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몰표=민주 줏대"라는 황석영의 그 찬란한 혀놀림...돈 떨어졌나?
  • “90% 몰표=민주주의 줏대”라는 황석영의 ‘멘붕’
     
    - 박준영 전남지사, “90% 몰표는 충동적 투표”
     
    오 윤 환


    민주당 소속 박준영 전남지사는 이렇게 말했다.
    민주당 문재인 후보에 대한 '호남 몰표'(광주 92.0%, 전남 89.3%, 전북 86.3%)는 “무겁지 못한, 충동적 투표”라고 평가했다.

  • 반면, 소설가 황석영은 이렇게 말했다.

    “호남에서 90% 이상 나온 것은 한국의 민주화 중심이 호남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박 지사는 또 이렇게 말했다.

    "우리(호남)도 무거워져야 한다.
    감정에 휩쓸리거나 충동적으로 투표하면, 전국과 다른 판단을 하게 된다.
    호남인 스스로 정치를 잘못했다고 평가한 세력(문재인 후보)에 그렇게 (몰표) 한 것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8일 광주 MBC라디오 '시선집중 광주'에 출연해 그같이 말했다.

    그는 ”'대선 이후 호남 고립이 우려된다. 호남인 스스로 멘붕 상태“라는 질문자의 지적에 "시-도민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고 냉정하게 답했다.

    황석영의 말은 계속된다.

    “호남이야말로 백척간두의 민주주의 위기에서 줏대를 지켜왔다.”
    '문재인 후보에게 보낸 90% 몰표가 민주주의를 지킨 줏대'
    라는 뉴앙스다.

    “호남은 피해를 당한 지역이지만 지역과 상관없는 부산 사람을 두 번이나 지지했다”는 말도 했다.
    ‘호남’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90% 몰표가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박 지사는 "우리(호남)도 무거워져야 한다. 감정에 휩쓸리거나 충동적으로 투표하면, 전국과 다른 판단을 하게 된다"고 타 지역과 더불어 사는 문제에 천착했지만, 황씨는 “수백 명이 떼죽음을 당해도 살아온 것처럼 삶은 계속되고 더 씩씩하게 살면 된다” ‘민주주의 줏대’에 매달렸다.

    박 지사는 박근혜 정부 출범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했다.

    "선진국으로 도약할 기회를 가졌다.
    차분하게 국가를 경영한다면 선진국이 될 좋은 기회가 온다.
    단결해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기회를 잘 활용하면 선진국이 될 것이다."


    반면 황씨는 일종의 저주로 들릴 듯한 주장을 했다.

    "박근혜 당선인이 성공하길 바란다.
    그러나 품질(실력)이 낮은 B급 인사들로는 공약을 지키기 힘들어 출범 1년 반이면 국민적 저항이 생겨날 것이다."

    황씨는 대선에서 반 박근혜 후보 진영에 섰다.
    반 박근혜가 아니라 아예 맨발로 문재인 후보 당선을 위해 뛰어 나갔다.
    영화감독 정지영·송해성, 화가 임옥상, 승려 명진 등 102명과 함께 `유권자 연대운동 제안자들’이라는 명의로 성명을 배포, 문재인-안철수 후보단일화를 촉구하고, “지금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한 화두는 정권을 바꾸는 일”이라고  문재인 후보 당선에 온몸을 던졌다.

    황석영.
    누구인가? 

    그는 1989년 무단 방북해 김일성 정권으로부터 `25만 달러’라는 거금을 받아 4년동안 북한과 미국 , 독일 등을 떠돌며 대한민국을 배신한 사람이다.
    그는 1993년 제발로 귀국해 국가보안법상의 잠입탈출과 금품수수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1998년 까지 복역했다.
    그를 사면한 김대중 정권이 아니었다면, 2000년, 세기가 바뀔 때까지 감방에 있었어야 했다.

    그리곤 조용히 글만 쓰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극적인 반전이 나온다. 


