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무엇이 그를 극단으로 몰고 가는지...정체성이 뭔지기존 지지층 이탈...'강경노선'에 허겁지겁 끼워맞추기 안쓰러워
  • 16년 전 참신했던 국회의원 '손학규'

    #1. 16년 전 쯤이었을거다. 당시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던 기자는 시에서 주관하는 글짓기 대회에 참가했었는데 그날 야외에서 진행된 행사에 갑자기 국회의원이 격려차 찾아왔다. 그때 그를 처음 봤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 제1야당의 얼굴이 된 손학규 대표였다.

    손 대표는 당시 광명 보궐선거에서 민자당 후보로 당선된 뒤 15~16대 총선에서 내리 광명지역에서 3선을 한 촉망받는 정치인이었다. 안면이 있던 기자의 모친을 손 대표가 알아봤고, 모친 옆에 서 있던 어린 기자의 손을 잡고는 "아이고, 똑똑하네. 공부 열심히 하세요"라며 가볍게 안아줬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손 대표는 확실히 자기 지역구를 관리 할 줄 아는 정치인이었다. 그리고 그 관리는 으레 정치인들의 번지르한 말이나 정치적 제스처가 아닌 '발로 뛰고 서민과 함께 하는 진정성'에서 나왔다고 평하고 싶다. 광명시엔 아직도 재래시장이 있는데 손 대표는 당시에도 때때로 이곳을 찾아 상인들과 인사하고 아주머니들과 담소를 나누며 특유의 '친화력'을 과시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이 동네 아주머니들은 '손학규' 얘기만 나오면 "단연 광명이 낳은 최고 정치인"이라고 추켜세우는가 하면 "한나라당에서 탈당할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라고 마치 이웃사람 일처럼 그를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개중엔 "광명이 키운 차기 대선주자, 팍팍 밀어주자"는 선거용 구호까지 외치는 자칭 '열혈 손학규 팬'들이 이곳에 널렸다.

    그가 광명을 떠나 경기도지사에 당선됐을 때 '아쉽지만 더 큰 정치무대로 나가기 위해 손학규를 밀어주자'는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는 경기도지사가 돼 대통령도 인정한 파주 LCD 공장을 비롯한 112개 업체 140억 달러(13조)의 외자유치, 영어마을의 모델이 된 안산 파주 양평 영어마을, 최초로 남북간의 벼농사 합작사업 등 참 많은 일들을 해냈다.

  • 닳은 구두뒤축...그리고 백의종군

    #2. 1년 전 쯤이었을거다. 기자는 지난 2009년 4.29 재보궐 선거서 손 대표 (당시 전 대통합민주신당 대표)의 시흥 지원유세에 동행취재를 하게 됐다. 손 대표가 18대 총선 실패 후 강원도 춘천에서 야인생활을 하던 시절이었다. 날씨도 얄궂지, 유세 중에 비가 내리는 게 아닌가.

    손 대표는 시흥시장에 출마한 자당 김윤식 후보를 지원하게 위해 시흥 장터 사이사이를 누비며 한 표를 호소했다. 선거전(戰)에서 비상이 걸린 민주당에 평당원 신분으로 내려와 그야말로 '백의종군'하겠다는 태세였다. 추적추적 내린 비에 손 대표의 머리가 다 젖을 정도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근처에서 해산물을 팔던 한 상인이 "손에서 비린내가 날 것인디..."라고 악수하길 머뭇거리자 "괜찮다"며 팔을 끌어당겨 안는 친근한 제스처도 취했다.

    지원유세를 하던 손 대표가 출출했는지 근처 어묵 집에 들러 어묵을 한입 베어 물곤 옆에 있던 기자에게 "어서 와서 하나 드시라"고 살갑게 권했다. 비 오는 장터거리에서 구두 뒤축이 다 닳도록 지원유세를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마치 16년 전 광명 재래시장을 돌며 상인들과 담소를 나눴던 신참 정치인 손학규가 떠오는 감상에 젖기도 했다.

    '닳은 구두뒤축'의 위력이었을까, 김 후보는 시흥시장에 당선됐다. 당시 정계복귀를 묻는 질문에 "아직은 때가 아니다"면서 선을 긋고 야인으로 돌아갔던 그를 보며 기자는 '더 큰 그릇이 돼 돌아올 손학규'의 모습을 내심 기대했었다.

    #3. 두 달 전 쯤이었을거다. 당 대표 경선에 출마한 당시 손 후보가 공식 출마선언을 하고, 기자실을 일일이 돌며 인사를 했다. 기자도 그와 인사를 했다.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란다"고 덕담을 건넸고, 그는 예의 웃을 때 하회탈처럼 눈꼬리가 휘어진 표정을 지으며 답례를 했다. 이것이 기자가 기억하는 손 대표와의 일화다. 

