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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기습 70주년에 즈음하여
日帝의 패망과 한국의 해방은 여기서 기약되었다.
趙甲濟
미국 시간으로 12월7일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日帝의 패망과 한국의 해방은 여기서 기약되었다. 진주만'이란 영화가 10년 전 개봉되었는데, 실제와 비교하여 보았다.
약 3시간짜리인 이 영화의 40분 정도는 진주만 기습의 실황중계 같은 장면들이다. 아주 실감 나지만 물론 과장이 많다. 주인공이 미군 전투기를 몰고 나가 일본 전폭기들을 격추시키는 장면은 가공이다. 한 관객은 이 긴 폭격장면을 보고나서는 '혹시 實戰 시간보다도 더 길었던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하와이의 오하우 섬(여기에 호놀룰루가 있다)으로부터 약200해리 떨어진 해상까지 접근했던 일본의 연합함대 공격부대는 나구모 장군이 지휘하고 있었다. 이 함대는 6척의 항공모함, 두 척의 戰艦, 두 척의 重순양함, 세 척의 잠수함, 그리고 수척의 유조선과 지원선이었다.
항공모함은, 전투기와 폭격기가 대부분인 360대의 항공기를 싣고 있었다. 여기서 발진한 제1 공격대는 183대의 폭격기와 전투기들이었다.
진주만 부근의 레이다 기지에서 한 사병은 아침 7시 교대 직전에 레이다 스크린에 나타난 큰 航跡(항적)이 진주만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 당직 장교에게 보고했다. 이 장교는 '걱정말라'고 했다. 사병은 그렇게 했다. 당직 장교는 이 항적이 캘리포니아에서 날아오고 있는 폭격기 편대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던 것이다.
이날은 일요일 아침이라 진주만 주변의 해군, 육군의 근무 상태가 풀려 있었다. 780문의 대공포 가운데 4분의 3이 근무자 없이 놀고 있었다. 총탄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대포들도 많았다.
아침 7시49분, 일본 편대는 폭격을 개시했다. 25분 이내에 진주만에 정박하고 있던 美 해군 함정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전함 아리조나는 침몰, 오클라호마호는 선체가 뒤집혔다. 캘리포니아 호는 침몰중, 다른 4척의 전함들도 중상을 입었다. 오전 9시 제2 공격대가 나타났다. 이들은 45분간 폭격을 감행했다. 이들이 공격을 끝내고 돌아가기 시작할 때 미국의 함대는 다음과 같은 피해를 당했다.
전함 8척중 4척 침몰, 나머지 4척은 대파. 구축함 세 척과 기타 군함 4척 침몰. 미군 항공기 188대 완파, 159대 대파. 대부분이 해군인 2408명이 전사했다.
일본군의 피해는 함재기 28대가 격추되었고 잠수함 한 척과 소형 잠수정 5척이 침몰했다.
미국으로서 다행이었던 것은 당시 진주만에 항공모함이 없었다는 점이다. 태평양상의 웨이크섬에 엔터프리이즈호, 미드웨이섬에 렉싱턴호, 샌디에고에 사라토가호가 있었다. 미국은 항공모함과 항공력을 온존시켜 반격할 수 있는 힘을 유지했던 것이다.
*둘리틀 편대의 무모한 도쿄 공습
영화 진주만에도 나오는 장면인데, 연합함대 나구모 부사령관은 부하들의 건의를 묵살하고 제3파의 공격을 중지시켰다. 기대했던 항공모함을 격침시키지 못한 것이 불만이었던 일본 조종사들은 공격을 계속하여 진주만의 항만 접안시설과 貯油(저유)시설을 폭격, 당분간 軍港으로 기능하지 못하도록 하자고 건의했던 것이다. 나구모 장군의 공격중지 명령은 결과적으로 다음해 미드웨이 패전의 한 원인이 된다.
영화 진주만에는 진주만 기습과 함께 둘리틀 편대의 도쿄 공습도 소개되어 있다. 주인공인 두 젊은 조종사가 이 공격에 참여하여 한 사람은 죽는 것으로 나온다. 이 영화에 나오는대로 무모한 이 공격은 美 합참이 플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허가를 얻어 감행한 것이다. 진주만 기습을 당해 자존심이 상한 국가 지도부는 좀 무리를 하더라도 도쿄를 폭격하여 국민들의 사기를 올려주기로 결정한다.
