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장 끝없는 도전 (23)

     다음날 나와 윤병구는 다시 대한제국 공사관을 찾았다. 가만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소문을 들은 유학생들과 동포까지 백여명이 우리와 함께 공사관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김윤정은 정문을 닫고 우리를 들여보내지 않았다.

    「역적 김윤정은 문을 열라!」
    흥분한 군중들이 소리쳤고 구경꾼이 모였다. 몇 명은 안으로 돌을 던졌다가 여러 사람의 제지를 받고 그쳤다.

    나도 주먹을 쥐고 외쳤다.
    「만고의 역적 김윤정! 너는 일본의 개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승인해 준 일을 너는 일본의 개가 되어 조선 땅을, 조선 민중을 팔아먹었다! 네 이놈! 1년만에 서기생에서 대리공사가 된 것은 일본놈에게 네 조국을 팔아먹은 댓가렸다! 네 자손은 대대로 역적의 탈을 쓰고 살 것이다!」

    7년 전, 인화문 밖에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수천 군중 앞에서 연설을 하던 추억이 그 순간에도 떠올랐다. 그러자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청원서 한통으로 미국이 일본의 압력을 제거 해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국가의 이해가 얽힌 일이 어찌 그리 간단히 되겠는가? 하지만 그 청원서가 루즈벨트의 말처럼 공식 절차를 받아 미국 대통령의 손에 쥐어진다면 대한제국의 문제가 대외적으로 공론화 될 것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기대한 것이다. 

    며칠 후에 포츠머스에서 미국의 중재로 러·일 강화회담이 열린다. 러시아는 일본에 패전을 한데다 지난 6월에 혁명이 일어나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은커녕 제 몸을 추스르기도 힘들어졌다. 대한제국을 삼키려는 일본의 방해물은 다 제거되었다.

    내가 다시 목청껏 소리쳤다.
    「이 역적놈아! 두고 보아라! 조선 민중은 기필코 살아남아 일본을 꺾고 세계 만방에 이름을 날릴 것이다! 이놈아, 그때 네 이름이 반역도, 역적으로 찍혀져 나올 것이다!」

    그때 경찰들이 달려왔다.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형님, 가십시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윤병구가 내 팔을 끌었다.

    공사관 3층 창문에서 아이들이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김윤정의 자식들 같았다. 아마 다 들었으리라.
    나는 동포들과 함께 공사관 앞을 떠났다.

    며칠 후, 서재필의 편지를 받아 본 김윤정은 답장도 주지 않았다.

    그로부터 20년쯤이 지난 후에 세상에 사실이 밝혀졌으므로 세거모어 힐에서 나와 윤병구를 만나고 난 루즈벨트의 행동을 이곳에 옮겨 쓴다.

    우리를 배웅한 비서관 로엡이 집무실로 돌아왔을 때 루즈벨트가 웃음 띤 얼굴로 묻는다.
    「이봐, 로엡. 어때? 내 연기가?」
    「훌륭하셨습니다, 각하.」

    로엡이 웃지도 않고 대답하자 루즈벨트는 시가를 입에 물고 귀를 기울이는 시늉을 한다.
    「지금 밖에서 떠드는 놈이 그 놈들 중 하나 아닌가?」

    그러자 창밖을 내다 본 로엡이 말했다.
    「그렇군요. 기다리던 교민들한테 경과를 보고하는 겁니다.」
    「순진한 놈들. 우리가 태프트를 보내 일본과 비밀 협약을 맺었다는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이 될까 궁금하군.」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간 루즈벨트가 연설을 하는 윤병구의 뒷모습을 내려다 보면서 말을 잇는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차지할 자격이 있어. 러시아를 제압한 보상을 받아야 된단 말이다. 이 병신아.」

    그리고는 시끄러운지 제 손으로 창문을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