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요덕 소녀’ 가슴에 못을 박는가?
한 가지에 정신이 팔리다 보면 제 자리가 어디인지를 까맣게 잊어버리는 수가 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있는가? 우리가 서있는 ‘지금 이곳(here and now)’의 지적도(地籍圖)는 어디인가?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다. 그러나 며칠 전 채널A에 출연한 탈북 무용가 김영순 여사의 피맺힌 사연에서 우리는 ‘지금 이곳’의 실존적 정체를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지 않을까.촉망받는 최승희 문하생으로서 ‘잘 나가던’ 그녀는 어느 날 뜬금없이 군(軍) 정보기괸원의 방문을 받았다. 요해(了解) 할 것이 있다는 것이었다. “당신이 지난 30년 동안 만났던 모든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적으라는 것. 그녀는 하라는 대로 했다. 그런데... 진술내용 중에 가까운 친구 성혜림과 만난 대목이 있었다. 이게 그녀와 그 가족 전체를 지옥으로 떨어지게 한 화근이 될 줄이야.
거룩하고 위대하다는 김정일이 유부녀를 끌어다 산다는 스캔들을 ‘감히 아는 것’ 자체가 일가족의 씨를 말려야 할 대죄라는 것이었다. 그녀 뿐 아니라 그녀의 노부모, 어린 아들 딸까지 모조리 요덕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리고 장장 9년. 새벽 4시에 일어나 하루 종일 낫으로 풀을 베는 게 그들의 일과였다. 그러다가 아들이 굶어죽었다. 가마니 떼기에 둘둘 말아 갖다 묻었다. 부모들 역시 그렇게 보냈다. 9살 때 들어온 딸은 17살 때 요덕에서 나왔는데 도무지 키가 자라지 않았다.
바로 이 대목에서였다. 그녀는 오열했다. 주변 사람들도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 장면을 지켜보던 나 역시... 나는 그 또래의 내 예쁜 손녀가 생각나서였다. 그 아이만한 고사리 손 소녀가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연으로 그런 비참한 삶 아닌 죽음을 강요당했다는 이야기... 그러나 이건 소설도 영화도 옛이야기도 아니다. ‘지금 이곳’ 한반도의 생생한 실존이다. 이런 진하다 못해 송진처럼 엉겨 붙은 인간참혹의 극치를 놔두고 다른 어떤 철학, 세계관, 이론, 정책, 정견(政見)이 저 잘났다고 행세할 수 있을까?
지금의 한국정치는 이런 실존적 상황이 ‘없는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전개되고 있다.
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은 그 ‘없는 것’을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를 ‘신성모독’으로 낙인 한다. 새누리당은 그걸 ‘있는 것’으로 치던 강령을 ‘없는 것’이란 말로 바꿔버렸다. 지식인들은 “한반도 평화관리를 위해서는 그 이슈를 덮어야 한다”는 잘난 '썰'들을 풀고 있다. 그리고 대중은 무관심하다.나는 정치하는 사람들, 나라경영 하는 사람들이 그 나름의 할 일을 하는 것을 나무랄 생각은 없다.
키신저라는 사람이 일찍이 “안보는 인권에 우선한다”고 말했을 때도 어딘가 버림받은 것 같아 섭섭하게는 생각했어도 국가를 책임진 자리에서는 그럴 수박에 없는 모양이구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딱 부러지게 말로 꼭 못 박아야만 직성이 풀렸을까? 키신저의 냉혹한 현실주의는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도덕성은 물론 현실성마저 없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현실주의적 비현실주의’였던 셈이다.선언적 명제라는 게 있다. 비록 당장의 현실성은 희미해도 어떤 고매한, 그러나 아주 절실한 가치를 천명하는 게 그것이다. 북한 인권문제는 당장의 현실성은 약할지 모른다. 그러나 새누리당이 친북정당이 아닌 한에는 선언적으로라도 북한 주민의 인권참상에 대한 연민을 내거는 것으로써 자체의 정체성, 차별성, 존재이유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선언적으로라도 말이다.
그러나 박근혜 당은 그러질 않았다. 그런다고 김정은 정권이 “오, 박근혜당이 달라졌네, 그럼 상대해 주지“ 할 것 같은가? 그런다고 등 돌린 유권자들이 ’그래? 그럼 찍어 주지” 하고 마음을 되돌릴 것 같은가?
박근혜 당은 요덕수용소의 그 소녀 가슴에 못을 박음으로써, 기왕에 경계선 저 편으로 떠나버린 표는 처음부터 어림도 없지만 김영순 여사의 일대기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잃었다. 요덕 소녀로 상징되는 북녘 땅의 처참한 실존을 굳이 그렇게 딱 부러지게 ‘없는 것’으로 못 박아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것인가?
이게 무슨 ‘비현실주의적 현실주의’?류근일 /본사고문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