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신(維新)선포 40주년을 맞아

     

    1972년 10월17일~1979년 10월26일까지 朴正熙 대통령이
    한 일은 중화학공업 건설 등으로 한국을 선진국 진입 직전의 수준까지
    끌어올렸다는 점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서슴지 않고 一流국가를 지향할 수 있게 된 저력은 이 기간에 축적되었다.

    趙甲濟    

  •   10월17일은 유신선포(1972년)가 있은 지 40주년이 되는 날이다. 1972년 10월17일~1979년 10월26일까지 朴正熙 대통령이 한 일은 중화학공업 건설 등으로 한국을 선진국 진입 직전의 수준까지 끌어올렸다는 점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서슴지 않고 一流(일류)국가를 지향할 수 있게 된 저력은 이 기간에 축적되었다.
     
      유신체제의 구호는 '國力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였다. 국가의 기능이 강력해진다는 것은 動力(동력)이 세어진다는 뜻이며, 힘이 있으면 위기를 맞을 때 극복할 수 있다. 유신시대에 세계는 두 차례의 석유파동, 월남전에서의 미국 패배, 국제공산주의 활동의 극성,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한 닉슨 대통령 사임, 미국의 지도력 약화, 美中 화해, 이란혁명 등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 북한 정권은 이 기간에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백령도 침공 위협, 육영수 역사 암살 등 도발을 지속했다. 국내적으론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런 가운데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 韓日관계도 악화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런 국내외의 도전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중화학공업 건설, 자주국방력 건설, 중동건설 시장 진출, 예비군 강화, 새마을 운동, 의료보험 실시, 핵개발 시도, 원자력 발전소 건설, 수출제일주의 지속 등. 朴 대통령은 대한민국號의 荒天航海(황천항해)를 이끈 셈이다. 폭풍 속을 항해할 때는 선장의 지도력이 강해야 하고, 선원들의 업무태도가 긴장되어야 한다. 유신시대는 정치코스트를 최소화하고, 국가효율을 극대화한 시절이었다. 중화학공업 건설을 위하여 정치적 자유를 희생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朴 대통령 사망 이후 1년 여의 혼란을 수습하고 제5공화국을 연 全斗煥 정권도 국가능력의 강화, 정치적 자유의 통제라는 유신시대의 노선을 이어간 셈이다. 전두환 시대를 제2의 유신시절로 분류하는 이들도 있다. 1972~1988년 사이의 16년간 한국 경제는 비약적 발전을 했다. 세계 1위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이 힘이 민주화를 가능하게 하였고, 민주화를 따라온 혼란을 흡수하게 만들었다.
     
      朴 대통령은 유신 선포 직전 金鍾泌 총리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내가 좀 획기적인 체제를 구상하고 있어. 우리 나라는 선거를 잘못하면 어디를 갈지 몰라. 내가 보기에 70년대가 순탄치 않아. 없는 국력을 조직하여 효과적으로 관리해나갈 수 있는 체제로 정비가 되어야 해. 그러지 않으면 도약이 어렵겠어. 이것은 많은 반대에 부딪칠 가능성이 있지만 해놓고 보면 70년대를 잘 극복했다는 말을 들을 거야.'
     
      그는 역사의 惡役(악역)을 自任(자임)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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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공화국 관련 경제정보:
    박정희 정권 마지막 해와 전두환 정권 마지막 해의 비교표

      
       1. 1979년 1인당 GNP: 1,546 달러
       2. 1988년 1인당 GNP: 3,728 달러
       3. 1980년대 경제성장률: 연평균 10.1%로서 200여개 국가중 1위
       4. 1979년 수출 147억 달러, 수입 191억 달러, 경상수지 적자 41억5100만 달러.
       5. 1988년 수출 600억 달러, 수입 525억 달러, 경상수지 흑자 138억 달러.
       6. 1979년 국민저축률: 25%
       7. 1988년 국민저축률: 34%
       8. 1979년 도매 물가상승률: 20%, 1980년은 44%
       9. 1983-87년 도매 물가상승률: 연평균 2.7%
       10. 1988년 채권과 채무: 외채 320억 달러, 대외자산 253억 달러. 1989년에 순채무국으로 전환.
       11. 전화대수: 1982년 300만 대에서 1988년 1000만 대 돌파.
       12. 소득격차: 1980년에 지니계수가 0.39, 88년엔 0.34로 축소(수치가 낮아지면 격차가 줄었다는 뜻임).
      
