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통 자신보다 약하거나 한참 어린 사람과는 싸우지 않는다. 설령 그 싸움에서 이긴다 해도 본전을 찾기는 힘들다. 주변의 시선도 곱지 않을 뿐더러 스스로 자신의 레벨이 낮아진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지난 3월 19일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는 돌연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그리고는 범여권의 대선경쟁에 뛰어들었다. 손 전 지사는 한나라당을 탈당하기 전까지 이명박 대통령 후보, 박근혜 전 대표와 함께 '빅3'로 불렸다. 지지율로는 이·박 두 사람에 크게 뒤졌지만 그를 이·박과 함께 '빅3'로 묶었던 것은 차별화 된 경쟁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내에서도 손 전 지사에 대한 평은 좋았다. 대통령 후보 적합도로는 이·박 두 사람을 앞서기도 했다. '도덕적 결함'이란 단점을 갖고 있는 이 후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란 태생적 한계를 지닌 박 전 대표에 비해 흠결이 없다는 장점도 갖고 있었다. 또 민주화 운동가 출신으로 개혁적 이미지를 갖고 있고 의원, 장관, 도지사 등 입법 행정 경험을 두루 갖춘 그의 경력은 이·박 두 사람을 앞선다는 평도 받았다.

    한나라당 3등 후보였지만 손 전 지사는 "범여권이 가장 두려워하는 후보"라 불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명박-박근혜 두 유력주자로 양분된 한나라당의 구조적 한계에 가로막혀 빛을 보지 못했다. 손 전 지사로서는 억울할 일이다. 더구나 지리멸렬한 범여권과 3%대 지지율로도 1위를 차지하는 그쪽 주자들을 보면서 더 씁쓸했을 법도 하다. '범여권에선 내가 1등 할 수 있는데…'라는 유혹에 빠질 만도 하다. 범여권의 상황도 손 전 지사의 탈당 유혹을 부추길 만 했다. 고건 전 국무총리의 도중하차로 범여권 선두자리가 무주공산이 됐고 대안으로 떠올랐던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역시 애매모호한 행보 탓에 기대만큼의 상승세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결국 정 전 총장 역시 4월말 불출마를 선언했다.

    손 전 지사로선 동토를 벗어날 호기를 잡은 것이다. 손 전 지사를 따르겠다던 범여권 의원들 숫자가 점차 늘어났고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하면서 그는 범여권 합류 타이밍을 찾아 지금의 대통합민주신당(통신당) 경선에 참여했다. 그는 합류와 동시에 '손학규 대세론'을 만들었고 2등인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을 멀찌감치 따돌리며 순항했다. 범여권의 텃밭인 호남에서 정 전 장관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범여권에 안착했다는 판단을 한 손 전 지사 캠프는 이때부터 선거전략을 이명박-박근혜 두 사람과의 대결전선 형성에 맞췄다. '이명박-박근혜 대항마'란 이미지를 심어 '손학규 대세론'을 만들겠다는 판단에서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과 범여권 후보들의 공격에도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경선레이스가 시작되자 그의 이런 전략은 먹히질 않았다. 노 대통령의 노골적인 공격에 어쩔 수 없이 맞대응해야 했고, '짝퉁 한나라당'이란 꼬리표를 붙들고 늘어지는 주자들과의 경쟁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경선이란 절차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쟁을 시작하자 그의 차별화 된 경쟁력은 묻히고 '이명박 대항마' 대신 '한나라당 3등 후보' '짝퉁 한나라당 후보'란 꼬리표만 부각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9월 5일 컷오프(예비경선) 결과가 나오면서 '손학규 대세론‘마저 사라져 이제는 탄탄한 조직을 앞세운 정 전 장관과 단일화 작업으로 탄력을 받고 있는 친노 후보들 사이에서 손 전 지사가 본경선을 통과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확산되고 있다. 잠시 두 자릿수를 넘어섰던 지지율도 떨어져 2등인 정 전 장관과 오차범위 내에서 접전을 벌이고 있다. 

    통신당 내에서는 '손 전 지사의 경쟁력은 한나라당이란 울타리 안에 있을 때 가능하지 범여권으로 넘어오면 차별화 할 수 있는 뚜렷한 장점이 없다'고 말한다. 더 이상 '차별화 된 손학규의 경쟁력'은 보이지 않고 있다. 싸움의 상대를 잘못 선택해 손 전 지사 스스로 레벨을 낮춘 꼴이 된 것이다. 이제 손 전 지사도 범여권의 고만고만한 후보 중 하나가 돼 버린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