  • 김일성을 만나 25만 달러를 받은 그가 중앙아시아 순방에 나선 이명박 대통령의 대통령 전용기에 동승한 것이다.

    ‘화려한 외출’에 스스로도 감격했을까?
    그의 ‘오버’가 터져나온다, 


  • 그는 대통령 전용기에서 기자들과 만나 “`광주사태’같은 사건이 우리에게만 있는 줄 알았더니 영국에도, 프랑스에도 있었고, 때가 되면 다 있는 거더라”고 했다.
    “때가 되면 다 있는거”의 예로 “70년대 영국 대처정부가 시위 군중에 발포해 30~40명의 광부가 죽었다”는 것을 들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광부 폭동’과 동렬에 놓은 것이다.
    그가 “호남이야말로 백척간두의 민주주의 위기에서 줏대를 지켜왔다”고 한 것은 광주민주화운동을 말한 것일 것이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광주사태’고, 그 ‘광주사태‘는 “영국에도, 프랑스에도 있었고, 때가 되면 다 있는 거”에 불과한 것이란다. 

    여기까지는 그가 대통령 전용기에 몸을 실은 ‘감격’에 겨워 나온 것 쯤으로 치부하자.
    VIP 대접에 겨워서인지 “큰 틀에서 (이명박 정부에) 동참해서 가도록 노력하겠다”는 말까지 그의 입에서 나왔으니. 



  • 그런데 그는 대통령 전용기에서 내리고 이명박 정부 임기가 끝나가자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민주정부 10년의 업적이 역진(逆進)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큰 틀에서 동참해서 가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던 이명박 정부 등에 “'칵'하고 침을 뱉은 것"이다.

    참으로 놀랍다.
    MB 정부에 등을 돌린 것은 그렇다 치자.
    광주민주화운동을 “영국에도, 프랑스에도 있었고, 때가 되면 다 있는 거”라고 했다가, “백척간두의 민주주의 위기에서 줏대를 지켜왔다”고 찬양하는 [정신적 역진]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민주정부 10년의 업적이 역진했다"가 아니라 “1989년 밀입북과 김일성 달러 수수 이래 24년 동안 황석영의 정신이 역진 또 역진한 것"은 아닐까?

    백보 양보해서 호남의 ‘90% 몰표’에 대한 박준영 지사나 황씨의 언급이 모두 ‘호남 사랑’에서 나왔다고 치자.

    그래도 남는 것은 ‘90% 몰표’를 놓고 누가 더 호남의 앞날, 호남의 자식들을 위해 고민하고 성찰했을까? 라는 물음이다.

    “(호남 90% 몰표는) 무겁지 못하고, 충동적”이라는 평가와, “호남에서 90% 이상 지지는 민주화 중심이 호남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는 주장 중 어떤 것이 더 진취적일까? 

    국민 누구도 공감하지 않는 ‘민주화’라는 구호에 함몰된 황씨의 역진이 호남의 미래를 위해 옳은 판단일까?

    ‘민주화의 중심이 호남’이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 호남은 앞으로도 90%의 몰표를 던져야 하는 것일까?

    더 가관은 민주당이다.
    박준영 지사가 어렵게 꺼낸 ‘90% 몰표’에 대한 ‘성찰’에 “민주당 소속 광역단체장이란 분이 호남의 선택을 잘못이라고 규정하며 몰아붙일 수 있는지 믿을 수 없다"고 배신감을 표출한 것이다.

    웃기는 것은 민주당과 전남북·광주 시도당이 박 지사를 비난하는 논평을 내면서 ”박 지사의 시각이 옳고 그름을 떠나 너무나 충격적이다“고 한 것이다.
    박 지사 시각이 옳을 수도 있음을 시인한 셈이다.

    그러면서도 "그 발언을 하게 된 배경이 무엇이며 그 저의가 과연 무엇인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둬들이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박 지사가 박근혜 정부 초대 총리로 거명되는 것을 지적한 것이고, 박 지사가 총리자리가 탐나 호남을 매도했다는 뜻이다.

