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病'에 걸린 정치인들은 朴正熙를 보고 배워야  
     
      前職 중앙정보부 분석관이 본 朴 대통령의 애국심과 超人(초인)적인 면모
    金銀星(前 국정원 차장)    
     
     박정희 대통령 재임 時 중앙정보부 판단기획국이란 부서는 국내정보에 대한 기획, 분석, 판단을 담당했다.
    판단기획국은 대통령에게 보고할 보고서 작성, 지시에 대한 復命(복명)이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이 부서의 실무자들은 대통령의 주요 관심사항이나 업무 추진 방향을 그때 그때 알 수 있었고 대통령의 마음가짐과 통치 스타일도 파악할 수 있었다.

    금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朴 대통령 재임 시 10년 가까이 분석관이란 직책을 통하여 바라보고 느낀 박정희 대통령의 면모를 살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해 몇 가지 특징적인 사례를 간추려 보았다.

    특히 中道실리라는 현실 안주를 선택한 이명박 대통령과 이념투쟁에 휩쓸려 좌고우면하는 박근혜씨, 대통령病(병)에 걸린 여러 정치인들이 朴 대통령의 애국심과 超人(초인)적인 면모를 한 번 생각해 봤으면 한다.

    安保와 경제발전에 모든 정보역량 집중
     
    朴 대통령 당시 국내 정보 파트에서 벌이는 업무의 궁극적 목표는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에 집중되었다.
    때문에 이와 관련한 정책과제를 개발해 대통령께 보고하면서 수시로 내려오는 대통령 지시사항을 순발력 있게 복명하기란 여간 벅찬 일이 아니었다. 모든 보고서는 안보와 경제발전에 軸(축)을 두고 전개되어야 했다. 더욱이 대통령 자신이 多방면에 걸쳐 전문가적 지식을 갖고 있어 어지간한 수준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사실 197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우리의 경제력이나 군사력 모두가 뒤떨어진데다 항시 긴장상태가 유지되었기 때문에 단기간에 그들을 추월하지 않고는 경제발전에 總力(총력)을 기울일 수 없었다. 그러나 반대와 비판으로만 일관하는 정치·사회적 압력은 대통령에게 ‘보다 강력한 견인력’을 필요로 하였고 그만큼 정보 부담도 가중되었다.
     
    모든 분석관들은 국가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대통령의 모습과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가는 나라를 피부로 느낄 수 있어 비록 실무자라 하더라도 강한 사명감과 정신력으로 버텨 나갈 수 있었다. 朴 대통령에게서 풍기는 순수한 애국심과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강인한 실천력 아래 직원들도 같이 호흡하도록 만든 것이다.

    정보활용에 탁월한 솜씨 보여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정보는 국내분야만도 하루 평균 5~6건, 약 40페이지 내외가 됐다. 당시는 깨알 같은 활자로 植字(식자)를 했으므로 따져보면 엄청난 분량이었던 셈이다. 朴 대통령은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읽고 의문스런 부분은 밑줄을 긋고 깨알 같은 글씨로 “재확인”, “구체적으로 다시 보고할 것”, “나는 ~한 의견인 데 참고바람” 등의 의견을 달았다. 그러면서 날짜와 함께 ‘熙’라는 사인을 했다. 뿐만 아니라 관계 부처가 알아야 하거나 협의가 필요한 부분은 “○○부, ○○청에 통보할 것”, “00부처와 협의토록 할 것” 등으로 보고서에 지시를 附記(부기)한 후 복사분을 내려 보냈다.

    마음에 드는 보고에 대하여는 “무척 고생했음”, “잘된 보고” 라고 명시해 보고서 작성관의 사기를 올려 주었다. 믿기지 않거나 시행 가치가 있는 보고는 여러 경로를 통하여 재확인해 더 좋은 의견이 없는지를 체크하기도 했다. 따라서 적당한 보고나 허위보고는 아예 상상할 수 없었다. 또 보고된 정보를 직접 활용하지 않아 정보출처가 보호된다는 점에서 분석관은 특정인을 의식할 필요없이 자신있게 보고서를 작성할 수가 있었다.

