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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7일 사설 <대통령 혼자서 남북 경협 '어음' 발행하나>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미국을 방문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ABC TV 인터뷰와 코리아소사이어티 초청연설에서 “(남북 정상회담에서) 개성공단과 같은 남북협력 공단을 여러 개 건설하는 데 합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노무현 대통령이 얼마 전 김천 혁신도시 기공식에서 “(정상회담에서) 토지공사, 도로공사 일거리를 많이 만들어 오겠다. 항만 사업도 많다”고 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전·현직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 관련 정보를 사실상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이번 회담에서 대규모 대북 지원 프로젝트가 합의되는 것은 확실한 모양이다.
노 대통령은 대북 지원과 관련해 완전히 정반대의 얘기를 했다. 지난 6월엔 신문 인터뷰에서 “전임 사장이 발행한 어음은 후임 사장이 결제하는 것이다. 내 임기가 두 달이 남았든 석 달이 남았든 (북한에) 가서 도장 찍고 합의하면 후임(대통령)이 거부하지 못한다”고 했었다. 그러다 지난 5일 남북 정상회담 자문위원단 간담회에선 “차기 정부에 부담을 주는 합의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어느 쪽이 진심이고 어느 쪽이 거짓말인지는 정상회담에서 가려질 것이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의 제2, 제3 개성공단 언급이나 “토지공사, 도로공사 일거리를 많이 만들어 오겠다”는 노 대통령 말을 들어보면 “내가 도장 찍어 버리면 네가 어쩔 것이냐”는 게 진짜 속마음인 모양이다.
장기적으로 통일과 그 후까지를 생각한다면 북한을 지금 저 상태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국민적·정치적 합의가 선행돼야 한다. 정부가 계획하는 대북 지원을 다 하면 앞으로 10년간 60조원이 들 것이란 추정까지 나오고 있다.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해도 “공단 만들어 준다” “도로 놓아 준다” “항구 지어 준다”면서 이런 엄청난 일에 맘대로 도장 찍고 합의한 다음에 국민에게는 “어쩔 것이냐”는 식으로 발을 뻗을 순 없다. 그런 행동은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CEO들이나 하는 짓이다.
대한민국이 이래도 되는 나라라면 대한민국은 제대로 된 나라가 아니라는 증거이고, 대통령이 이래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대통령은 국민과 민주주의와 헌법과 법률과 정치적 양식을 짓밟고 있는 것이다.
남북 경협은 계속 확대됐지만 대북 사업으로 돈을 번 기업은 거의 없다. 근로자 임금 싼 것만 빼면 북한은 투자처로서 여건이 최악에 가깝다. 자기 공장도 마음대로 찾아갈 수 없고, 자기 회사 근로자 채용과 해고조차 못한다. 돈 못 버는 비효율적 사업은 아무리 정권이 정치적으로 밀어붙여도 수명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대북 지원과 경협을 남한 내부 정치의 연장으로 생각하는 세력의 정권적 책략의 먹잇감으로 놓아 둬서는 안 된다. 대북 경협에 대한 국민적 통제 없이는 대북 경협은 합법성과 정당성과 효율성을 지닐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