    호남을 위해. 자라나는, 앞으로 태어날 호남의 자식들을 위해 박준영 지사같은 ‘냉정함’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황석영의 역진]과 [민주당의 역진][호남의 역진](逆進)이 되지 않기만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한마디 더해야겠다.
    박 지사가 호남을 위해 ‘90% 몰표’를 냉정하게 비판하고 박근혜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가 된다면, 그 것 또한 호남을 위해 박수칠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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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 오가며 단물 빼먹는 화려한 행각

    '느슨한 연방제' 주장하는 황석영의 실체

    "MB정부 중도실용"→"기자가 그렇게 써"..'기자 탓'
    '민노당 비판'→"내 말 잘못 전달"..역시 '기자 탓'

    양원석 뉴데일리 기자

     

  •  

    "(현 정부에) 큰 틀에서 동참해 가도록 노력하겠다. (진보 측으로부터) 욕먹을 각오가 돼 있다.
    일각에서 현 정권을 보수우익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나 스스로는 중도실용 정권이라고 한다.
    이 대통령이 중도적 생각을 뚜렷하게 갖고 있는 것으로 나는 봤다.
    "
       - 2009년 5월13일 <한국일보>
         황석영 “MB정권 중도적 생각 뚜렷, 욕먹을 각오로 큰 틀서 동참”
         이명박 대통령의 중앙아시아 순방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이 대통령과 생각이 같은 부분이 있다.
    (나는) 지난 2005년부터 중도론을 얘기한 사람.
    "
       - 2009년 5월 13일 <연합뉴스>
          황석영 "진보, 고전적 이론 틀로는 안돼"


    "내 의도가 잘못 전달됐다.
    (중략) 진보에서 욕먹고, 보수에서 욕먹고….
    내 말이 잘못 전달된 점이 많다.
    "
       - 2009년 5월 15일 <한겨레신문>
          황석영 “막힌 남북관계 풀려는 뜻…나는 변하지 않았다”


    "제가 이명박 정부를 중도실용이라고 한 것은 이 정부가 말 그대로 중도실용을 구현하기를 바라는 강력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 2009년 5월 18일 자신의 블로그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기자들이 MB 정권이 중도실용이라고 보느냐고 묻길래 ‘지켜봅시다. 공약이었으니까’라고 한 걸 내가 마치 ‘MB=중도실용’ 도장을 찍어준 듯 썼다."
       - 2012년 10월 26일 <한국일보>
         “87년 단일화 무산 악몽 되풀이 안 돼”
         2009년 순방 당시 변절 논란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한 사람이 있다.
    본명은 황수영.
    1943년 만주 신경에서 태어나 평양을 거쳐 1947년 월남했다.

    전국을 방랑하며 사찰에서 행자생활을 하는가 하면, 해병대에 자원입대해 월남전에도 참전했다.

    어려서부터 필명을 떨쳐 19살 나이에 문단에 등단했다.
    <삼포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등의 대작을 통해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 잡았다.

    이른바 ‘깡통진보' 원로들이 모인 원탁회의의 멤버 중 한 사람으로, 올해 대선을 앞두고 안철수 전 후보를 압박해 그의 사퇴를 이끌어 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황석영.
    그는 1970년 원래 이름을 버렸다.
    개명이유에 대해 그는 ‘황수영’으로 산 지난 세월이 싫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좌파이데올로기에 심취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까지 다녀온 그는 노무현 정권 말기인 2007년 ‘보수’정권이 집권을 하면 세상이 망할 것처럼 으름장을 놓으며 젊은 세대의 투표를 압박했다.

    그로부터 1년이 조금 지난 뒤, 그는 자신이 부패정권이라고 비난했던 대통령의 해외순방길에 동행하면서 ‘현 정부를 중도실용’이라고 평가했다.

    ‘큰 틀에서 동참’하겠다며 분명한 ‘지지’의사도 나타냈다.
    대통령과 뜻이 같은 부분이 있다는 말도 했다.

