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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7대 총선이 끝난 뒤 당시 제1야당이던 한나라당의 전여옥 대변인은 152석의 집권 여당 열린우리당을 향해 이런 조언을 한다.
"여당이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진 당시 전 대변인은 "행정부에 대한 효율적인 견제를 하는 정치적 조언자다"(2004년 5월 10일 전여옥 대변인 논평 중)라고 자답한다. 이 논평에서 전 대변인은 "상대자인 야당에 대한 배려를 기본으로 한 상생의 정치 주체"와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는 경제 문제에 대한 대안 제시"라는 여당의 역할을 설명한다.
같은 기간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열우당은 '김혁규 총리 기용'을 두고 충돌한다. 당내 소장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김혁규 총리 기용에 반대 목소리가 나왔다. 소장파들의 목소리는 당 지도부가 '대통령 인사권 존중' 주장과 현 국회부의장인 문희상 당시 특보가 총리인준안 부결시 '지도부 인책론'과 '조기전대 개최가능성'을 주장하며 압박하자 수그러들었다.
이때 한나라당 배용수 수석부대변인(전 청와대 춘추관장)은 다음과 같은 논평을 낸다.
"김혁규 총리 카드에 대한 나름대로 반대 입장을 펴던 열우당 소장파 의원들의 소신 주장이 찻잔 속의 미풍으로 끝날 것 같다. 지도부의 '대통령 인사권 존중' 발언과 문희상 특보의 총리인준안 부결시 '지도부 인책론'과 '조기전대 개최가능성' 발언이 나오자 소신을 꺾고 있어서다. 결국 대통령 지시와 청와대의 협박에 순종하는 '꼭두각시' 내지 '거수기'로 전락하는 것이 아닌지 안타깝다"(2004년 5월 30일 배용수 수석부대변인 논평 중)
두 논평 모두 집권 여당이 청와대 입김에 흔들리지 말아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2008년 9월. 상황은 역전됐다. 야당으로 집권 여당의 역할을 주문했던 한나라당이 172석의 거대 여당이 됐다. 하지만 집권 뒤 여당인 한나라당 모습은 4년 전 자신들이 제시했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새다.
멀리 돌아볼 것도 없이 요즘 가장 큰 이슈인 이명박 정부 '종교 편향'을 둘러싼 불교계의 반발에 대한 한나라당의 태도를 보면 스스로 제시한 "행정부를 효율적으로 견제하는 정치적 조언자" 기능을 잃어버렸다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이 논란의 초점은 '어청수 경찰청장 경질' 문제에 맞춰져 있다. 불교계 반발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자 한나라당 지도부는 어 청장 사퇴 필요성을 주장한다. 청와대에도 이런 입장을 전달했다고 한다.
박희태 대표는 어 청장 퇴진을 두고 "우리가 지금 고심하고 있다"며 사퇴쪽에 무게를 실었고 주성영 나경원 의원 등은 공개적으로 어 청장 사퇴를 주장했다. 이 문제로 이명박 대통령 지지율은 물론 한나라당 지지율마저 하락하면서 한나라당이 어 청장 퇴진 문제를 주도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 대통령 측 인사들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이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의원이 "어 청장은 잘못한 게 없다"며 어 청장 퇴진 요구를 공개적으로 반박했고, 이 대통령의 사과요구에 대해서도 "적절하지 않다"고 못박았다.
곧바로 공성진 최고위원이 지원사격에 나섰다. 공 최고위원은 어 청장 퇴진 문제는 대통령의 고유권한인 인사권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당에서 왈가왈부 해서는 안된다는 논리를 폈다. 이 대통령의 친형과 측근 라인으로 분류되는 공 최고위원의 발언이 나오자 당내에서는 두 사람의 발언을 청와대 의중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형성됐고 급기야 '어 청장 사퇴 요구' 목소리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대통령 주변의 힘있는 인사들의 발언에 여당 지도부가 꼬리를 내린 셈이다. 이처럼 여당이 청와대의 입김에 따라 입장을 달리 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국회 원구성 협상에서도 한나라당은 민주당과 타결 목전까지 갔던 협상을 청와대가 반발하자 결렬시킨 바 있다. 4년전 스스로 제시했던 집권 여당의 역할과 모델과는 상반된 것이다. 이 때문에 한나라당도 집권 반년만에 민주당으로 부터 "한나라당은 청와대 여의도 출장소"(2008년 8월 1일 유은혜 부대변인 논평 중)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하는 우스운 꼴이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