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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독 상업주의’의 누추함이여
두 가닥 누추한 흐름이 있다. 박희태 돈 봉투 사건으로 상징화 된 잘 나가는 쪽의 관행적 누추함, 그리고 그 누추함을 먹잇감으로 해서 살아가는 나꼼수 등 ‘모독(profanity) 상업주의’의 누추함이 그것이다.
인간사회는 그 두 누추한 흐름들만의 독무대는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사회는 마치 그런 것처럼 보인다. 그 두 흐름은 보수니 진보니 하는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다. 그러나 실은 그것들은 보수와 진보를 하수구로 쳐박는 터미네이터들을 뿐이다.
보수로 위장한 누추한 흐름을 빌미로 진보가 보수 전체를 사냥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진보 역시 그쪽 나름의 누추한 가닥으로 인해 먹칠을 당하고 있다. 보수 진보가 문제이기 전에 누추한 것이 문제라는 이야기다.
학생인권조례, 선의의 뇌물, 가카새끼, 1억 원 성형수술, 부러진 화살, 연아 안녕-인순이 개념 없다, 생물학적 완성도에 감탄, 코피 터질라, 삼보일퍽(fuck)... 이런 것들이 어딘가 한 줄에 꿰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전현직 야당 국회의원들의 국제협정(한미 FTA) 폐기 운운과 미국대사관 앞 시위도 '내키는 대로 막'에선 마찬가지다. 촛불 이래 우리 사회의 세찬 흐름이다. 인간 내부에 억제되어 있는 모독충동의 분출이다.저주(curse), 단죄(swear), 언어남용(verbal abuse), 신성모독(blasphemy)... 하는 것들이 다 비슷한 말들이다. 외설(obscenity)과 쌍욕이 따른다. 이걸 ‘우상파괴’라고 자처한다. 이게 리버럴, 진보라고 자처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교사-교수-판사-종교인계(界), 첨단매체, 안방 대중문화에까지 이런 풍조가 스며들어 있다. 도무지 항체(抗體)가 없다. 고급문화만이 치유책이지만 그런 건 말라죽은 지 오래다. 한 동안 공자님 예수님 부처님이 항생제 노릇을 했지만 이젠 내성이 워낙 강해져서 새발의 피 같다. 대책도 없고 방도도 없다.
최소한의 소극적 방법이라면? 고도(孤島)를 만들어 고급문화의 씨암탉을 지키는 수밖에. 누추함을 싫어하고 아름다움을 사모하는 사람들의 산채(山砦)와 요새라도 쌓을 수밖에. 그리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다.
고급문화는 유한(有閒)계급의 사치품이라고 일부는 말한다. 궁정귀족의 살롱 문화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다. 인간 내부에 있는 또 하나의 다른 것-인간은 어떻게 금수(禽獸)와 달라질 수 있느냐 하는, 청아(淸雅)한 것에 대한 그리움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동물만은 아니다. 동물적 속성의 무절제한 분출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스스로 돌아보는' 자질도 우리는 분명히 가지고 있다. 이걸 키우는 게 고급문화다. 세상이 아무리 막가파로 치달아도 항체의 씨암탉을 지키는 ‘유의미(有意味)한 소수’는 항상 있어 왔다. 우리사회에도 “저게 다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소수가 다 사라졌다고 비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류근일 /본사고문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