    반면 자신이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했던 민주노동당에 대해서는 ‘낡은 틀로는 안 된다’고 비판하는가 하면, 영국과 프랑스 등 선진국에서도 ‘광주사태’와 같은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 "전 세계가 비정규직과 청년 실업문제에 직면해 있고 생산관계도 바뀌어 고전적 이론 틀로는 안 된다.
    좌파는 리버럴해야 하는데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억압당했던 관행이 남아 있는 것 같다.
    "
       - 2009년 5월 13일자 <한국일보> 기사 중 일부


    "한국의 진보정당이라는 민노당도 비정규직 문제나 외국인 근로자 문제까지는 못 나가고 그저 노동조합 정도에서 멈춰 있다.
    한나라당이 서울의 지지를 얻어서 전국정당의 기틀을 잡은 것은 진전.
    해외에 나가서 살면서 나는 광주사태가 우리만 있는 줄 알았다.
    70년대 영국 대처정부 당시 시위 군중에 발포해서 30-40명의 광부가 죽었고 프랑스도 마찬가지.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사회가 가는 것이고, 큰 틀에서 어떻게 가야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물밑에서 현 정부에 대한 충고와 조언을 하고 있다.
    "
       - 2009년 5월 13일자 <연합뉴스> 기사 중 일부


    그러나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진보진영에서 ‘변절자’라는 독설이 쏟아지자, 며칠 사이에 ‘내 뜻이 와전됐다’며 말을 바꾸고 곧이어 ‘현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불과 3주 만에 자신이 평가한 ‘중도실용정부’는 ‘정치적 슬로건’으로 격하됐다.   

    "내 의도가 잘못 전달됐다.
    맘 같아선 지금이라도 다 접고 조용히 글 쓰는 일로 돌아갈까 싶기도 하다.
    이번에 따라간 게 가장 큰 실수였다는 심정이 들 정도다.
    (중략)
    (1989년에) 방북했을 때랑 반응이 똑같다. 진보에서 욕먹고, 보수에서 욕먹고….

    내 말이 잘못 전달된 점이 많다."

       - 2009년 5월 15일자 <한겨레신문> 인터뷰기사 중 일부


    (중략)
    "언론은 아예 몇몇 적대적 의견을 빌려 ‘변절’이라 규정한 뒤 상업적으로 재생산하는 데 열을 올렸다.

    현 정권의 공약이었던 중도실용은 슬로건에 그쳐버리고 민주주의와 남북의 평화 협력은 실낱같던 희망조차도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
       - 2009년 6월7일 <한겨레>
         “이명박 정권 들어 남북평화 실낱 희망도 사라진 것 같다”


    심지어 나중에는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사실이 없다며 당시 논란을 모두 기자들과 언론의 탓으로 돌렸다.

    "기자들이 MB 정권이 중도실용이라고 보느냐고 묻길래 ‘지켜봅시다. 공약이었으니까’라고 한 걸 내가 마치 ‘MB=중도실용’ 도장을 찍어준 듯 썼다."
       - 위 2012년 10월 26일 <한국일보> 기사


    그의 말 바꾸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변절 논란이 뜨겁던 2009년 황석영은 자신의 블로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리면서 좌우진영 모두에게 ‘쓴소리’를 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양자택일형 옳고 그름을 따지고 밀어붙이는 데 국민적 역량을 탕진하고 있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이런 식의 이념적 정쟁으로 집권을 되풀이하게 되면 좌든 우든 준비되지 않은 정부와 정책의 간헐적인 주고받기가 계속될 뿐이고 양편이 새로운 줄세우기로 5년마다 국력을 허비하게 될 것."

       - 2009년 5월 18일 자신의 블로그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그리고 어언 3년이 흘렀다.
    그가 다시 '요설'을 들고 얼굴을 내밀었다.

