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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9일자 오피니언면 '아침논단'에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가 쓴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종교사회학자들에 의하면 한국의 종교문화는 아폴로형이라기보다 디오니소스형이다. 아폴로형이 이성, 질서, 자제, 균형, 주체의 문화라면 디오니소스형은 감성, 열정, 몰입, 황홀, 의탁의 문화이다. 디오니소스형 종교문화의 역사적 기원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무속 신앙에 있다고 한다. 굿판에서 벌어지는 무당의 신들린 춤을 연상하면 된다. 종교사회학의 이 같은 발상은 한국의 정치를 포함한 문화 일반의 연구에도 적용될 법하다. 디오니소스의 별명이 술의 신 바쿠스이다. 다 알다시피 한국인의 술 소비량은 세계적이다. 또한 한류 문화가 국제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그 한류의 기초에는 한국 특유의 신바람이 있다고 한다. 이런 몇 가지 입증만으로도 한국의 문화가 디오니소스형임을 납득하기는 어렵지 않다.
한국의 현대정치사는 아폴로와 디오니소스의 충돌과 경쟁 과정이다. 경제 발전의 초기에는 분배보다 성장에 우선해서 떡 덩어리를 키울 필요가 있다는 차가운 논리가 아폴로라면, 분배를 중시하면 경제성장이 더 잘 된다는 인기 좋은 주장이 디오니소스이다. 남북 통일은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북한이 자유시장체제로 변하기를 기다릴 일이라는 별 인기 없는 주장이 아폴로라면, ‘우리 민족끼리’ 정신에 입각하여 성심껏 퍼주면 북한이 변할 것이라는 낙관이 디오니소스이다. 박정희 이래의 근대화 세력이 아폴로를 대변한다면, 4·19 이래의 민주화 세력은 디오니소스를 대변한다.
5년 전의 대통령 선거는 감성, 열정, 몰입, 황홀, 의탁의 디오니소스형 정치가 최고조에 달한 선거였다. 월드컵에서 4강에 오르자 그 신화의 여세를 몰아 축구협회 회장이 출마하여 선거의 판세를 갈랐다. 이동 중인 미군 장갑차에 두 명의 여중생이 불행한 사고를 당했는데, 그 일로 수만 개의 촛불이 광화문에 밝혀졌다. 그 역시 선거의 판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차떼기라는 한심한 작태를 벌인 한나라당의 잘못은 매우 컸다. 그 참에 온갖 사기꾼들이 국민을 상대로 뻔뻔스러운 거짓말의 행진을 벌였다. 노무현 여당 후보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강원도 휴전선 근방의 어느 마을을 찾아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과 상의해서 이 따위 철조망은 걷어치우겠다고 했다. 이 모두가 아폴로적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디오니소스적 바람이었다.
두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 올해의 대통령 선거에는 아직도 바람이 불지 않고 있다. 웬일일까. 한국인들이 아폴로적으로 변신한 것일까. 5년 전 어느 사장님은 디오니소스형 사원의 채용은 극구 사양하면서 대통령은 디오니소스적으로 찍고 말았다. 그러고선 5년 내내 손가락을 쳐다보며 고민하였다. 송창식의 노래처럼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가슴에 가득한 슬픔은 어쩔 수 없는 법이다. 엑스터시의 신바람도 깨고 나면 허망할 뿐. 바람이 스치고 간 자리는 늦가을의 낙엽동산처럼 스산하기만 하다. 지난 5년간 한국인들은 그 바람으로 휑하니 뚫린 가슴을 앓아 왔다. 그러고선 새삼스레 깨달았던가. 디오니소스의 바람은 아폴로의 지성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지난 5년간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대통합신당 등으로 이름도 외우기 힘들 정도로 현란하게 당을 부수고 새로 지어 온 집권 여당이 내홍에 휩싸였다. 바람을 일으켜 보겠다고 300만명이나 되는 선거인단을 모집하다가 온갖 형태의 허수와 부정이 끼어든 모양이다. 가까스로 사태를 수습한들 식어 버린 지지자의 마음에 신바람이 일 것 같지는 않다. 바람의 정치인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을 다녀왔다. 철조망을 걷어치우겠다는 공약을 지키기 위해서였겠지만 식어 버린 굿판에 신바람을 일으킬 속셈도 없지 않았을 터이다. 그런데 손님을 맞는 김정일의 표정에 짜증이 서려 있다. 개혁·개방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던가. 그러자 노 대통령도 그렇게 이야기하지 말자고 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북한에 성심껏 퍼주어야 하는가. 햇볕정책은 파탄이 났는가. 이래저래 아폴로적 고민으로 깊어가는 가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