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월 17일 오후, 모 인터넷 포털 검색창에 ‘송만기 연락처’라고 입력했다. 그의 휴대폰 번호를 아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그의 인적사항에서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이어지나 싶더니 곧 녹음된 인사말이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송만기입니다. 저는 지금 중국에 있습니다. 일요일 저녁에 돌아옵니다.…’ 수화기를 계속 들고 있었더니 그가 전화를 받았다. 기사의 취지를 설명하고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정말 할 말이 많다고 했다. 20일 오후, 그렇게 송씨와 마주앉았다.

    송만기씨는 1959년생이다. 올해 우리 나이로 쉰한 살이 됐다. 그는 직업이 여러 개다. 라이브 카페와 고깃집을 운영하고 있는 자영업자이고 6집 앨범까지 발표한 가수다. 경기방송과 원주MBC, 미국 라디오코리아 등에서 라디오 프로그램 DJ로도 활약했다. 현대홈쇼핑에서 쇼호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각종 행사에선 전문 MC로 뛴다. 그의 말마따나 ‘순서만 알면 대본 없이 두 시간 떠드는 건 일도 아닌’ 수준이다. 번번이 고배를 마시긴 했지만 양평군수 선거에도 두 차례나 도전한 경험이 있다.

  • ▲ MBC를 상대로 한 법정소송 끝에 승소한 송만기씨 ⓒ 주간조선
    ▲ MBC를 상대로 한 법정소송 끝에 승소한 송만기씨 ⓒ 주간조선

    송만기씨가 유명해진 건 엉뚱한 곳에서였다. 그는 지난 2004년 3월 26일 지금은 폐지된 MBC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 ‘신강균의 뉴스서비스 사실은’에 수십 초간 등장하며 전파를 탔다. 화면 속 그는 노무현 당시 대통령 탄핵 찬성 집회의 단상에 서 있었다. 마이크를 든 그는 집회 참가자를 향해 외쳤다. “여러분, 고등학교도 안 나온 여자가 국모로서 자격이 있습니까?” 격앙된 참가자들이 권양숙 당시 영부인을 향해 욕설을 퍼붓자 그 욕설을 자신의 입으로 한 번 더 언급하고 박수를 유도했다. 이 방송이 나간 직후 송씨는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대통령 부인의 학력을 비하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로부터 2년 반 만인 2006년 10월, 송씨는 MBC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1000만원 승소 판결을 받았다. MBC는 항소도 하지 않고 재판 결과에 승복했다. 그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그가 방송에 나간 집회의 사회를 본 건 우연한 기회에서였다. “저도 자영업자이지만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후 서민 경제가 날로 어려워졌어요. 수천 개의 기업이 중국으로 빠져나가 고용 창출마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이건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여의도에서 열린 한 보수단체 집회에 참가하게 됐다. 그런데 한마디로 ‘너무 재미가 없었다’. “보다 못해 제가 담당자를 찾아가 사회를 보게 해달라고 했어요. 당연히 거절 당했지요. 면박만 듣고 돌아서는데 우연히 절 아시는 목사님을 만났어요. 그 덕에 행사 관계자와 통성명을 할 수 있었지요.”

    명함을 건넨 보수단체 쪽에서 연락이 온 건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이번 주 일요일에 광화문에서 집회가 하나 있는데 진행을 맡아달라”고 했다.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제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걸로 보수단체 일을 도울 수 있으니 얼마나 신납니까. 전 지겨운 집회는 딱 질색이에요. 노래도 하고 우스갯소리도 하면서 참가자들을 즐겁게 해줄 자신이 있었습니다.”
     
    문제의 발언엔 방송에서 빠진 전후 맥락이 있었다. “당시 온 국민의 관심사는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의 자살이었습니다.(남 전 사장은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형 노건평씨에게 사장 유임을 청탁한 게 알려지며 2004년 3월 11일 한강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했다. 그의 자살 직전 노 대통령은 공개석상에서 남 전 사장을 가리켜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하신 분들이 시골에 있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는 일이 이제는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전 대통령의 경솔한 말 한마디가 한 가정의 가장 목숨을 끊게 만든 걸 비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국민 여러분, 남 사장이 왜 죽었습니까. 만약 내가 TV 나와서 권양숙 여사한테 고등학교도 안 나온 여자가 국모로서 자격이 있습니까, 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했던 거지요.”

    당시 군중들은 ‘여사는 무슨 여사냐. ×××이지’ 하며 욕설을 퍼부었지만 송씨는 되레 그들을 달랬다고 했다. “욕하지 말고 문화시민답게 가자고 했지만 흥분한 사람들을 달래긴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빨리 그 상황을 무마하려고 박수를 유도하고 다음 화제로 넘어간 거예요. 앞뒤 상황 다 빼버리고 자기들 입맛에 맞는 부분만 편집해 방송할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문제의 프로그램이 방송되던 날, 그는 양평에 있는 자신의 라이브 카페에 있었다. 금요일 밤. 제일 바쁜 시각이었다. 방송 카메라에 잡힌 것조차 몰랐던 그가 방송일정을 알 턱이 없었다. 악몽이 시작된 건 토요일 새벽 1시를 전후해서였다. 방송이 끝나고 채 30분이 지나지 않은 시각이었다. “갑자기 휴대폰이 울려대기 시작했습니다. 받으면 다짜고짜 욕설을 해댔어요. 끊으면 또 울리고, 끊으면 또 울리고…. 다섯 번째 전화쯤이었을까요. 어떤 남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그러더군요. ‘선생님, 지금 큰일 났어요. 영부인한테 욕한 게 인터넷에 쫙 깔렸어요’라고요.”

