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7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강천석 주필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이명박과 박근혜 사이는 위험지대다. 공연히 어슬렁대다간 총 맞기 십상이다. 아프가니스탄이 따로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귀에 거슬리는 한마디에 당장 악담(惡談)이 튀어나온다. 내일 모레 글피가 심판의 날이라 해서 갑자기 생긴 일이 아니다. 진작부터 그랬다. 몇 번 겪다 보면 아예 그쪽은 쳐다보기도 싫다.

    열성 지지자들이 인터넷에 올리는 댓글도 좋게 보아 노사모 수준, 느낌으로는 노사모 형님 수준이다. 노사모와 같은 광적(狂的) 지지자를 거느리지 못한 걸 내심(內心) 아쉬워하고 은근히 부러워했던 한나라당이다. ‘이사모’·‘박사모’로 드디어 그 소원을 성취한 셈이다. 눈자위의 핏발 색깔은 뒤처져서 뒤쫓는 쪽이 더 짙다.

    노사모 정서 수준에 맞춰 정치를 하다 나라를 여기까지 끌어내린 게 노무현 정권이다. 그 정권을 청소하겠다고 들고 일어선 후보들 등 뒤에서 다시 얼씬거리는 노사모 유령의 그림자는 유쾌할 수 없다. 진저리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한나라당과 범여권 사이에서 흔들거리는 사람들이 특히 그렇다. 한나라당은 이 사람들 마음을 얻지 않고선 대선 승리는 엄두도 낼 수 없다. ‘미래의 미(未)자(字)’도 챙기기 힘든 ‘뻘밭 속 개싸움(泥田鬪狗)’을 대하면서 이들 마음에 여러 생각이 오갔을 것이다.

    성향으로 치면 한나라당 쪽에 가까운, 그러나 싸움판에 끼어들어 득 될 게 없다는 계산이 선 사람들도 꼭 해야 할 말을 애써 목젖 너머로 삼키면서 난세를 피해간다. ‘예선이 험악할수록 본선 경쟁력은 더 강해진다’ ‘과거엔 지금보다 훨씬 거칠었다’ ‘승자는 패자를 보듬고 패자는 승복·협력해야 한다’는 공자님 말씀이 이들의 단골 메뉴다. 그러나 이것들은 ‘증명된 법칙’도, ‘역사적 사실’도, ‘성취 가능한 목표’도 아니다.

    ‘예선이 험악할수록…’ 하는 주장이 끌어들이는 근거는 2002년 대선이다. 노무현이냐 이인제냐로 시끄러웠던 민주당이 이회창의 조용한 한나라당을 눌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1997년 이회창이냐 이인제냐로 들썩거렸던 한나라당이 김대중 유일체제(唯一體制)로 숨소리도 들리지 않던 새정치국민회의에 패퇴한 걸 설명할 길이 없다.

    ‘과거에는 이번보다 더…’ 운운하는 설(說)도 마찬가지다. 한국 정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이 이렇게 하루도 빠지지 않고 후보들 개인적 비리 공방으로 시종한 적이 없다. 과거에는 그래도 정책과 이념과 노선의 싸움이 섞여 있었다.

    ‘승자는 패자를… 패자는 승자를…’ 하는 주문(呪文)도 약효가 없긴 한가지다. 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 결선 투표에서 1차 투표 1위의 김영삼이 2위의 김대중에게 밀려났다. 김영삼은 승복하고 텃밭인 부산 경남에서 김대중 지지 유세를 벌였다. 결과는 어땠을까. 박정희가 대한민국의 동쪽을, 김대중은 서쪽을 휩쓸었던 선거 결과에 젓가락 하나 올리지 못했다. 이 난리를 친 이·박의 상대방 지원과 협력은 이뤄지기도, 효과를 거두기도 어렵다.

    한나라당은 지난 4년간 재·보선 때마다 연승 행진을 이어 왔다. 노무현 정권의 실정 덕분이었다. 한나라당은 이번 대선에도 이런 ‘응징의 법칙’이 작동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어 왔다. 한나라당 믿음대로라면 우리 대통령 선거의 역사는 이렇게 써야 한다. ‘전두환의 업적 덕분에 노태우가 이기고, 노태우의 치적이 도와 김영삼이 승리하고, 김영삼의 실패 탓에 김대중이 대통령이 됐고, 김대중의 선정에 힘입어 노무현 정권이 탄생됐다.’ 우스개 같은 소리다.

    우리 국민은 언제부터인가 대선에서 대통령을 내놓은 정당의 책임에 둔감해졌다. 오늘의 후보 얼굴만 보고, 그 후보 정당의 역사는 마음에 담지 않는 데 익숙해졌다. 이번 대선에서 ‘응징의 법칙’이 작동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렇다면 한나라당 필승론이 딛고 선 모든 토대가 허물어진 것이다.

    이 속에서 치러지는 한나라당 경선은 이명박의 여러 문제가 여전히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는 것과 박근혜의 지지가 고정 지지층 너머로 확산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줬다. 이명박은 경선 내내 문제에 시달렸고, 박근혜는 시종일관 지지율 답보에 허덕였다. 그래도 한나라당은 오는 19일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골라 무대에 올려 보내야 한다. 범여권은 이 무대 뒤편에서 남북 정상회담의 ‘민족끼리’ 바람과 극적인 후보 단일화 드라마를 만들어 내느라 여념이 없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12월 19일을 향해 또 한 걸음 다가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