    어떤 대통령은 “정보부에서 이러이러한 보고가 있었다”며 당사자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거나 참고하라면서 아예 보고서를 그대로 넘겨주기도 했었다. 넘겨받은 쪽은 보고자에게 항의를 했으며, 이로 인해 소위 實勢(실세)들에 관한 보고서는 작성을 기피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朴 대통령이 “농업을 망쳤다”는데 동의할 수 없어
     
    朴 대통령은 농업경제와 농민생활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었다. 이와 관련된 보고에는 여러 가지의 객관적 사례를 육하 원칙에 입각해 작성해야 하며 대책에는 학자 등 외부 전문가나 외국의 사례를 풍부하게 적시해야 했다. 그는 농민 출신답게 농업용수 개발, 녹색혁명을 통한 식량난 해소, 새마을 사업 등을 통한 농가 소득 증대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따라서 해외로부터 다수확 품종과 특이 작물 종자 확보를 위해 꾸준한 정보활동(세칭 ‘문익점 사업’이라 함)을 벌여 많은 성과를 거둔바 있다. 일부에서 朴 대통령이 산업화 과정에서 “농촌을 망쳐 놓았다”고 비판하지만 본인은 동의할 수 없다.
     
    아동 교육을 위해 연필 품질까지도 직접 확인
     
    朴 대통령은 어린 학생들부터 국산품을 사랑해야 한다며 국산 연필을 수집토록해 직접 깎아 보고 문제점을 개선토록 하였다. 당시 가장 열악했던 교사 處遇(처우)도 획기적으로 개선했으며 모든 교육이 학교가 중심이 되도록 과외금지를 철저히 준수했다. 과외금지는 공무원부터 솔선수범해야 한다고 강조해 정보부로 하여금 공직자나 부유층의 사교육 실태를 은밀히 파악토록 지시했는데 자녀 과외로 불이익을 당한 공무원도 많았다.
     
    朴 대통령은 어떤 강풍이 불어도 할 일은 하는 성격이었다. 예를 들면 釜馬(부마)사태 등으로 어지러운 시국인데도 아동 만화가 어린이 정서 교육상 문제가 많다고 해 이를 수집ㆍ보고토록 했다. 그러나 보고 당일 10ㆍ26사태가 일어나 검토도 못 한 채 세상을 떠났다.

    합의적 의사 결정 과정을 중시
     
    한가지 정책이라도 반드시 여러 개의 부처가 관련되기 마련이다. 朴 대통령은 정책 입안 과정에서부터 반드시 관련 부처 관계자들이 모여 의견을 조율토록 했다. 시행 계획에는 협의 부처와 부처별 의견을 제시해야 했다. 당시 관계기관 대책회의라는 것이 정권안보를 위한 장치라고 비판이 많았으나 대부분이 억측이다. 김영삼 정권 시에는 안기부(중앙정보부의 後身)가 정보업무를 독주한다고 해 국내 정보기관간 의견을 조율하는 데 필요한 ‘정보조정협의회’마저 폐기하였다. 이 부작용이 얼마나 심대한지는 안보관련 사건이 터질 때마다 벌어지는 부처간 엇박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더욱이 좌파정권이 들어선 이후부터는 각종 위원회가 설치돼 관련 기관의 의견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정책을 내놓아 정책에 혼선을 빚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이들 위원회들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적절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옐로페이퍼’ 제도 사회지도층 기강 잡아
     
    朴 대통령은 사회 지도층이나 기업인 등의 사생활에 매우 엄격한 자세를 요구하였다. 근검절약을 ‘제2의 경제’라 하여 생산활동 못지 않게 중시했고 가정의례 준칙을 제정해 호화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嚴禁(엄금)하였다.

    지도층의 호화생활이나 고급승용차 소유, 심지어 양담배 흡연까지도 엄격히 단속했다. 대상자의 反사회적 행위에 대하여는 문제내용을 적시하고 국민 앞에 솔선수범할 것을 권고하는 경고문을 정보부를 통해 발송, 당사자가 직접 수령토록 했다.

    일례로 휴가철에 제주행 여객기 좌석 구하기가 어려울 때, 모 재벌급 인사가 여객기를 전세 내어 가족들과 함께 제주도에 피서를 간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朴 대통령은 경고장(당시 옐로페이퍼라고 함)을 보내 기업인으로서 바른 생활자세를 가지라고 꾸짖었다.
     
