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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중재위원회가 심리 종결을 선언하자 고성(高聲)이 나왔다. 민주노총(금속노조)을 대리해 나온 간부는 불만스러웠던 모양이었다. 목소리가 높아지더니 중재위원들을 향해 항의를 쏟아냈다. 얼마 전 민주노총으로부터 제소(정정 요구)당해 출석한 언론중재위에서 겪었던 경험담이다.
그날 언론중재위 결정엔 우리 쪽도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승복하는 게 당연했고, 그래도 불만이면 정식 재판을 걸면 될 일이었다. 현장을 지켜본 나와 후배 기자에게 '고성 해프닝'은 솔직히 충격적이었다.
민주노총이 고립돼가는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나,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절차 무시'라 답하겠다. 민주노총은 목적 지상주의에 함몰된 나머지 종종 절차적 정당성을 무시하는 고질병에 빠져 있다. 때만 되면 반복되는 불법·폭력성은 민주노총의 가치에 공감하는 일부 국민들마저 신물나게 만든다.
그래도 여전히 민주노총은 자신들이 외면받는 이유에 귀를 닫아걸고 있다. 지금 벌어지는 '죽창(竹槍) 논쟁'이 바로 그렇다. 16일 대전 폭력시위에서 사용된 4~5m 길이 대나무 용품에 대해 민주노총은 죽봉(竹棒), 즉 막대기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죽창을 죽창이 아니라고 우기는 데 바로 민주노총 문제의 본질이 있다.
우리는 민주노총이 용어에 민감한 사정을 안다. 죽봉은 그 자체로 공격성을 담지 않은 중립적 도구다. 반면 죽창은 사람을 해치기 위한 살상용(殺傷用) 무기다. 죽창을 들었다면 그것은 상대방을 해칠 의지가 담긴 고도의 폭력시위를 의미한다.
실상은 어땠을까. 16일 시위에서 사용된 것은 끝이 우산 살처럼 수십 갈래로 갈라진 막대기였다. 깃발을 달았던 죽봉을 시위대가 땅바닥에 내리쳐 뾰족한 무기로 만들었다. 시위대는 갈라진 대나무 끝을 진압 경찰의 안면보호 격자망 사이로 찔러 넣으며 얼굴을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많은 전·의경이 눈과 얼굴에 상처를 입었다. 각막을 다쳐 자칫 실명(失明)할 뻔했던 의경도 있었다. 날카로운 대나무 끝으로 눈을 공격했다면 살인에 준(準)하는 치명적 범죄행위다. 그런데도 그냥 막대기일 수 있을까. 대각선으로 자르지 않았기 때문에 죽창이 아니라니, 이런 말장난이 어디 있나.
사실은 말장난이 아닐지 모른다. 나는 민주노총이 진심으로 죽창이 아니라고 믿는다고 생각한다. 민주노총은 목적을 위해 수단·절차의 합법성이 희생될 수 있다고 믿는 조직이다. '노동기본권 쟁취'라는 목적을 위해선 경찰 104명이 부상당하는 정도의 폭력성은 용인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목적을 위해 절차의 정당성이 희생되는 민주노총의 조직문화는 자주 표출돼왔다. 올해 초 성폭력 은폐사건 때도 민주노총 간부들은 조직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조직 보위론(保衛論)'으로 피해자 입을 막았다.
이런 절차적 불법성이 지적당할 때마다 민주노총이 습관처럼 하는 말이 있다. 왜 불법·폭력이 벌어졌는지 본질을 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절차를 무시하면서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은 '혁명'을 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민주노총이 제도권에 들어온 순간 혁명 노선은 포기했음을 의미한다. 절차적 정당성을 지키지 않겠다면 다시 재야로 돌아가는 게 옳다.
얼마 전 한 세미나에서 만난 민주노총 간부 S씨와의 대화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진솔하고 말에 진실성이 담겨 있어 대화가 통했다.
―민주노총 비정규직 조합원들이 국제 모터쇼장 앞에서 선지피를 뿌렸다. 불법적인 퍼포먼스로 얻는 게 무언가(기자).
"그들이 왜 그런 퍼포먼스를 할 수밖에 없는지 이유를 생각해보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가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겠는가."(S간부)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선지피를 뿌린다고 어디 조금이라도 비정규직 문제가 개선됐는가. 선지피가 역효과를 낼 뿐임을 인정하고, 죽창을 죽창이라고 하지 않는 한 민주노총은 절대 그들이 바라는 세상을 만들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