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담한 상처를 아름다움으로 씻기 위하여
  • 치유에 목마른 상한 마음들


  • 아름다운 감성은 가장 아름답지 못한 상황에서 의지적으로 느끼려 할 때 특히 더 아름답다.
    최근 10년 간 한국인들에게 가장 많이 팔린 클래직 음반 순위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1위에 오른 라프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과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1번을 필자는 고등학교 시절 처음 접했다. 때는 가난했던 휴전 직후, 자유당 정권의 횡포가 서서히 강도(强度)를 높이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친구와 함께 뮤직홀에 들어서자 장엄하고도 처절한(?) 아름다움이 귀를 때렸다.

    처절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감미로운 아름다움은 결코 아니지만 그러나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렇게밖엔 표현할 길이 없다. 아름답지 못한 상황에서일 수록 더욱 아름다운 것을 희구한다고 할 경우의 치열한 정화(淨化)의지 같은 것.

    3위에 오른 베토벤의 첼로 명곡집 로맨스는 대학 시절의 낭만기(浪漫期)에 특히 좋아했다.

    ‘침통한 베토벤’이 아니라, ‘너무나 여린 베토벤’의 거의 소녀 같은 서정(抒情)이 묻어나는 ‘애수(哀愁) 어린 아름다움’이었다.
    1950년대의 우울한 청춘이 깜깜한 사막을 헤매다가 “이건 아니야, 나는 아름다움에 목마른 아름다운 청춘이야!”라며 토해내는 흐느낌 같은 것이었다.

    5위에 오른 ‘겨울 여행'에서는 청아하면서도 강한 내공(內攻) 같은 것을 느꼈다.
    강두식 선생님의 독일어 시간에 시(詩)로 된 ’겨울 여행‘의 몇 대목을 읽은 적이 있다.
    그리고 특히 선친이 좋아하셨다는 이야기도 들은 바 있어 요즘도 기일(忌日)이면 그 곡을 제례가 시작되기 전의 서곡(序曲)처럼 틀어놓곤 한다. 들으시라고. 그래서 이제는 모진 생애의 악몽에서 깨어나 다시 젊은 날의 아름다운 ’겨울 나그네‘ 속으로 되돌아가시라고.

    7위에 오른 비발디의 4계는 유신시절이 극에 달했을 때 자주 들었다.
    극복하고 싶었기에 더 기를 쓰고 그 아름다운 음(音)을 거실 가득이 볼륨 높게 채웠다.
    꽝꽝 소리가 울리도록. 아름다움만이 나를 지키는 길임을, 그것만이 내가 거머쥘 유일한 동아줄임을 느끼면서. 훗날 영화 ‘타이타닉’을 봤을 때 악사들이 침몰 직전까지 현악 4중주를 연주하는 장면에서 “아, 그 때 내 심정이 저랬지” 하고 되돌아 봤다.

    너무나 참담하다.
    엉덩이, 알몸, GRAB, 툭, 호텔방, 국가 급(級) 도피, 진실공방...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위로를 필요로 한다.

    아파도 상한 마음을 치유하면서 아파야 한다.
    다친 마음을 아름다움으로 씻고 어루만져야 한다.
    사실관계 규명과는 별개의 차원에서.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 전 조선일보 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