    "이번에 정권교체 안 되면 차라리 프로방스(프랑스 남동부 지방)에서 가정식 백반집이나 하며 늙어가겠다.
       -2012년 10월 27일, 정치콘서트 <우리는 유권자다>에 참석해 한 발언 중 일부




  • 이분법적 정쟁의 폐해를 걱정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정권교체가 아니면 죽음’이라는 식의 훨씬 더 극단적인 칼을 꺼내든 것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신문과 방송의 정치기사에서 ‘황석영’이란 이름이 어지간한 유력 정치인의 그것보다 더 자주 오르내린 최근 몇 년 사이, 그의 신작 발표 소식은 상대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2010년에는 ‘표절’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2007년 <심청, 연꽃의 길>, <바리데기>, 2008년에는 <개밥바라기별>을 각각 발표하기도 했지만, 유독 그의 이름이 정치기사에서 자주 오르내렸던 2009년에는 이렇다 할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이 시기 그는 이명박 대통령과의 중앙아시아 순방에 이은 격렬한 변절 논란, ‘몽골+코리아 문화연대 구상’, MB정부에 대한 ‘중도실용’ 평가와 이어진 ‘지지 철회’, 사회통합위원회 위원 위촉 등 수 많은 화제를 몰고 다니면서 정치분야로 진출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황석영’의 모습은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라기보다는 ‘작가 출신’ 정치초년생에 더 가까웠다.

    MB와 함께 귀국한 뒤 3주 만에 현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그는 다시 전체주의 진영에 빨대를 꽂고 추파를 던지는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는 한동안 집필활동에만 몰두했고, 약 1년 뒤 신작 <강남몽>을 발표하면서 ‘작가’ 황석영의 귀환을 알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표절’이 문제가 됐다.
    그의 새 소설이 <신동아> 기자가 쓴 작품 상당 부분을 베꼈다는 의혹이 불거진 것이다.

    불과 1년 만에 다시 그의 이름이 신문과 방송의 주요뉴스를 장식했다.
    ‘변절’에서 ‘표절’로 한 음절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 2010년 그가 새로 출간한 <강남몽>은 서울의 강남 형성사(形成史)를 다른 작품으로, 실존하는 주먹계의 전설적 대부들과 정치인들이 이름만 약간 바뀐 채 그대로 등장한다.

    문제는 조폭인사들에 대한 소설 속 내용과 표현이 2009년 1월 <신동아> 조성식 기자가 쓴 <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문단으로 돌아온 황석영의 복귀작에 대한 ‘표절’논란은 문화계 전체에 큰 충격을 줬다.
    언론은 앞 다퉈 이 문제를 보도했다.

    특히 표절의 대상이 된 <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를 펴낸 <동아일보>와 <신동아>는 그에게 적극적인 해명을 요구했다. 

    <강남몽> 4장 ‘개와 늑대의 시간’의 상당 부분이 조성식 <신동아> 기자가 쓴 <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의 내용을 빼다 박았다.
        - 신동아 2010년 11월호

    운동선수마다 약점이 있어요.
    나는 여러 가지 운동을 했기 때문에 그 약점을 다 간파하고 그것을 공략하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중략)
    권투하는 놈은 유도로, 유도하는 놈은 씨름으로 무너뜨렸지요. 실전에서 가장 덕본 건 씨름입니다.
        - <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298쪽)

    그는 여러 가지 운동을 했기 때문에 각 부분의 약점을 잘 알고 있어서 가령 상대방이 권투하는 자세로 나오면 유도식으로, 유도하는 놈은 씨름이나 태권도로 공략했다.
       - <강남몽> 265쪽


    1인칭 화법이 3인칭으로 바뀐 것을 빼고는 표현이나 내용이 상당히 비슷하다.

