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31일자 오피니언면 '아침논단'에 박효종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가 쓴 <한국 좌파의 '자기 모순'>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대선과 총선에서 참패하고 폐족(廢族)으로까지 몰렸던 좌파가 '촛불'을 계기로 기사회생하고 있다. 광장에서의 동원능력과 '다음' 아고라에서의 인터넷 동원능력도 막강해졌고 공권력도 우습게 여길 정도가 되었다. 여기에는 그들 편에 서서 힘을 북돋았던 좌파 언론들의 덕이 컸다. 하지만 세상 일은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5년 내내 켜고 싶은 촛불이었겠지만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 작용했는지 그 촛불이 예전 같지 않다. 하기야 전략과 전술이 무궁무진한 좌파가 이 정도의 시련에서 의기소침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 좌파의 문제는 지독한 '인지 부조화' 현상에 직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알고 생각하는 것들 사이에 괴리가 생길 때 나타나는 것이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다. 부자가 되기를 원하면서도 부자가 된 사람에 대해서는 강한 혐오를 드러낸다. 자신의 자녀는 미국으로 유학 보내면서도 미국산 쇠고기, 미국과의 FTA 등 미국과 관련된 모든 것이 증오의 대상이다. 자신의 자녀가 전교조 교사 밑에서 지도받는 것을 꺼리면서도 전교조에 대한 지지는 강렬하다. 북한에 가서 살기는 싫어하면서도 친북주의자나 종북주의자로 처신하고 있다. 투쟁과 경쟁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것인데, 노사문제건 교육문제건 '투쟁'은 결사적으로 하면서도 '경쟁'만은 안 된다고 손사래를 친다.

    일련의 인지부조화 현상 가운데에서도 가장 현저한 것은 대한민국의 좌파로 살면서 그것을 가능케 한 대한민국의 성취는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유와 인권, 시장과 민주주의가 꽃피는 나라이기에 좌파로서 권력도 10년 동안 잡는 등 왕족처럼 살아온 것이 아닌가. 북한에선 김일성주의자나 김정일주의자가 아니라면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런데도 건국 60주년을 기념하는 일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못해 냉소적이다. 건국을 기념하면 상해 임시정부는 어떻게 되며, 또 광복절은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정말 그것이 고민이라면 걱정도 팔자다. 건국을 기념한다고 해서 상해 임시정부의 의미가 훼손되는 것도, 광복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진가가 더욱 더 빛날 뿐인데 웬 걱정인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가 보장된 것이 건국일진대 좌파든 우파든 경축하면 경축했지 질색할 이유는 없을 터이다.

    흔히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이 헬멧을 쓰지 않아 큰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헬멧을 쓰지 않는 것은 단순한 안전 불감증 때문이 아니라 오토바이가 위험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이다. 위험한 것과 즐기고 싶은 것 사이에 인지부조화가 발생했을 때 오토바이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헬멧을 쓰지 않음으로써 자신에게 확신시키려는 것이다. 이처럼 좌파도 진실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이를 인정하면 행여 자신들의 존재감이 없어질까 봐 반미, 반건국 등 각종 '안티'를 고집하고 나서는 것이 아닐까.

    한국의 좌파는 변해야 한다. '진보연대'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진보하지 않은 좌파들끼리 연대하여 법치를 무시하고 대중 동원으로 힘을 과시하면서 참여민주주의나 직접민주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사람들을 속이기 전에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출범한 지 수개월도 안 된 정권 초기에 나라가 아수라장이 된 데는 이명박 정부의 잘못이 크다. 하지만 대선에서 참패하고도 권력 금단현상을 극복하지 못해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 불복종으로 일관하면서 제대로 된 '실패학'을 쓰지 못한 좌파의 잘못도 결코 적지 않다. 돈을 세탁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세상에서 과거를 세탁하고 정체성을 세탁한들 무슨 큰일이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그래서는 미래가 없다. 자신들의 주장과 행동에서 인지부조화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문제를 정상적으로 풀어가고자 하는 진솔한 의지를 가질 때 비로소 건강성이 담보되는 좌파의 길이 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