이었다면 그의 임무란 무엇이었을까.
    1955년 일본의 북송 프로젝트는
    이노우에의 취임과 함께 조금씩 그 윤곽을 드러내게 되는데...

    1959년 2월 13일.
    일본 정부는 인도적인 입장에서 희망자를 북조선으로 돌려보낸다는 내용의
    [재일조선인 북송 사업 추진]을 공식화했다.
    그런데 일본은 왜 대부분이 남한 출신이었던 재일조선인들을
    북한으로 귀국 시키려 했던 걸까?

  • ▲ 일본 정부, 일본적십자사.
    ▲ 일본 정부, 일본적십자사.

    ■ 재일동포들 [갈 곳을 잃다]

    어머니는 충청남도, 아버지는 경상남도
    어머니 고향은 경상남도 창원 아버지는 경상남도 통영

    이상하게도 북한으로 건너간 재일조선인의 대부분은 남한 출신이었다.
    그렇다면 왜 고향인 남한이 아닌 북한으로 갔을까?
    북한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던 걸까? 

    재일동포들은 가난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으로 국적이 상실되자
    사회적 권리를 박탈당하면서 생활이 더더욱 어려워졌다.
    뒤이어 일본 정부가 재일조선인에 대한 생활 보호비 지원금을 대폭 삭감하자
    그야말로 생존의 위기에 처했다.
    [탈출구]가 간절했다.
    하지만 고향인 남한으로는 돌아갈 수가 없었다.
    전쟁이 휩쓸고 간 터전은 엉망진창이 되었고, 일자리를 구하기도 쉽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한국 정부가 재일 동포들을 잠재적 불순분자로 여기며
    귀국을 받아주지 않았다.
    전쟁 난민에,
    국제 난민까지 돼버린 재일동포들.
    어디로 가야하나.

    이러한 가운데..
    단 하나의 이유.
    [생존]을 위해 북송을 희망하는 이들이 있었다.
    오무라 수용소에 억류돼있던 97명과 북한에 보내달라고 천막 농성을 벌이던 47명.
    극소수였다.
    당시 남한이 아닌 북한으로 가야겠다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고,
    귀국 운동의 조짐조차 감지되지 않을 때였다.
    그런데 어째서 소수였던 북송 희망자가 최종 귀국자 수가 10만 명이 되었을까?

  • ▲ 니가타항 배웅하는 사람들.
    ▲ 니가타항 배웅하는 사람들.

    ■ 국제적십자사, 어떻게 귀국사업에 발을 들여놓게 됐을까

    일본 정부는 조선인 수만 명을 배제함으로써,
    안전 보장 문제와 예산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고 싶어 한다.

    인도적 배려는 없다.

       - 국제적십자위원회 특별 사절단이 작성한 보고서 中

    북송 문제를 둘러싸고 외교 전쟁이 격화되고 있었다.
    북한과 일본의 은밀한 북송 프로젝트 추진에
    남한 정부가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선 가운데
    기밀 문건에 따르면
    국제적십자는 귀국 사업을 정치적 사안이라 판단하고,
    개입을 꺼려하고 있었는데...
    1956년 12월 12일.
    국제적십자사는 재일한인의 송환 사업에 참여할 용의가 있음을 밝혀왔다.
    어떻게 국제적십자사가 스스로 정치적 문제라고 판단 내린
    [귀국 사업]에 개입하게 된 것일까? 

    인도주의에 헌신하는 조직인 국제적십자의 개입.
    그것은 일본 정부의 히든카드였다.
    북송 이 한국 정부의 분노를 살 것을 계산해
    사업의 주체가 국제적십자로 비춰질 수 있도록
    사업 대행과 정치적 중개자 역할 수행을 요청한 것이다.
    물론 일본이 국제적십자에게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결코 외면해서 안 될 사안이라는 명분을 끊임없이 만들어 보여주면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다.
    국제적십자.
    가장 비정치적인 조직이지만
    그렇기에 정치적으로 이용하기에는 용이했던 것이다.
    일본은 재일조선인들을 사실상 내쫓기 위해
    점점 더 집요하게 국제적십자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강력히 반발하고 나선 한국 정부.
    [대량 귀국]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던 북한 정부.
    귀국 움직임이 없던 재일조선인들.
    이 장벽들을 극복하기 위한 일본 정부의 책략 카드들...
    [국제적십자, 생활 보호비 삭감,,]

    귀국 사업,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북송 문제]를 심층 해부한 테사 교수의 [진실 추적기],
    KBS 파노라마 <북송>은 오는 5~6일 밤 10시 KBS 1TV에서 방송된다.  

  • ▲ 일본 국제적십자 본사 앞 천막 농성.
    ▲ 일본 국제적십자 본사 앞 천막 농성.

    [사진 제공 = KBS 홍보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