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동강 55일

    그 해 여름 낙동강.

    55일을 버티고 죽고, 버티고 죽고, 수 만 명이 쓰러졌다. 꽃 같은 젊음들, 꽃처럼 떨어져 간 젊음들. 총 맞은 시신들은 시퍼렇게 부어올랐다. 그 시신들을 끌어 모아 엄폐(掩蔽)할 둔덕을 쌓았다. 실탄은 동이 나고 보급도 떨어졌다.

    총도 제대로 쏠 줄 몰랐던 학도병들이었다. 설령 알았던들 실탄이라고 받은 건 달랑 세 발. 어찌 했을 것인가? 남은 땅은 손바닥 만했는데. 그것마저 잃었다면, 그래서 부산까지 밀렸다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가 과연 지금 이 세상 지도에 남아 있을까?


    국군방송에 나와 그 때를 회고 하는 노병들은 온 몸을 떨었다.

    그 때 그 땅을 잃었다면 “대한민국이 어디 있어?”라며. 곁에 서 있던 전우가 “펑‘ 소리 한 번 들리면 허공으로 날아가 나무에 걸렸다. 사흘 낯 밤을 새우며 박격포를 쏘아대던 전우는 깜빡 졸다가 포탄을 거꾸로 집어넣었다. 포신이 터지면서 온 살점이 사방에 뿌려졌다.


    대한민국이 그 때 없어지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해마다 현충일이 돌아오는 것을 아주 싫어할 사람들이 있다. 현충일을 또 하나의 휴일로만 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아무런 느낌 없이 그냥 덤덤하게 지나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날이면 온몸을 떨며 울먹이는 노병들의 ‘까닭’을 전혀 촌탁(忖度)하지도, 촌탁할 마음도 없는 사람들이 신세대의 거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정권조차도 연설 한 차례로 때우는 게 근래의 관행이었다.

    김대중의 현충일 기념사는 그나마 ‘햇볕’ 설교였다. 하필이면 그 날에. 현대사 교과서는 피카소의 ‘게르니카’로 낙동강의 전말(顚末)을 흐리고 있다. 역사를 덮자는 세력과, 역사를 드러내자는 세력의 싸움인 셈이다. 왜 역사를 덮으려 하는가? 죄 때문이다. 죄 지은 자는 죄상(罪狀)을 감추려 하니까. 그걸 드러내서 ‘민족통일’하지 말자는 거냐고 대든다.

    민족? 그렇다면 왜 애초에 같은 민족 주제에 탱크 밀고 죽이러 내려왔지?


    ‘민족’ 운운은 사기다.

    진실은 생활양식의 다름이다. 그들 식 양식(樣式)과 우리식 양식의 다름이다. 이 다름을 다르다고 말하기 위해 ‘낙동강 55일’이 있었다. 솔직하고 정직한 진실 그 자체였다. 이 진실을 진실로서 인지(認知)하는 것을 기피하는 위선, 비겁, 교활, 자기기만, 세상기만이 판치고 있다. 특히 일부 지식인계(界)에서.

      현충일-근원(根源)과 까닭을 알고 살라는 날이다.

     류근일 /본사고문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s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