1942년 4월2일 샌 프란시스코를 떠난 항공모함 호네트 호에는 B-25 중거리 폭격기 16대가 실려 있었다. 편대장은 제임스 둘리틀 중령. 호네트호는 北대평양을 횡단하여 일본열도로 접근중이었다. 도쿄로부터 약650해리 떨어진 해상에서 호네트호는 일본 해군의 피켓함(수색 정찰함)을 발견했다. 자신의 위치가 탄로나 역습을 받을까 염려한 윌리엄 핼시 제독은 즉시로 폭격기 편대를 발진시켰다.
16대의 폭격기들이 무사히 이륙하자 호네트호는 서둘러 海域을 이탈했다. 13대는 도쿄를 폭격했고, 3대는 다른 곳을 폭격했다. 네 대는 중국으로 가서 착륙했고, 한 대는 소련으로 가서 착륙했다. 나머지 11대는 중국 상공에서 승무원들이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리면서 포기되었다. 이 기습에 참여한 80명의 미군들 가운데 살아서 본국에 돌아간 사람은 둘리틀 대령을 포함하여 71명이었다.
*미드웨이 해전의 기적
이 폭격의 효과는 미미했다. 도쿄 사람들은 사전에 경고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폭발음을 듣고도 敵機의 폭탄이라고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이 공습은 그러나 의외의 대목에서 큰 효과를 본다. 당시 일본 해군 참모본부에선 다음 번의 공격 목표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편에선 남쪽으로 가서 뉴기니아와 솔로몬 군도를 점령함으써 호주를 공격할 수 있는 기지를 확보하자고 주장했다. 다른 쪽에선 기지 확보나 점령지 확장보다는 전략적인 決戰을 원했다. 즉, 하와이 북쪽에 있는 미드웨이섬을 공격하면 미 해군의 함대 주력이 나타날 것이고 이때 괴멸적 타격을 안겨 태평양의 制海權을 확보함으로써 본토를 방어하자는 주장이었다.
둘리틀 편대의 공습으로 天皇이 사는 도쿄의 안전이 위험하다는 사실이 극적으로 드러났다. 호네트 호가 근접할 때까지 막지 못할 정도로 제해권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자연히 해군 지휘부의 결심은 미국 함대의 격멸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미드웨이 海戰의 길이 열렸다.
1942년 6월4일 오전 미드웨이 近海에서 있었던 미국과 일본의 결전에서 일본은 압도적인 우세에 있었다. 나구모 장군이 지휘하는 일본 연합함대는 4척의 항공모함과 272대의 함재기를 자랑했다. 美 해군은 호네트, 엔터프라이즈, 요크타운 등 세 척에 180대의 함재기를 가졌다.
우연이 겹치고 행운이 미국 편을 드는 바람에 일본 함대는 大勝 직전에 大敗를 당했다. 항공모함 4척이 모두 격침되었고, 함재기 250대가 파괴되었다. 미국측은 항공모함 요크타운호만 격침되고 항공기 147대를 잃었다. 이로써 일본은 태평양의 제해권을 미국에 넘겨줌으로써 守勢로 돌아섰다. 태평양 전쟁의 운명은 이날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날 해전은 오전 9시 부터 일본 함대 상공에서 시작되었는데 오전 10시가 되면 일본 함대의 일방적 승리로 귀결될 구도가 굳혀지고 있었다. 일본 함대는 미국 함재기의 공격을 잇따라 격퇴시켰던 것이다. 航母는 한 척도 파괴되지 않고 있었다. 나구모 장군은 미국측 항모들을 향해서 함재기들을 발진시켜 결정타를 먹일 준비를 명령했다. 네 척의 일본 항공모함 갑판은 이륙을 준비하는 전투기와 급유 호스, 그리고 폭탄으로 복잡하게 뒤덮여 있었다.
바로 이때 미국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에서 발진했던 37대의 폭격기 편대가 나타났던 것이다. 이 편대는 일본 항공모함을 공격하기 위해 이륙했으나 표적을 찾지 못하고 약300km나 벗어났다가 우연하게 일본 함대를 발견했던 것이다. 약 5300m 상공에서 내리 꽂힌 폭격기 편대는 불쏘시개처럼 되어 있는 일본 항공모함 갑판에다가 폭탄 세례를 퍼부었던 것이다.
*안일을 추구하다가 망하고 모험하다가 성공
무모한 것 같았던 둘리틀 편대의 공습은 미드웨이 해전이란 역사의 전환점을 만들었다. 국민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루스벨트 대통령의 결단은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기적을 부른 것이다. 진주만 공습에서 나구모 사령관의 안이한 대처(제3차 공격을 중지시킨 것)와 둘리틀 중령의 모험 뒤에 찾아온 미드웨이의 기적은 '승리는 모험하는 자의 차지'란 말을 想起시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