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관련 기구 복귀 조건 없애고 북한 아닌 김정일 위원장 직접 초청성사 가능성은 낮으나 독일 통일도 축적된 대화속에 갑자기 왔다
  • [베를린=선종구 기자] ‘베를린 선언’이 아니라 ‘5.9 베를린 제안’쯤 될 듯 싶다. 이명박 대통령이 9일 오후(현지 시간)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의 공동기자회견에서 밝힌 내용을 두고 이른 말이다.

    이 대통령이 제안한 내용은 북한의 비핵화에 초점을 맞췄다. 그리고 이에 대한 실현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높인 방안을 북한에 던졌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이 국제 사회와 비핵화에 대해 확고히 합의한다면”이라는 이 대통령의 제안에 이 뜻이 담겨 있다. 구체적으로 날짜까지 3월 26일에서 27일이라고 밝혔다.

    베를린 제안은 한반도 비핵화에 초점

    이 대통령이 내년 봄 서울에서 열릴 비핵화 정상회의에 북한을 초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4월13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제1차 핵안보 정상회의에서 우리 나라가 제2차 개최국으로 확정되자 기자회견을 통해 관련 제안을 한 바 있다.

    "북한이 2011년, 2012년 2년 동안 6자회담을 통해 핵을 포기할 확실한 의지를 보이고 NPT(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해 합의된 사항을 따르게 된다면 기꺼이 (2차 핵안보 정상회의에) 초대할 것"이라고 밝힌 내용이다.

    지난해 회견내용과 9일 ‘베를린 제안’을 비교해보면 청와대 고위관계자가 말한 대로 “보다 진전된 비핵화 제안”임을 알 수 있다.

    지난해에는 “NPT에 가입해 합의된 사항을 따르게 된다면”이라는 전제가 확고했다. 핵 관련 국제기구에 복귀해 관련 규약을 충실히 따르라는 것이다.

    NPT 등 핵 관련 국제기구 복귀 등의 조건 없앴다

    그러나 이번 베를린 제안에서는 이 부분이 빠졌다. 그리고 전제조건도 많이 유연해졌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북한의 비핵화와 관련해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을 굳이 들먹이지 않았다. IAEA 사찰에 대해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지자 “북한이 스스로 우라늄농축계획(UEP) 문제에 대해 위반임을 인정할 것”을 주문했다.

  • ▲ 이명박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9일 오후(현지 시간) 독일 베를린 시내 총리공관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마친 뒤 악수하고 있다.ⓒ연합뉴스
    ▲ 이명박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9일 오후(현지 시간) 독일 베를린 시내 총리공관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마친 뒤 악수하고 있다.ⓒ연합뉴스

    또 “UEP를 중단, 폐기하는 것을 전제로 6자회담에 나오겠다고 하면”이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NPT 복귀와 같은 조건에 비춰보면 북한이 비핵화의 길로 들어설 문턱을 낮췄다고 볼 수 있다. 조건을 낮게 잡아 북한의 실질적인 행동을 끌어내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이 대통령은 또 이번 제안에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콕 집어 말했다. 지난해에는 ‘북한’을 초청 대상으로 명시했다. 만일 북한이 이 제안에 응했다면 김 위원장은 오지 않는다. 대신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올 것이다. 북한을 대표하는 대외 ‘얼굴마담’은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아니라 김정일 위원장을 초청했다

    이를 염두에 둔 듯 이번에 이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을 직접 거명하며 초청에 응할 것을 주문한 것이다.

    대신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이 대통령의 이번 베를린 제안이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한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문은 언제든지 열려 있지만 이번에는 ‘한반도 비핵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보다는 내년 봄 서울에서 모일 비핵화, 핵안보 50개국 정상회의에 김 위원장을 초청한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북한이 이 대통령의 베를린 제안에 실제 응할지는 미지수다. 그보다는 가능성이 낮다고 보는 것이 냉철한 판단일 것이다.

    북한은 지난해 이 대통령이 워싱턴에서 제안한 내용에 대해 여태껏 묵묵부답이다. 워싱턴 제안보다는 문턱을 낮췄다고 하더라도 핵을 볼모로 국제 세계를 서슴없이 ‘협박’하는 북한이 핵을 포기할 리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 의식한 듯 청와대 핵심 관계자도 이번 제안을 두고 “이것은 통치자의 정치적인 그리고 적극적인 메시지로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정치적 선언의 의미가 더 크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더구나 북한이 여전히 사과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포격에 대한 사과를 전제조건으로 내세운 것도 성사 가능성을 낮추고 있다.

    김 위원장이 '은둔의 제왕'인 점도 고려 대상이다. 김 위원장은 정상간 일대 일 회담에도 잘 나서지 않는다. 그런 그가 50개국 정상이 함께 하는 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북한으로서도, 김 위원장 스스로도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다.

    베를린 제안 성사 가능성은 낮다

    그렇다고 이 대통령의 베를린 제안이 아무런 의미도 담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핵이든 경협이든 남북 정상이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그 벽을 조금씩 허물어 가는 것은 그만큼 대화의 마당에 한발씩 더 들어서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반도에 핵무기를 두고는 주변국으로부터 우리의 통일을 동의 받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대통령도 베를린 지역 동포 간담회에서 “핵무기를 가지고 통일 됐을 때 이웃 나라가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며 이 점에 대해 역설했었다.

    그러나 통일은 축적된 걸음 걸음 속에 어느 날 갑자기 찾아 온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베를린 제안에 대해 무작정 냉소를 날리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한 걸음 한 걸음 힘들게 뗀 걸음이 축적돼 어느 날 통일이 우리 곁에 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독일 통일의 역사가 이를 증명해줬다.

    이 대통령은 동포간담회에서 “독일 수상은 베를린 장벽이 50년은 더 갈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로부터 10개월 뒤 장벽이 무너졌다”고 말했다.

    역사는 그렇게 우리 곁으로 오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