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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지성을 위한 시사교양지 [bait] 특집 /http://www.i-bait.com
격동의 60년 한국 사상과 노선의 흐름 ➍80년대 들끓었던 민주화 열기
‘북한식 사회주의’라는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다
북한의 실상이 알려진 1997년,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북한민주화운동’에 나서다
권위주의 시절, 한국 학생운동은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내는 등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발전방향을 ‘북한식 사회주의’로 설정, 결국 스스로 자멸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1997년 북한에서 엄청난 기근이 발생, 대량 탈북이 벌어지면서 북한의 실체가 드러났다.북한의 실체에 맞닥뜨린 운동권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하나는 극심한 허무와 회의에 빠지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북한의 현실을 부정하며 추종주의를 지속하는 것, 그리고마지막은 북한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다.
최홍재 남북청년행동(준) 대표는 세 번째 분류에 속한다.
“10년 동안 걸었던 길이 잘못된 길이라는 걸 깨닫고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하지만 잘못을 인정하고 고쳐나가지 않으면 북한 인민에게 더 큰 해악을 끼친다는 생각으로 다시 일어섰다”고 그는 말한다.최 대표는 지난 달 19일부터 ‘통영의 딸 구출을 위한 국민 대행진’ 중이다. 신숙자씨의 고향인 통영에서 임진각까지 668km를 걸으며 신숙자 모녀 구출운동에 시민들의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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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까지 하나 묻자, “1991년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시절, ‘방북투쟁’이란 이름으로 대학생들을 밀입북 시켰다”며 “자신의 잘못된 믿음으로 또 다른 신숙자씨를 만들 뻔 했던 사실이 너무 부끄러워 신숙자씨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걷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11월 27일 경상북도 청도를 찾았다. 9일째 도보 중인 최대표에게 1980년대, 1990년대 학생운동 변화의 흐름을 들었다.
Q. 1980년대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 제 어린 기억으로는 10•26사태(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사건)이후 혼란한 사회를 누군가 바로잡아주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반공 분위기도 여전히 강했습니다. 대학을 들어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학생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전부 ‘빨갱이’라고 생각했습니다.부모님도 대학을 가게 되더라도 절대 학생운동하지 말라며 당부하셨습니다. 언론매체에서도 운동권에 대한 부정
적인 보도가 연신 나왔죠.
Q. 그런데도 학생운동을 하셨죠.- 대학교 오리엔테이션 때 선배들이 ‘타는 목마름으로’란노래를 가르쳐주더군요. 처음엔 저도 경계를 했습니다.
‘아, 이 사람들이 운동권이구나’ 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매스컴에서 보이는 그런 모습이 아니더라고요. 친밀하면서도 시사문제에 깊이 고민하고, 사회문제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그런 비장감도 느껴졌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섞이게 됐고, 5•18광주 문제에 대한 사실들을 하나
둘 알아가면서 적극적으로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됐죠. 그러면서 정부가 발표하는 보도를 하나하나 불신하기 시작했습니다. KAL기 폭파사건(1987년 11월 29일 바그다드에서 서울
로 가던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기가 미얀마 근해에서 북한공작원에의해 공중폭파된 사건)도 그랬어요. 지금 천안함 사태를 못 믿는 운동권 학생들처럼, 당시 우리도 KAL기 폭파사건을 정
권 유지를 위해 전두환 대통령이 폭파시킨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결국 북한의 소행이라는 것이 밝혀졌지만요.
Q. 당시 학생운동은 어떤 특징이 있었습니까?- 당시의 학생운동은 크게 2가지 사상노선으로 흘러갔습니다. 맑스-레닌주의를 기본으로 소련식 사회주의를 따르는 PD계열과 김일성주의를 기본으로 북한식 사회주의를꿈꾸는 NL계열로 구분되죠. 87년 6월 항쟁 이전만 하더라도 학생운동 지도층은 반반 정도 나눠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국민을 기만하고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타도의 대상이었기에 두 계열이 손을 잡고 운동한 것입니다. 당시 정부는 혁명의 대상이었습니다.다만 그 방법에서 차이가 있었을 뿐입니다.
Q. 학생운동이 친북주의 경향을 띠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 6월 항쟁이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6월 항쟁 때 PD와NL은 서로 다른 구호를 내걸었습니다. PD는 헌법을 다시만들자는 제헌의회 주장을, NL은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했습니다. NL과 달리 PD의 구호는 시민들에게 와 닿지 않는구호였어요. 당장 정권을 교체해도 모자랄 판에 헌법을 다시 제정하자니, 쉽게 공감되기 어려웠죠. 게다가 PD는 화염병을 던지면서 시민들과 공감을 할 수 있는 운동을 벌이지 못하게 됐습니다. 반면 NL은 경찰들에게 강제로 연행되고 폭행당하는 장면을 통해 시민들에게 동정심을 얻게됩니다. 결국 6•29선언 이후 대통령 직선제가 되면서 NL세력은 힘을 얻게 됩니다.
Q. 사회주의 국가 붕괴는 학생운동 흐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겠습니다.
- 소련의 붕괴는 PD에게 치명적이었죠. 그게 결정적으로학생운동이 친북주의 경향을 띠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더이상 PD계열은 학생운동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됐어요.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의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는 사회주의 사상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소련식 사회주의가 실패한 것이고, 북한식 사회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확신을줬습니다.
Q. 북한인권 운동을 하는 많은 분들이 예전 학생운동의핵심 멤버입니다.
친북의 중심에서 반북의 중심으로 방향을 전환한 계기는 무엇입니까?- 저 같은 경우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간부를 하면서 북한에 남한 대학생(전대협과 한총련은 1989년 임수경씨 방북 이후, ‘방북투쟁’이라는 이름아래 남한 학생들을 북한으로 보냈다)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1997년-1998년도까지 재야에서 통일 운동을 주도했죠. 그러다 90년대 중후반 북한의 대량 아사 사태, 주사파의 대부인 김영환씨의 전향 그리고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망명은 저를 굉장한 공황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남북한 국민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꿈꿔왔는데, 제가 해온 일은 북한 정권 유지에 도움이 되는 일을 했던 거죠. 수많은 후배들을 친북주의 운동에 뛰어들게 만들었고, 그들을 북한에 보내북한 정권 홍보에 이용당하게도 만든 겁니다. 저는 남한사람들과 북한 사람들 모두에게 채무를 지고 있습니다.
Q. 북한인권문제에 헌신적이지 않은 과거 운동권도 많습니다.
- 1997년도를 기점으로 친북과 종북의 기준이 달라집니다. 1997년 이전에는 북한의 상황을 몰랐어요. 그러나 그 이후는 다르지요. 지금의 좌익세력은 북한의 실상이 파악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침묵하면서 남한의 정권 탈취만을 생각하고 있죠. 혹자는 말합니다. 남한 인권도 문제인데 왜 북한인권에 신경쓰냐고. 북한인권은 생사의 문제이지만, 남한인권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 제가 10여 년 간 걸었던 길이 잘못된 길이라는 것을 깨닫고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제이성을 불신하게 됐죠. 더 이상 어떤 활동도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생각했습니다. ‘지금이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고쳐나가지 않으면 오히려 더 일관성이 없다. 북한정권 유지에 기여했다는 오명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저는 당시와 지금 모두 일관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죠. 게다가 북한 인권 운동을 한다고 남한 인권 운동을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남북한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휴머니즘은 바로 제가 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 김정일 독재 정권이 무너졌을 때야 말로, 한반도에 평화가 오게 될 것입니다.김현수 기자(서울시립대 철학과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