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3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양상훈 논설위원이 쓴 '러시아에 준 차관 이제 털자 '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러시아에 간 이재오 특사가 푸틴 대통령의 외교보좌관을 만나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친서를 전달했다. 외교보좌관은 푸틴의 측근이라고는 하지만 차관급이다. 다른 나라 정상의 친서를 받을 수 있는 격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미 방문을 마친 박근혜 대중(對中) 특사는 후진타오 주석을 만났고 이상득 대일(對日) 특사는 후쿠다 총리를 만났지만, 대러시아 특사는 일정을 잡지 못해 출발 날짜를 두 차례나 연기해야 했다. 러시아가 대선 중이라고는 해도 우리에 대한 그들의 싸늘한 공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

    문제는 푸틴 대통령이다. 과거 고르바초프는 "북한은 공산주의를 해서 가난해졌다"고 했고, 옐친은 북한과는 관계다운 관계를 맺지도 않았다. 그러나 푸틴은 2000년 대통령에 취임한 뒤 즉각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과 포옹했다. 소련과 러시아의 역사를 통틀어 최고지도자가 북한에 간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해 이한동 총리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지만 푸틴은 만나주지 않았다. 이 총리는 크렘린궁을 빙빙 돌며 면담 성사 소식을 기다렸으나 허사였다.

    푸틴은 러시아가 어려웠던 시절 한국으로부터 이용당하고 모욕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1990년대 중반 페테르부르크시 간부로 방한했을 때 홀대를 받은 일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는 1990년 소련과 수교하면서 갈 수 없는 땅이었던 세계의 다른 반쪽에 발을 들여놓는 쾌거를 이룩했다. 소련의 도움을 받아 유엔 가입이라는 숙원을 이룩했고, 결국 중국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것이 우리의 국가적 지평을 얼마나 넓혀 놓았는지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다. 당시 우리는 그 대가로 소련에 30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했다.

    약속한 돈의 절반을 주었을 때 소련에 정변이 발생해 우리가 돈을 끊었다. 돈이 없던 러시아는 무기로 빚을 갚기도 했지만 이자에 이자가 붙어 빚은 오히려 22억 달러로 불어나 버렸다. 푸틴 대통령 취임 후 양국은 이 돈의 3분의 1을 탕감하고 나머지는 23년간 현금으로 분할 상환하기로 합의했다. 그 사이 우리는 러시아를 초라한 나라, 한심한 나라로 보았고 실제 그렇게 대한 측면도 있다. 그때 '대(大)러시아'를 꿈꾸던 푸틴의 가슴속에 대한민국은 어떤 얼굴로 새겨졌을까. 푸틴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러시아를 이끌 사람이다.

    이제 산유국 러시아는 유가 상승으로 초강대국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다. 1000억 달러에 달하는 외채를 절반 이상 갚았고 나머지도 곧 다 상환한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에만은 철저히 따지고 최대한 시간을 끌고 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닐 것이다. 러시아의 외환보유고는 이미 우리를 추월했다.

    작년 몇몇 정치인들이 "이제 대(對)러시아 차관을 털자"고 제안했었다. 아직 못 받은 돈보다 그 돈을 따지다 미래의 국익에 미치는 손해가 더 막심하다는 얘기였다. 러시아는 천연가스 매장량 세계 1위, 원유 매장량 세계 6위의 자원 대국이다. 우리가 육로로 에너지를 들여올 수 있는 유일한 나라다. 급성장하고 있는 러시아 시장은 우리 기업에 광활한 무대이고, 러시아의 첨단 기술은 우리 산업에 활로가 될 수 있다. 러시아가 핵심 기술을 얼마나 넘겨줄지는 의문이지만, 올해 발사 예정인 한국형 우주로켓도 러시아 기술로 만드는 것이다. 일본 언론은 북한 붕괴 때 중국군의 개입 가능성을 계속 보도하고 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러시아의 태도는 대한민국의 운명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대러시아 차관을 털자는 정치인들의 제안에 여론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러나 우리가 러시아와의 관계를 언제까지나 이런 상태로 끌고 갈 수는 없다. 양국은 최근 5~7종류의 러시아 첨단 무기 기술로 차관 상환을 일부 대체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한다. 대러시아 차관은 이제 양국 관계에서 17년 묵은 체증(滯症)이 돼 버렸다. 아직 남은 돈은 12억달러다. 어떻게든 해결을 볼 때이고, 서로 득이 되는 길을 찾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