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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2일자 오피니언면 '시론'에 김일영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가 쓴 '성찰적 보수가 필요하다 '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미래를 앞당겨 생각하는 게 인간의 특권이다. 10년 만에 찾아온 집권의 기회를 일회성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승리의 순간에 5년, 10년 후 보수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5년 전 이맘때 노무현 정권이 탄생한 순간이 자칭 ‘진보’세력에게는 위기의 시작이었다. 같은 일이 5년 후 보수에게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권력의 시계추가 10년 만에 좌에서 우로 움직였다고 기뻐하지만 반대로도 갈 수 있는 게 시계추라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진보는 몰락하지 않았으며 주기적 선거에서 패했을 뿐이다.
진보의 실패가 노무현 정권의 실정(失政) 탓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정치적 상상력의 고갈과 자기 성찰의 결여에 있다. 이번 선거는 프레임 싸움에서 진보가 진 것이라고들 한다. 이명박 캠프의 경제 살리기 프레임에 대해 범여권의 주자들이 독자적인 프레임을 제시하지 못하고 끌려다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지만 표피적인 분석이다. 독자적 프레임을 갖지 못한 원인에 대한 분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난 5년 동안 진보는 권력을 누리느라 정치적 상상력을 키우지 못했다. 민주·평화·개혁 대 독재·전쟁·수구의 대립구도 설정, 단일화를 통한 막판 뒤집기, 과거 뒤지기, 흑색선전, 분배 강조 등 그들의 정치는 모두가 ‘어디서 본 듯한(데자뷰·deja vu)’것 일색이었다. 이 진영의 상상력의 원천이 되어야 할 진보지식인들조차 대거 권력에 투항하면서 자기 성찰을 게을리했다. 그 결과 그들은 19세기적 민족주의와 자주, 20세기적 분배, 그리고 1980년 광주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는 ‘시대의 지진아(遲進兒)’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진보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지금 보수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성찰성(reflexiveness)’이다. 이번 선거는 관념세계에서 이념의 정치를 펼친 노무현 세력에 대해 생활세계에 기반을 두고 실용의 정치를 펼치겠다고 약속한 이명박 세력이 이긴 것이다. 그런데 이 당선자가 내세운 ‘실용주의’는 깊은 성찰을 수반하지 않으면 앞으로 많은 도전에 직면할 수 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성장 대 분배, 동맹 대 자주, 개발 대 환경 등 많은 이항대립의 가치 위에서 선택에 직면해 있다. 실용주의는 잘하면 양쪽을 모두 취할 수 있지만 잘못하면 죽도 밥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또한 실용주의는 철학과 원칙이 부재할 경우 절충주의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좌파 신자유주의’를 자임한 노무현 정권을 통해 우리는 이미 이런 절충주의의 말로를 지켜보았다. 따라서 당선자는 실용주의에 대한 성찰을 통해 그것이 무원칙한 편의주의로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철학과 원칙을 발견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이명박 당선자가 내놓은 ‘신(新)발전체제’ 역시 깊은 성찰을 요한다. 이번 대선에서 당선자가 내세운 ‘경제 살리기’가 국민들의 호응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정치가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일에만 머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정치는 박정희 시대로 충분했다. 이 점에서 ‘신발전체제’는 경제적 부가가치 창출을 뛰어넘는 새로운 ‘보수적 가치창출의 정치’를 지향해야 한다.
당선자에게는 5년이 중요하겠지만 보수진영이 바라보는 시간 지평은 그보다 훨씬 길다. 보수의 집권이 5년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당선자와 보수진영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 모두는 개인의 창발성(創發性)을 존중하는 자유주의의 가치를 곱씹어 보았으면 한다. 이번 선거는 이명박 개인의 승리이면서 동시에 평등주의를 내세운 민주화 진영에 대해 자유주의의 가치를 재발견한 선진화 진영이 승리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런 자유주의적 가치를 만들고 확산시켜 나가는 일에서 보수 지식인들의 분발을 촉구한다. 지금은 승리를 기뻐하기보다 보수의 미래를 위해 신들메를 고쳐 매야 할 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