    고위직 공무원을 포함한 사회지도층 인사 자제들의 병역기피에 대해선 명단과 직업을 언론에 발표하고 즉시 시정토록 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까지 언론에 공개되어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인간적 실수에는 관대해
     
    朴 대통령이 골치를 아파하는 야당의 모 의원이 미국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를 하다 여권을 포함하여 지갑까지 모두 털린 적이 있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대통령은 사람이니까 실수할 수도 있는 것이므로 해외활동에 지장을 받지 않도록 조용히 편의를 제공하라고 지시를 했다. 그러나 모 의원의 비판활동은 그대로 지속되었고 비밀은 유지되었다. 朴 대통령은 反안보적 反사회적 행위가 아닌 한 개인의 책임으로 끝낼 수 있는 문제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절대 반대했다. 만약 야권 지도층의 사생활과 취약점에 관련한 정보가 정치에 이용되었다면 좀 더 편히 政局(정국)을 운영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현 가능성 여부에 중점둬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도 실현 가능성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였다. 경제와 인물 빈곤이라는 현실을 무시하고 대책을 세우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왜’, ‘어떻게’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왜’ 해야 하는 것 못지않게 ‘어떻게’ 해야 하느냐도 중요했다. 돈과 인물이 부족한 여건을 감안해 실현 가능한 대안을 마련했기 때문에 채택만 되면 그대로 시행이 가능했다. 무리한 계획이 아니었므로 부작용도 없었다. 그는 지금 정치인들처럼 국가가 처한 현실을 무시하고 인기 정책 남발을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

    朴 대통령 정권초기 ‘굴욕외교’라는 엄청난 저항 속에서도 ‘對日 청구권 문제’를 해결한 것과 키스트(KIST) 설립을 통한 인재 발굴ㆍ육성도 그 일환이었다. 국가 장래를 위해 필요하다면 여론이나 인기에 무관하게 밀어 붙이는 성격이라 독재자라는 汚名(오명)을 뒤집어 쓰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터 직접 물색하러 다녀
     
    특히 지금의 관악구 신림동에 있는 서울대학교 校舍 敷地(교사 부지)를 개발할 때 그는 서울대를 人才(인재) 양성의 산실로 만들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당시 서울대는 단과대학들이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있었고 건물들이 모두가 낙후돼 교육ㆍ연구 활동에 많은 지장이 있었다. 그는 서울대학교를 번듯하게 지어 선진국 대학 수준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지시를 여러 번 했으며, 터를 잡기 위해 여러 곳을 물색하였다. 몇 곳을 정한 후 결정 시점에는 헬리콥터로 직접 대상처를 再확인한 후 지금의 관악으로 결정했다. 결정까지 많은 기간이 걸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일부에서는 서울대학생들이 데모를 하지 못하도록 구석에 몰아 넣는다고 오해해 서울대 통합이전 계획을 반대하기도 했으나, 朴 대통령의 집념을 꺾을 순 없었다.

    철저한 확인행정주의
     
    박대통령의 꼼꼼한 성격은 확인행정에서도 드러난다. 일단 정책이 시행단계에 이르면 그 진행 상황을 철저히 진단ㆍ독려하므로 대충이란 말이 통하지 않았다. 확인은 상급 부처로만 국한하지 않고 중앙정보부를 시켜 다시 확인토록 했다. 진행에 문제가 있을 경우에는 책임부처에 문책이 뒤따랐다. 따라서 모든 사업이 일정대로 진행되었다. ‘빨리 빨리’란 말이 아마 여기서 유래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러한 속도주의가 오늘 날 不實(부실)공사, 요행심, 한탕주의, 편의주의 등 여러가지 부작용을 초래한 원인도 되었다.

    朴正熙는 독재자인가?

    가난에 찌든 국민들과 야당의 반대 속에서도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고속도로를 만든다든지 중화학공업정책을 시행한 것 등은 朴 대통령의 미래지향적 사고와 추진력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꿈 같은 소리”라는 비판 속에서도 73년도 중화학공업기획단이 만들어지자 중앙정보부장실 등이 위치했던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19층을 비워주느라 밤새워 이사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막강했던 정보부가 청와대에서 멀어진 것이다. '권력은 지도자와의 물리적 거리와 비례한다'는 말처럼 대통령의 관심은 중화학공업에 있었지 정보부가 아니었다. 지구상에 어느 독재국가가 야당이 그 난리를 치고 市街地(시가지)는 연일 데모로 아수라장이 되는데 국가발전이 활발할 수 있었겠는가. 박정희 대통령이 이끌었던 대한민국의 국민들만 온전한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정치인들은 한정된 자원, 정치 혼란, 안보 불안 등 모든 악조건 속에서 국가의 성장동력을 어떻게 이끌어 낼지 현실을 돌아 봐야한다. 그리고 朴 대통령의 遺産(유산) 중 이어 갈 것은 승계ㆍ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朴 대통령의 애국심을 그의 소박했던 사생활과 함께 反芻(반추)해 볼 때 과연 독재자라고 간단히 치부해 버릴 수 있는 문제인지 훗날 역사가들의 객관적인 평가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