          全斗煥 정권은 1980~88년 사이 세계 1위의 고도경제성장을 달성했다. 이 기간 국민소득은 2.3배로 늘었고 무역적자 구조는 무역흑자로 바뀌었다. 두 자리 수의 물가상승률은 2%대로 안정되었다. 외채도 크게 줄었고 국민저축률은 일본을 앞서는 세계최고 수준에 달했다. 1980년대 全斗煥 정부는 통신망 설치와 전자산업 육성을 국책사업으로 추진하여 1990년대의 세계적 인터넷-전자산업 강국을 예비했다.
      
       이 경제성장으로 해서 한국 사회에 중산층이 두껍게 등장했다. 1980년대 말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약70%가 되었다. 이들이 민주화의 주력부대가 되었다. 이들의 온건성향이 6·29선언으로 나타난 타협적 평화적 민주화의 엔진역할을 했다.
      
       경제성장이 만든 쿠션이 한국 사회의 바닥에 깔리는 바람에 민주화의 열풍을 견뎌냈다. 1985년 2·12 총선으로 시작된 민주화의 혼란기에 경제성장률이 피크에 달했다. 경제호황기에 민주화 시위가 절정기를 맞았다는 것은 행운의 타이밍이었다.
      
       全斗煥 대통령은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경제를 이어받아 성공적으로 이를 수습한 뒤 물가를 잡고 고도 성장과 흑자를 이룩했다. 全斗煥 대통령이 경제에 성공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정치는 상당부분 경제를 관리하는 기술이다. 경제에 성공했다는 것은 정치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경제는 성공했는데 정치는 실패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공부는 잘했는데 시험은 잘못 쳤다는 말처럼 모순이다.
      

  • ▲ (위 사진)29년 전인 1983년 10월 9일. 미얀마 양곤의 아웅산 묘소에 도착한 우리 측 각료와 수행원들이 북한의 폭탄 테러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 이들을 청와대 경호원들과 미얀마 주재 대사관 직원들이 달려가 일으키고 있다. 아래 사진은 폭탄 테러 직전 모습. 아래 사진 현장이 위 사진 현장으로 처참하게 변한 것이다. 본지는 처참한 장면이지만 당시 상황을 증언하기 위해 이 사진을 흑백으로 처리해 공개하기로 했다. /김상영씨 제공
    ▲ (위 사진)29년 전인 1983년 10월 9일. 미얀마 양곤의 아웅산 묘소에 도착한 우리 측 각료와 수행원들이 북한의 폭탄 테러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 이들을 청와대 경호원들과 미얀마 주재 대사관 직원들이 달려가 일으키고 있다. 아래 사진은 폭탄 테러 직전 모습. 아래 사진 현장이 위 사진 현장으로 처참하게 변한 것이다. 본지는 처참한 장면이지만 당시 상황을 증언하기 위해 이 사진을 흑백으로 처리해 공개하기로 했다. /김상영씨 제공

       경제 성공의 공을 전두환 대통령이 아닌 金在益 경제수석에게 모두 돌리려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金在益 씨를 잘 부린 사람이 全 전 대통령이었고, 金수석은 1983년 10월에 아웅산 테러로 타계했기 때문이다.
      
       이 경제성장은 평화적 민주화와 全대통령의 단임실천을 가능케 했다. 동시에 1988년의 서울올림픽을 뒷받침했다. 이런 호재로 安保면에서도 對北우위를 확보했다.
      
       그에게는 물론 12·12사태,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등으로 집권한 과오와 비자금 모집의 과오가 있다. 이 때문에 그는 2년간 백담사 귀양, 2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이들 과오를 한쪽으로 놓고 그 반대편에 경제적 성공과 튼튼한 안보, 그리고 단임실천 및 6·29 민주화 선언(직선제 개헌이 핵심)을 놓으면 저울은 어디로 기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