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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에서 세 차레 반공봉기는 물가폭등에서 비롯되었다.
*폴란드 反共봉기의 원인은 物價폭등
수탈식 화폐개혁으로 북한에선 물가가 폭등하고 생필품의 品貴(품귀)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북한주민들의 70% 이상이 시장경제에 의존하고 살아가고 있으므로 이런 경제악화는 소요사태를 부를 수도 있다. 東歐(동구) 공산주의를 뒤흔든 폴란드의 세 차례 소요사태의 원인도 물가폭등과 생필품의 부족이었다.
1956년 6월 폴란드의 포즈난市(시)에서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생필품과 식료품의 부족, 주택사정의 악화, 물가고로 인한 실질 임금소득의 감소, 이런 가운데서도 소련으로 상품을 보내는 것에 항의하는 騷擾(소요)였다. 폴란드 정부는 保安軍(보안군)을 투입, 발포하여 상당수 시위자들을 죽였다. 정부는 이들을 ‘제국주의 세력의 조종을 받는 反혁명분자’라고 규정하였다. 시위가 확산될 기미를 보이자 폴란드 공산당은 이들을 ‘고통 받는 정직한 노동자들’로 재규정하면서 임금을 50%나 올리고, 정치적 개혁을 약속하였다. 정부는 한때 실각하였던 黨內(당내) 개혁파 고물카를 당 제1서기로 추대하여 이런 개혁을 主導(주도)하도록 하였다.
자유유럽방송(RFE)은 이 소요사태를 집중적으로 보도, 1956년 10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학생들이 反共(반공)봉기를 일으키도록 불을 질렀다. 헝가리 학생들은 처음엔 고물카식 개혁을 요구하다가 나중엔 공산체제 타도를 부르짖었다. 한때 공산정부를 대체하고 민주정부가 들어섰으나 소련군이 개입하여 反共(반공)시위대를 流血(유혈)진압하였다.
1970년 12월에도 폴란드의 공업도시 그단스크 일대에서 식품 값 인상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의 파업과 소요가 발생하였다. 고물카가 이끄는 폴란드 공산정권은 군대와 민병대를 투입, 발포하였다. 40명이 죽고 천 명이 다쳤으며 300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공산당은 소요가 전국적으로 번질 것이라고 판단하고 고물카를 물러나게 한 뒤 소련 브레즈네프 서기장의 승낙을 받고 에드워드 기에레크를 제1서기로 추대하였다.
기에레크 정권은 외자도입으로 경제난을 극복하려 하였으나 外債(외채)가 200억 달러에 달하게 되고 다시 경제난이 찾아왔다. 1980년 6월 쇠고기 값과 기름값, 담배값 등 생필품의 가격을 인상한다는 발표가 있자 루블린과 바르샤바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하였다. 철도노조원 5만 명이 加勢(가세)하고 8월엔 그단스크의 레닌 조선소에서 바웬사가 이끄는 자유노조의 파업이 이어졌다. 폴란드 정부는 진압군의 투입을 포기하고 자유노조의 설립을 허가하는 양보를 하여 사태를 수습한다. 국제공산주의 역사상 비공산계 노조(솔리데리티)가 처음으로 허용되었다. 이 세력이 폴란드 출신 교황(요한 바오로 2세)과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응원을 받아가면서 反共(반공)민주화 운동을 주도, 1989년에 폴란드를 비롯한 東歐(동구)공산체제가 붕괴되는 계기를 만든다. 1980년 시위에 책임을 진 기에레크 제1서기는 물러나고 스타니슬라브 카니아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으나 1981년 12월 야루젤스키 국방장관이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정권을 잡았다. 아류젤스키는 강경책으로 소련군의 개입 가능성을 제거한 뒤 자유노조와 서서히 타협하면서 민주화의 과정을 슬기롭게 관리하였다.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물가폭등과 품귀현상이 주민 소요로 번지고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군대가 동원되어 流血(유혈)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진압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북한정권은 타격을 받게 된다. 북한에선 시장을 통하여 돈을 벌고 먹고 사는 ‘시장세력’이 존재한다. 이들이 소요사태를 겪으면 ‘체제개혁 세력’, 즉 민주화 투사들로 질적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