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선진화포럼 /선진화포커스 제108호>
    베풀자고? 북한은 야곱이 아니다

    배 진 영   /월간조선 기자(차장대우) 
     
      얼마 전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는 모 중앙일간지 기자 출신인 이 모 목사를 초청해 북한의 사정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이 목사는 창세기 33장에 나오는 에서와 야곱의 화해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형 에서가 동생 야곱에게 긍휼을 베풀어 무조건적 화해를 한 것처럼, 우리가 형의 입장에서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북한에 긍휼을 베풀자고, 그러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더 많이 베풀어주실 것이라고 호소했다.

      솔직히 듣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에서와 야곱의 갈등에서 원인제공자는 야곱이었다. 야곱이 끊임없이 사술을 써서 형의 장자권을 빼앗아 간 것이 원인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형의 보복이 두려웠던 동생 야곱은 20년 간의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야곱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고향으로 돌아와야 할 상황이 되자, 형의 보복이 걱정됐다. 때문에 야곱은 먼저 여러 차례에 걸쳐 종들 편에 재물을 실어 보내면서 형에게 사죄와 복종의 뜻을 표하고 화해를 애원했다. 심지어 자신의 아내와 자식은 물론, 자신의 운명까지도 형의 처분에 맡긴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사실 나는 야곱의 그런 행태가 진정성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어떻게든 형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형제가 재회했을 때 오랜 여정에 지친 동생 일행을 보면서 야곱을 향한 에서의 미움이 한 순간에 녹아버릴 수 있었던 것은 야곱의 그런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만일 야곱이 고향 땅으로 돌아오면서 형의 처지를 염탐하고 기회를 보아 형을 해하려는 뜻을 표했다면, 형이 화해하러 나왔을 때 뒤통수를 칠 생각을 가졌고 그 사실을 에서가 눈치챘다면, 고향 땅으로 돌아오면서 야곱의 가속(家屬)들이 에서의 가속들을 해쳤다면 어떠했을까?

      그래도 에서는 야곱을 너그럽게 용서할 수 있었을까? 두 형제는 그렇게 감격적으로 화해할 수 있었을까? 형의 용서를 구하기 위한 야곱의 노력은 쏙 빼놓다시피 하면서 무조건적인 화해와 용서만을 강조하는 건 사실을 왜곡하는 것 아닌가?

  • ▲ 중국 길림성에 있는 북한 주민의 움막교회.
    ▲ 중국 길림성에 있는 북한 주민의 움막교회.

    ● 야곱처럼 북한의 사과 先行되어야

      남북관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목사는 동독에 퍼주었던 서독의 사례, 대만과의 통일을 위해 일방적으로 양보한 중국의 사례를 들면서 왜 우리는 그렇게 못하느냐고 안타까워했다.

      남북한 관계가 꼬인 근본 원인은 6.25 남침에 있고, 북의 대남도발에 있으며,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에 있다.

      남북관계가 풀리려면, 야곱이 에서의 마음을 녹이려고 애썼던 만큼은 아니더라도, 북한이 최소한의 성의 표시는 해야 한다. 적어도 최근에 있었던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 씨 살해,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등에 대한 사과와 핵무기 및 미사일 개발 중지 노력 정도는 해야 한다. 그래야 북한의 진정성을 믿을 수 있다.

      이 목사는 한 북한군 병사가 휴가 때 집에 갔다가 집에 남한 쌀이 있는 걸 보고 "남조선 쌀을 먹고 우리가 어떻게 남쪽에 총을 쏘겠누?"라고 했다는 탈북자의 말을 전한다. 그래서 서해교전 때, 연평도 포격 때, 북한군이 남쪽에 총포를 안 쐈나? 북한의 모든 병사들이 그런 마음이 들 때까지 마냥 퍼주기를 해 줘야 한다는 주장이라면, 그건 너무 안이하고 무책임한 발상이다.

    ● 북한의 곤궁은 체제의 문제

      이 목사는 그날 자신이 대표로 있는 대북지원단체의 회보를 배포했다. 여기에는 북한의 절박한 식량사정, 특히 황해남북도 지역의 식량난이 소개되어 있었다.

      북한의 식량난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 시리고 분노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황해남북도의 기아 소식은 특히 속을 타게 만든다. 황해도는 북한의 곡창이다. 일제말 식량사정이 어렵던 시절에도 황해도 지역을 운행하는 열차 안에서는 찹쌀떡을 팔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말에도 식량난을 몰랐던 지역에서 지금 대량의 아사자가 나오고 있다. 김 씨 왕조 치하의 북한은 일제 때만도 못하다는 얘기다. 김일성의 항일빨치산 투쟁을 정통성의 뿌리로 여기는 북한 체제에게 이보다 더한 치욕이 어디 있을까?

     

    중국 길림성에 있는 북한 주민 움막교회.
      황해도의 기아사태에서 보듯, 오늘날 북한의 빈곤과 기아의 근본원인은 북한 체제에 있다. 우리가 마음이 너그럽지 못하고, 베풀지 못해서가 아니라는 얘기다.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적(敵)그리스도'인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가 인민들을 착취하면서 대남 적화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의 ‘퍼주기’를 비판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북한에 준 돈이 많다고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돈이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에 들어간 것을 탓하는 것이다.

      동독 정권이나 대만 정권은 최소한 상대를 절멸시키려 전쟁을 일으키거나 핵무기를 개발하지는 않았다.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의 공산당 정부는 지금의 북한 김 씨 왕조처럼 사악하고 호전적이지는 않았다.

    ● 기독교인들, 각성해야

      이 목사는 북한을 긍휼히 여기자고, 저들이 잘못해도 그대로 갚아줄 생각 말고 너그럽게 대하자고,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실 것이라고 호소했다. 베풀고 양보하는 것은 개인 간에는 미덕이다. 하지만 국가와 국가, 혹은 정치적 정통성을 놓고 대결하는 세력 간에서는, 그건 국익을 손상하는 행위, 나라의 안전과 자유를 위협하는 반역적 행위가 될 수 있다.

      공산 치하에서 가장 먼저, 가장 큰 박해를 당하는 세력 가운데 하나가 교회다. 이건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가장 안이하게 생각하는 집단이 또한 교회이기도 하다. 반공과 신앙은 둘이 아니라는 기독교인들의 각성이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