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운명체 같은 이집트와 북한정권 유대관계 23일 김정일 만난 이집트 휴대전화 사장도 탈출
  • 무바라크가 가면 김정일도 간다?  
     
     공동운명체 같은 이집트 정권과 김정일 정권의 기막힌 인연.
    趙甲濟  (조갑제닷컴대표) 
     
     <카이로 국제공항에서는 이집트를 빠져 나가기 위한 ‘엑소더스’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부유층과 기업인을 태운 민간 항공기 19대가 29일 카이로를 떠나 두바이 등으로 떠났다. 항공기에 탑승한 승객 중에는 이집트 통신업계 거물인 나기브 사위리스 오라스콤 회장과 호텔 재벌인 후세인 살렘 일가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동아닷컴)
     
     오라스콤 회장 사위리스는 지난 23일 訪北, 김정일을 만났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바 있다. 중앙통신은 "통신 등 우리나라 여러 분야에서 오라스콤의 투자가 성과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때 방문한 이사장(사위리스 회장)을 환영해 담화를 하신 뒤 선물을 받고 만찬도 마련하셨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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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라스콤은 2008년 12월 75%의 지분 투자로 '고려링크'를 설립, 평양에서 휴대전화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후 서비스 지역이 북한 내 12개 주요 도시와 42개 소도시로 넓어졌고 가입자수도 작년 3분기 말 현재 30만1천199명으로 전년 同期보다 400% 이상 늘어났다고 동아닷컴은 전했다.
     
     이집트를 뒤흔들고 있는 시위사태의 여러 요인중 하나가 오라스콤의 활발한 휴대전화 사업이다. 이집트엔 수천만 대의 휴대전화가 보급되었다. 젊은이들이 이 휴대전화를 이용, 시위대를 조직하였다. 오라스콤이 지금 보급하고 있는 휴대전화가 북한 청년들에 의하여 反김정일-反김정은 시위의 도구로 이용될 날이 다가오고 있다.
     
     이집트와 북한정권의 관계는 특이하다.
    1973년의 제4차 중동전쟁 때는 북한 조종사가 미그기를 몰고 이스라엘 공군과 싸웠다. 그때 이집트 공군사령관이 무바라크였다. 카이로에 있는 10월전쟁 기념관을 지어준 이도 김일성이었다. 무바라크도 북한을 네 차례 방문, 김일성을 만났다. 이집트-북한은 거의 동맹국 수준으로 가까워졌다. 이집트는 4차 중동 전쟁 직후 북한에 소련제 스커드 미사일을 주었는데, 북한은 이를 분해, 북한식 스커드를 개발, 중동에 수출하였다.
     
     뿐만 아니다. 무바라크는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사람이 많이 달라졌다는 평을 듣는다. 그는 수년 전부터 아들 가말(48세)을 후계자로 세우는 준비를 해왔다. 가말은 이집트 집권당(국민민주당)의 정책위 의장인데, 시위 사태 이전엔 올해 있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것이란 추측도 불렀다. 무바라크가 김일성이 김정일을 후계자로 세우는 과정을 연구한 것 같기도 하다.
     
     김일성을 만나고 와서 그를 본뜨려다가 나라를 망친 독재자로는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와 짐바브웨의 무가베가 있다. 무바라크도 이 科에 속하는 듯하다.  
     무바라크와 북한정권은 공동운명체 같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렇다면 무바라크가 가면 김정일도 갈 것인가?
    이집트 사태가 휴대전화라는 고속도로를 타고 중국을 거쳐 북한정권까지 뒤흔들 것인가?
    중동이 흔들리면 한반도도 요동치는 경우가 있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과 석유파동, 그리고 1979년의 이란 혁명과 제2차 석유파동은 한국의 경제와 정치를 뒤흔들었다. 朴正熙 정권을 종식시킨 10.26 사건은, 이란 사태로 인한 석유파동과 物價高가 한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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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의 강연중 발췌(2009년 NED)
     
     "북한의 탄도 미사일의 시작은 1965년에 김일성이 함흥군사학원에 개원연설을 한 것에 있습니다. 함흥군사학원은 특수 무기를 제작하는 엔지니어를 길러내는 목적으로 설립된 학교입니다. 김일성은 개원 연설에서 "조선반도에서 또 한 번의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의 제국주의와 일제가 다시 개입할 것이다. 이들의 개입을 막기 위해서는 그들의 심장을 겨눌 수 있는 로켓이 필요하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은 한국 전쟁 경험에서 적화통일에 실패했던 가장 큰 원인을 부산 교두보(아시아 태평양상의 미군기지)를 빼앗긴 것으로 봅니다. 당시 미군기지에서 신속하게 병참이나 후원부대가 들어옴으로서 북한은 부산 교두보를 빼앗겼고 이것으로 적화 통일이 실패 했다고 봅니다. 군사 전략의 ABC입니다만, 후방기지를 공격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로켓 부대를 가지겠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특히 거기에 핵과 연계된 핵미사일 부대를 갖는 것이 김일성의 원대한 야망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북한이 탄도 미사일 기술을 가질 수 있는 기회는 70년대 초반, 소련으로부터 직수입한 프로그미사일(FROG-7: 자유낙하하며 포물선을 그림) 도입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개발하며 자체생산을 할 수 있었던 기회는 중동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중동전쟁 당시에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공군과의 치열한 공중전이 벌어졌었는데, 이때 북한 조종사들이 참전해서 이스라엘 공군과 싸움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때 부터 이집트와 북한과는 혈맹의 관계가 되었고, 그러한 감사의 대가였는지 모르지만 당시에 수개의 스커드 미사일을 이집트가 북한에게 제공하게 됩니다. 북한은 스커드 미사일을 분해하여 역 엔지리어링을 통해 재설계를 하여 80년대 초반 복제품의 스커드 미사일을 개발해 냅니다. 스커드 미사일은 50년대 말 소련이 개발해낸 사정거리가 약 300km~350km 되는 미사일입니다.
     
     이것이 초기형 미사일이기 때문에 탄두 직경이 큽니다. 그 의미는 쉽게 핵탄두를 실을 수 있는 미사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미사일(스커드)을 가지고 복제 미사일을 만들었는데, 북한에게 중요한 기회가 찾아오게 됩니다. 바로 이란-이라크 전쟁 이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이라크가 이란에 대해서 무차별 탄도 미사일 공격을 가하게 됩니다. 이란은 이러한 이라크의 공격에 무방비한 상태였는데, 자신도 똑같은 미사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결국 북한을 수입처로 삼게 됩니다. 북한이 이란 이라크 전쟁에서 수백 개의 스커드 미사일을 이란에 수출하게 되고, 그 수출의 결과 많은 돈을 축적하게 됨으로써 또 한 번 북한은 미사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인프라를 만드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됩니다.

    즉 중동과의 연계관계가 그때서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이 북한의 미사일을 개발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북한은 1980년대 중반부터 스커드 미사일을 개량해서 화성5호, 6호라고 하는 미사일의 사정거리를 550km 까지 연장시킵니다. 그 의미는 북한에서 제주도까지 공격 할 수 있는 미사일을 개발한 것이고, 80년대 말부터 이 미사일들을 실전에 배치해서 현재 800기에 달하는 스커드 계열의 미사일이 한반도 전역을 공격할 수 있게 배치되어 있는 상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