    김씨는 자신이 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동안 OB파에 난자당한 친구 이석○씨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으로 이동재씨의 사무실을 급습했으나 실패했다. 김씨에 따르면, OB파와의 전쟁은 이동재씨가 이석○씨를 찌른 동생들을 김씨측에 보내 야구방망이로 맞게 함으로써 종결됐다. 얼마 후 김씨는 화해의 표시로 건달 단합 체육대회를 구상했고, 이씨도 적극 찬성했다. 그해 6월 한강 둔치에서 열린 제1회 새마을체육대회가 그것이다. 이 행사에는 유지광씨를 비롯한 주먹계 원로들과 송태준 박종석 정학모씨 등 호남주먹계의 선배 다수가 참석했다. 또한 구속된 조양은씨를 대신해 양은이파를 이끌던 백영○씨도 동생들을 거느리고 동참했다. 백씨에게 행사에 참여하게 된 사정을 묻자, (중략)
    동생들끼리 자꾸 싸우니 얼굴이라도 익히자는 뜻에서 마련했다는 것이다.

        - <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 156-157쪽

    강은촌은 이대권을 칼로 찌른 놈들과 박광현의 영업부장을 때린 자들을 보내어 응징을 받게 하면 없던 일로 하겠다고 통보했다. 강은촌이 부하들이 그들을 야구방망이로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팬 뒤에 말썽은 종결됐다. 강은촌은 그맘때부터 현실에 눈뜨기 시작하고 이를테면 철이 들었다. 건달들의 친목을 도모하자며 그가 제안하여 새마을축구대회를 열었는데, 자유당 시절부터 늙은 선배들과 범호남파의 일세대 상경파 주먹들이 거의가 다 왔고, 구속된 양태파의 대리인 김현수도 동생들을 이끌고 참여했다. 후배들이 서로를 몰라서 자꾸 싸우게 되니 얼굴이라도 익히자는 취지였다고 그들은 말했다.
        - <강남몽> 318-319쪽 


    <신동아>는 이밖에도,
    ▶ 홍양태(조양은)를 ‘홍깡(‘조깡’)’으로 표현한 것
    ▶ 진상사파(신상사파)를 습격한 모나코호텔사건(1975년 사보이호텔사건)
    ▶ 강은촌의 오종오(오종철) 습격사건(1973년 엠파이어호텔 습격사건)
    ▲ 강은촌과 홍양태가 처음 구속되는 대목
    ▲ 양태파(양은이파)의 내분 등도,
    <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를 차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거장의 리얼리즘 소설 안에 표절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대목이 숱하게 발견되는 걸 어떻게 봐야 할까.
    작가의 의견을 듣고자 수일에 걸쳐 집 전화, 휴대전화, SMS로 접촉했으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

        - 2010년 <신동아> 11월호

    교육과학기술부가 2008년 논문 표절과 관련해 발표한 가이드라인은 여섯 단어 이상의 연쇄 표현이 일치하는 경우와 다른 사람의 창작물을 자신의 것처럼 이용하는 경우 등을 표절로 규정하고 있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강남몽>은 표절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어렵고 최소한 저작권 침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법적 논란을 떠나 당당하게 출처를 소명하는 것이 양식있는 작가의 도리.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 

        - 2010년 10월 19일 동아일보 사설 “‘강남몽 표절 시비’ 황석영씨는 답해야”


    이 표절 논란은 결국 황석영의 ‘유감’ 표명으로 마무리됐다.
    침묵하던 황석영은 논란이 확산되자 <경향신문>에 e-Mail을 보내 해명에 나섰다.

    문제로 지적된 4장 부분은 ‘신동아’ 2007년 6월호에 실린 인터뷰 내용뿐만 아니라 인터넷상에 떠있는 각종 회상자료와 인터뷰 내용 등을 참조했다 
    인터뷰를 바탕으로 근대화 기간 동안의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사실을 인용하면서 인물에 따라서 인간성을 드러낼 수 있는 장면에 조명을 가해 소설적 윤색을 했던 것.
     
       - 2010년 10월 25일 경향신문에 보낸 e-Mail 중 일부 


    그러면서도 그는 표절 의혹에 대해서는 강하게 부인했다.
    단, 출처를 밝히지 않은 것은 자신의 불찰이라고 인정했다.

    ‘강남몽’은 애초부터 다큐 소설로 설정이 돼 있었다.
    (중략)
    이것이 학술논문도 아닌 데다 반세기에 걸친 현대사의 방대한 자료를 다루고 있어서 가능하지 않았을 뿐.