    "손학규가 변했다"
    친노(親盧)에 무릎 꿇고 "용서 받을 수 없는 결례" 운운

    요즘 손 대표에게 가장 많이 쏟아지는 공격은 '변했다'는 말일 것이다. 합리주의자이고 실용주의자였던 그의 입에서 험하고 거친 표현들이 남발되고 있다. 기자는 손 대표 측근에게 FTA에 관한 입장을 물어봤다. "독소조항 제거를 위해 재협상이 필요하다고 지금까지 대표가 밝힌 입장이 전부"라는 답이 되돌아왔다. 폐기인지 전면 재협상 뒤 비준이란 말인지, 애매한 답변이었다.

  • 하긴 배추값 폭락도, 서울시 홍수피해도 무조건 4대강 사업과 연관짓는 정당에 무슨 대안이 있겠는가. 그래도 제1야당 민주당과 손 대표가 FTA를 매개로 막연하게 정권교체 구호만 허공에 외치고 있는 건 아닌가 자문해볼 일이었다.

    손 대표는 얼마 전엔 봉하마을을 찾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 앞에 무릎을 꿇는 정치적 제스처까지 취했다. 그러면서 "지금 전개되는 정국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이 더욱 생각난다"며 "이 정권이 의회를 짓밟으니까, 민주주의를 하는 것이 쉽지 않다. 민주주의가 다 됐다고 생각했는데..."라고 통탄했다.

    대체 정권이 의회를 짓밟았다는 발상은 어디에 근거해 나온 발언인가. 검찰의 사법 행위를 '의회유린, 야당 탄압'으로 몰고 간 건 70~80년대 때 지난 정치 구호만큼이나 식상했다.

    과거 노 전 대통령을 향해 "노 대통령은 무능한 진보의 대표다. 새로운 정치의 극복대상"이라고도 했던 그였다.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이라고도 직격탄을 날렸던 그는 '원죄를 씻으려는 듯' 묘역 앞에 무릎꿇고 "인간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결례를 저질렀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래놓곤 비슷한 시기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 타계에는 조문조차 하지 않았다. "인간적 결례"로 치자면 타계에 조문조차 하지 않은 게 더 크지 않을까.

    이러니까 손 대표의 '정체성'논란이 커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민주당이 비록 '맹북(盲北)정당'이어도 그가 더 큰 차기 지도자를 꿈꾼다면 대북노선에 있어서는 확실한 기조를 세워야 한다.

    무엇이 손학규를 극단으로 몰고 가는가. 과연 지금의 손학규에겐 친노세력에 교언영색(巧言令色)하는 모습 외에 무엇이 남았는가 라고 묻고 싶다.

    FTA 합리주의자 손학규는 어디로?
    '보따리 장수'로 머물건가, '진화하는 외래종'이 될 건가

    '당내 선명성'을 강조하는 만큼 손 대표의 한미FTA(자유무역협정) 재협상에 대한 반대 수위도 높아지고 있다. 경기도지사 시절 'FTA적극 설파론자'였던 그의 모습은 간데없고 당 내 분위기에 휩쓸려 '절대 반대 초강경 모드'로 돌아선 것이다.

    물론 FTA를 두고 우리 정부 측에 불리한 면이 있다면 제동을 걸고, 논리적이고 충분한 논의를 거쳐 합리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손 대표의 주장은 현실적으로 양국 정부가 수용하기 어려운 주장을 내세워 사실상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손 대표는 15일 당 회의에서 "재협상을 한다면 ISD(투자자 정부제소),역진불가(Ratchet 한번 합의한 개방 수준 이하 재협상 불가) 조항 철폐를 미국 측에 요구하고, 거부하면 한미 FTA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FTA비준반대를 당론으로 취했던 민주당에서 그나마 '중간자적 입장'을 취했던 인물이 한 발짝 더 나아간 모양새다.

    2년 전 통합민주당 대표 시절만 해도 "한미 FTA는 우리가 국제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그 기개는 어디로 갔는지 묻고 싶다. 특히 야 5당을 비롯한 좌파 진영과의 연대와 당내 선명성을 겨냥해 강경 대응을 하고 있다는 뒷말이 나오는 상황에서 손 대표의 'FTA 강경선회'는 과거 '합리주의자 손학규'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많은 실망을 안긴다.

    이를 증명하듯 당장에 '빨간불'은 그의 반토막 난 지지율이 보여줬다. 4주 연속 하락한 것으로 나타난 것.(그는 이날 리얼미터 여론조사결과 전주대비 0.7%p 하락에 10.0%를 기록, 간신히 3위를 지켰다)

    아무리 컨벤션 효과가 빠졌다고 해도 제1야당 대표이자 야권의 유력 대권주자로 급부상한 그에게 망신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손학규가 그만큼 자신의 색깔을 못 만들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손 대표의 지지율 하락세는 포커스를 그간 자신의 지지층인 보수.중도층 지지자들이 아닌 '좌클릭 맹북정당' '강성 투쟁' 등 기존의 민주당 노선에 끼워 맞추려 한 탓도 있다.

    이쯤에서 그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대안도, 합리적 비판도 없이 이도저도 아닌 반대를 위한 반대로 노 전 대통령이 비아냥댔던 "보따리 장수"에 머물 것인지, "합리적 대안 제시를 위해 탈당도 감행한 '진화하는 외래종'"이 될 것인지는 전적으로 그의 판단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