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장 끝없는 도전 (21) 

     다음날 오후 3시, 나와 윤병구는 아이오와 서클에 위치한 주미한국공사관 3층 건물의 1층, 공사 집무실에서 김윤정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앉아있었다.

    김윤정이 손에 든 것은 청원서, 루즈벨트 대통령이 읽은 것과 같은 내용이지만 더 간곡하고 조리 있게 다듬었다. 어젯밤 서재필과 나, 윤병구까지 밤을 새워 만든 작품이다.

    김윤정은 꼼꼼하게 읽었는데 그동안 나는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는지 모른다. 옆에 앉은 윤병구는 처음에는 긴장하더니 김윤정이 시간을 끌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헛기침을 여러 번 했다. 울화가 치민 것 같다.

    마치 황제가 승인한 일을 아전놈이 검토 한답시고 시간을 끄는 것처럼 보였는지 모르겠다. 하긴 공사 집무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찬물을 뒤집어 쓴 느낌이 들긴 했다.

    활짝 웃으면서 어제 루즈벨트를 만난 장면을 이야기하려는 윤병구의 말을 김윤정이 차갑게 가로막았으니까. 나는 윤병구에게 김윤정이 아카마스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는 내막을 아직 말해주지 않았다.

    이윽고 머리를 든 김윤정이 나와 윤병구를 번갈아 보았다. 가늘게 뜬 눈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다. 김윤정이 말했다.
    「이건 미국무부로 전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어금니만 물었지만 윤병구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김윤정을 보았다. 그리고는 묻는다.
    「공사,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 청원서를 미국무부에 전할 수가 없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김윤정의 시선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작심을 한 듯 얼굴 가죽이 누렇게 굳어져 있다.

    그때 윤병구가 눈을 부릅떴다.
    「어허, 이 사람이 미친 모양이구만. 미국 대통령이 이곳을 통해서 미국무부로 전하라고 했단 말씀이오!」

    그러자 김윤정의 얼굴에 일그러진 웃음기가 떠올랐다.
    「미국 대통령이 대한제국의 내정(內政)에 이래라 저래라 간섭 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어째?」

    마침내 분이 치솟은 윤병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일에 대한제국의 존망이 달려 있다는 것을 네 놈이 모른단 말이냐? 네 놈이 대한제국 외교관이냐?」
    「나는 대한제국 주미공사가 맞지만 그대는 미국 시민이야!」

    김윤정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눈을 치켜 뜬 김윤정이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나는 본국의 훈령 없이는 이런 청원서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것이 내 직임을 다 하는 것이다!」

    「역적.」
    마침내 내 입에서 이 한마디 말이 뱉아졌다. 한마디였지만 굵고 다부지게.

    그것이 큰 울림으로 김윤정의 귓속을 파고들었으리라. 퍼뜩 머리를 돌린 김윤정이 나를 보았다. 시선이 날카롭다.

    그때 내가 다시 한마디씩 씹어 뱉듯이 말했다.
    「일본의 개. 너는 당분간은 일본의 개 노릇을 하면서 출세를 할지 모른다. 하지만 두고 보거라. 조국과 동포를 배신한 너와 네 자손들은 매국노 탈을 쓴 채 살아가게 될테니.」
    「나가!」

    김윤정이 손바닥으로 다시 테이블을 치더니 소리쳤다. 그리고는 밖에 대고 소리쳤다.
    「경비원!」
    그러자 흑인 경비원이 뛰쳐 들어왔다. 항상 건물 밖에 있던 놈이다.

    김윤정이 우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경비원에게 말했다.
    「이자들을 내보내! 다시 들이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