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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백제 敵對感과 韓日 적대감의 관계
신라에 대한 원한과 열등감은 그 뒤 한국인과 韓國史 전체에 대한 일본인의 시각으로 굳어져버린다.
趙甲濟
8세기 초에 일본에서 나온 正史 '日本書記'는 그 대부분이 한반도의 4국-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과 관련된 기술이다. 이 기술의 특징은 신라에 대한 매도와 백제와 가야에 대한 友好감정이다. 이 책을 읽으면 삼국을 통일한 신라를 비난하기 위하여 쓰여진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이 책은 일본의 동맹국이던 백제출신(도래인들과 遺民) 지식인들이 집필했다. 이 史官들은 母國을 멸망시켜 돌아갈 고향을 없애버린 신라에 대한 원한을 이 책에 담았다. 이 책이 쓰여질 당시 신라는 唐을 한반도에서 추방하고 당당한 독립국가를 건설한 선진강국이었다. 일본은 신라가 唐과 손잡고 일본으로 쳐들어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여 곳곳에 山城을 쌓다가 신라에 결국 굽히고 들어가 약30년간 친선외교관계를 맺는다.
이 30년간 일본은 신라와 적대관계이던 唐에는 사신을 파견하지 않고(따라서 국교단절상태) 신라에는 2~3년에 한번씩 대규모 사절단을 보낸다. 일본역사학자 이노우에 기요시(井上淸)는 '일본의 역사'(이와나미 문고)에서 이렇게 썼다.
<天武朝는 이렇게 하여 신라의 통일국가 만들기를 열심히 공부했다. 그 치세에 飛鳥淨御原朝廷(아스카기요미가하라 조정)의 율령으로 불리는 성문법이 반포되었다. 이것이 토대가 되어 천무천황으로부터 2대 후인 文武천황의 大寶元年(701년)에 大寶律令이 완성되어 실시되었다. 律은 대체로 지금의 형법에 해당하고 令은 국가조직과 행정관계법, 즉 민법과 소송법에 해당한다. 이 율령의 제정과 실시에 의하여 신라에서 배우고 당을 모범으로 삼은 法式備定의 고대 천황국가는 名實 공히 달성된 것이다>
백제계 학자들이 쓴 일본서기는 일본 국가건설의 모델이 된 신라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열등감과 위협, 그리고 원한을 느끼고 있었다. 이들이 한 일은 과거의 역사를 조작하여 신라가 倭의 속국이었다고 묘사하고 신라가 매년 倭에 조공을 바쳤다고 쓴 것이다. 일본서기는 온통 왜에 의한 신라정벌과 신라의 저자세 對日외교에 대한 기술로 채워졌다. 이 책이 그리는 신라는 배은망덕하고 비겁한 모습이다. 그럼에도 그 신라가 한반도의 주인공이 되었으니 日本書記는 자체모순에 빠진다. 그런 신라를 겁내고 그런 신라와 친해보려고 애쓴 天武天皇朝에 일본서기 편찬이 시작되었다. 백제계 일본인들은 이런 현실에 대한 불만을 역사적 환상의 조작으로 풀려고 했다. '지금은 이렇지만 왕년에는 우리가 신라를 갖고놀았다'는 식으로 자위하려는 목적에서 倭의 신라정벌 신화를 만든 것이다.
백제계 일본인들의 신라에 대한 이런 열등감과 원한은 日本書記라는 공간사를 통해서 定型化되었다. 신라에 대한 원한과 열등감은 그 뒤 한국인과 韓國史 전체에 대한 일본인의 시각으로 굳어져버린다. 이런 시각은 일본인들의 유전인자처럼 되어 상황이 바뀌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명치유신 이후 이런 신라관은 조선침략을 합리화하는 데 악용된다. 과거에도 倭가 신라를 정벌했으니 이제 우리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하는 생각의 심층심리 속에는 '우리 나라 (또는 우리 조상들의 나라)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에 복수하자'는 백제계 일본인들의 집념도 집단무의식으로 스며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일본에서 국가주의적 입장에 서서 교과서 개정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고대 일본이 한반도 도래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점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신라로부터 국가건설의 노하우를 배웠다는 점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들은 또 선사시대에 대륙과 한반도 도래인이 만든 야요이문화를 경시하고 토착성이 강한 조몬문화를 중시한다.
신라-백제 감정이 일본에서 韓日 감정으로 변화해간 과정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학자들이 韓日 양국에서 등장하고 있음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