    그 전화를 끊고 나서도 전화벨은 계속 울렸다. 송씨는 멍해졌다. ‘욕이라고? 난 욕한 적 없는데….’ 죄 지은 게 없으니 전화기 끌 이유도 없다고 생각해 그는 울려대는 전화를 피하지도 않고 계속해서 받았다. 욕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네 놈 목을 따버리겠다, 밤길 조심해라, 네 가족 몰살시키고 너도 죽여버리겠다…. 열 중 아홉은 살해 협박 전화였다. 성별도, 연령도 없었다. 자신을 밝히는 이도 없었다. 전화가 연결되면 입에도 못 담을 욕설을 쏟아내곤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끊어버리는 통화가 대다수였다.

    대중적 인지도가 높지 않았지만 인터넷엔 이미 그의 ‘약식 프로필’이 떠다니고 있었다. 강원대 졸업, 단국대 경영대학원 졸업, 육군 학사장교 출신, 경기방송 FM ‘떴다, 송만기’ 진행 경력 등이 그것. 해당 기관 홈페이지가 마비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학사장교 홈페이지는 그날 방송 이후 쏟아지는 악플을 견디지 못하고 15일간 폐쇄됐다.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검색 능력 뛰어난 네티즌들은 귀신같이 그와 관련된 정보를 찾아내 블로그와 미니홈피, 인터넷 카페 등으로 퍼 날랐다. 앞뒤로 스캐닝한 그의 명함을 띄운 이도 있었다.

    더 이상의 영업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결국 그는 양평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집에 경찰이 와 있다고 했다. “진짜 경찰인가 싶은 게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정말 집 초입에서부터 경찰들이 쫙 깔렸더군요. 상부 연락 받고 지켜주러 왔다고 하는데도 너무 무서웠습니다.” 때 아닌 경찰의 엄호 속에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이 올 리 없었다. 그 와중에도 계속 전화는 걸려왔다. 욕한 적 없다고 대꾸하다가 어느 순간엔 분을 못 이기고 상대와 싸웠다. 방송이 나간 후 나흘 동안 그에게 걸려온 전화와 문자 메시지는 2760통. 통신사에 조회했더니 A4 용지로만 70매가 넘게 출력돼 나왔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던 아들, 중3이던 딸은 며칠간 학교에도 못 갔다. 카페 영업은 이후 몇 개월간 엄두도 못 냈다.

    송만기씨는 사건이 터질 때만 해도 ‘컴맹’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컴맹으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10여 년 간 미국에 거주한 경험이 있다. 그를 따라 미국서 생활한 아내도 영어 실력이 상당했다. 아내는 그 경험을 살려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무보수로 방과후 영어교사를 하기로 했다. 학교 측과 합의해 교재까지 마련해놓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방송이 나간 후 학교 홈페이지 게시판에 익명의 제보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자격도 안 되는 사람이 무슨 영어수업이냐’는 내용의 비방 글이었다. 결국 송씨의 아내는 난색을 표하는 학교 측 때문에 영어교사 일을 포기해야 했다. 이후에도 송씨 부부를 향한 사이버 테러는 계속됐다. 노사모 홈페이지에도 송씨를 비방하는 글이 줄기차게 올라왔다.

    견디다 못한 송씨는 경찰청 사이버 수사대에 수사를 의뢰했다. 붙잡힌 범인은 놀랍게도 오랫동안 형님 아우 하며 지내던 동네 이웃의 아내였다. 송씨 부부는 2007년 그를 상대로 또 하나의 소송을 제기했다. 결과는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이번에도 승소했다. 그러나 판결에 아랑곳없이 상대는 집행유예 기간에도 노사모 홈페이지에 송씨 관련 글을 올렸다. 그는 “당시 내가 양평군수 선거를 준비하고 있어 일일이 대응하지 못하는 바람에 일을 더 키우고 말았다”며 인터뷰 도중 두고두고 분을 삭였다.

    겉보기에 그는 멀쩡했다. 농담도 잘하고 막힘없는 언변도 여전했다. 그러나 그도 “한땐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대인기피증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사건 이튿날 집을 나설 땐 ‘남상국 사장이 투신한 곳에서 나도 죽으리라’ 마음먹기도 했다. (그는 이 얘길 하며 잠깐 눈물을 비쳤다.) “한동안은 누굴 만나면 그 사람 손부터 봤어요. 손에 칼이라도 들려 있을 것 같아서요.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사람을 만나면 공포감에 온몸이 떨렸지요. 제가 인터넷과 친하지 않아 저에 관한 글을 제대로 못 본 덕분에 이나마 살아있다고 생각해요. 그거 다 봤으면 어휴, 못 견뎠을 것 같습니다.”

    MBC 상대 소송에서 1000만원을 건졌지만 변호사 비용을 빼고 나면 그에게 남은 건 없다. 그를 비방하는 글을 80건씩 올린 상대도 아무런 제약 없이 잘 살고 있다. 그나마 그가 기를 쓰고 소송을 해서 승소한 사건인데도 그렇다. “당시엔 내가 잘못한 것 없고 떳떳하니 그것만 인정 받으면 괜찮다고 생각해 더 이상의 대응은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5년이 지난 지금도 비슷한 일이 자꾸 생기는 걸 보면 그때 왜 좀 더 치열하게 싸우지 못했나 후회가 됩니다. 그랬다면 비슷한 피해를 겪는 사람이 조금은 줄어들 텐데….” 그는 “익명의 폭력에 시달린 피해자를 위한 보다 제도적인 구제책이 하루 빨리 마련됐으면 좋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