    그렇다 하더라도 출처를 밝히지 못한 것은 나의 불찰.
    필요하다면 ‘신동아’의 기사를 비롯해 참고자료를 ‘강남몽’에 밝히고자 한다.
    물의가 빚어진 것은 유감이다.

        - 2010년 10월 25일 경향신문에 보낸 e-Mail 중 일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이처럼 언제든지 과감하게 말을 바꾸는 그에게 다시 기회가 열리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이른바 ‘대통합’이다.

    NL(민족해방)과 주사파(김일성 주체사상파)를 비롯한 종북주의자들은 2007년의 대선과 2008년의 총선에서 연거푸 패하면서 궁지에 몰렸다.

    이런 그들을 살려준 것이 바로 현 정부가 내세운 ‘사회통합’이었다.
    2008년 대선 패배로 힘을 잃은 좌파는 ‘사회통합’이라는 터전 속에서 다시 힘을 기를 수 있었다.

    2009년 5월 이명박 대통령의 중앙아시아 순방 당시 황석영은 ‘사회통합위원’이란 명찰을 달았다.

    그 또한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좌와 우를 오락가락 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더욱 크게 부각시켰다.

    상황은 5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박근혜 당선자는 당선과 동시에 ‘대탕평’과 ‘국민통합’을 강조하고 나섰다.

    MB의 ‘사회통합’과 박근혜 당선인의 ‘국민통합’은 이름만 다를 뿐 좌와 우를 모두 끌어안는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틀은 같다.

    우파진영 일부(뉴라이트의 안병직 교수)에서 벌이고 있는 ‘新 신간회’ 운동과 같은 ‘좌우합작’ 움직임 역시 멘붕상태의 좌파에겐 예상 밖의 호재다.

    황석영은 1989년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초청으로 방북해 당시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그는 이 사건으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황석영과 같이 왼쪽에서 오른쪽을 기웃거리다가 다시 왼쪽으로 돌아선 철새 종북주의자에게 ‘국민대통합’은 자신의 목적을 실현시킬 수 있는 다시없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미 그는 자신의 ‘종북 본성’을 고백한 사실이 있다.

    "지난해 하반기 이 대통령 쪽에서 연락이 와서 만나기 시작했다.
    특히 남북문제에서 양쪽 모두 시간낭비하면 안 된다.
    ‘몽골+2코리아’ 구상이 있는데, 내년 상반기까지 남북관계가 풀리면 북한 노동자와 남한 청년실업자들이 몽골에 가서 개척하며 여러가지 좋은 일을 할 수 있고, 그러면 ‘느슨한 연방제’도 할 수 있다고 본다.
    이 대통령도 생각이 같다고 했다.
    내년 상반기까지 한반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고 북-미 수교를 할 수 있게 하는 기회라고 봤다."
        - 2009년 5월 15일 <한겨레신문>과의 단독인터뷰 중


    그의 주장은 ‘낮은 단계의 연방제’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하는 북한의 대남전략과 표현만 다를 뿐 똑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결국 현 정부를 ‘숙주’ 삼아 종북의 힘을 키우겠다는 대담한 발상을 한 것이다.

    1989년 황석영이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와 쓴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에는 김일성 전 주석이 황석영에게 건넨 말이 나온다.

    "나는 평생 동안 사람을 많이 만나서 관상을 좀 볼 줄 압네다.
    우리 황 동무는 재간둥이요.
    그 좋은 재간을 민족을 위해 끝까지 써야 합네다.
    초기의 이광수의 재간은 얼마나 조선 청년들에게 힘이 되었소.
    나중에 그 재간을 왜놈들에게 팔아먹으니까 민족에 큰 해가 되었거든."
       - 황석영 저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282페이지


    이런 황석영이 최근 다시 언론에 나서서 "호남이 민주주의의 줏대'다"며 호남에 '빨대'를 꽂는 작업을 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