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7일 사설 '대통령 입만 따라하는 경제부총리'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권오규 경제부총리는 15일 “종합부동산세와 양도소득세가 동시에 많이 나와 집 한 채 가진 사람들이 퇴로가 없다고 하는데 서울 강남서 집 팔아 분당으로 이사하면 양도소득세를 내고도 상당한 현금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부동산 보유세를 한꺼번에 2~3배 올리고선 재정경제부가 국세청, 행정자치부와 함께 마련한 합동브리핑 자리에서 한 말이다.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인터넷 언론과의 회견에서 “(세금 무겁다면서) 비싼 동네에서만 살겠다니까 문제지, 싼 동네로 이사 가면 양도세 내고도 돈이 한참 남는다”고 했었다. 권 부총리는 대통령의 이 발언을 다시 복창한 것이다.

    우리네 사람들은 사업이 망하거나 집안에 큰 우환이 생겨 급히 목돈이 필요해졌을 때나 집을 줄여 가는 게 보통이다. 수십 년 세월이 흐른 뒤에도 가족들은 한숨과 피눈물 없이는 그때 그 일을 되돌아보지 못한다. 그런데 대통령과 경제부총리란 사람이 멀쩡한 국민더러 세금을 내기 싫거든 살던 집을 줄여 가라는 것이다. 보통 배짱이 아니다.

    어느 선진국에서 대통령과 정부의 경제 책임자가 함께 나와 이런 간 큰 이야기를 했다간 나라가 벌컥 뒤집혔을 것이다. 권 부총리는 부모 형제와 처갓집 식구들에게도 그렇게 말해 왔는지 궁금하다. 법인세가 부담스러운 기업은 중국과 싱가포르로 이사 가고, ‘삼불정책’이 못마땅한 대학은 미국, 영국으로 이사 가면 그만이라는 얘기와 한가지다.

    권 부총리는 나라 경제를 총괄하는 자리에 있다. 사무관부터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전문관료의 얼굴이기도 하다. 그런 입장이라면 대통령의 얼굴을 올려다만 볼 게 아니라 후배들의 표정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권 부총리는 경제기획원 과장 시절 “스웨덴은 평등과 복지를 앞세우다 불평등을 심화시켰다”는 글을 정부 기관지에 실었던 사람이다. 그랬던 그가 2005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대사로 나가서는 “스웨덴 모델을 배워야 한다”는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올려 대통령으로부터 “공무원들이 돌려 읽어 봤으면 하는 보고서”라는 칭찬을 듣는 사람으로 변했다. 후배들이 권 부총리의 이 변신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넓은 데 나가니 역시 눈이 트이나 보다고 했을까, 아니면 저렇게 변하지 않으면 공무원을 할 수 없나 보다 했을까.

    권 부총리는 작년 7월 인사청문회 때 사채 이자율을 연 40%로 제한하는 법 제정에 대해서도 “자금 공급을 줄여 서민 부담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반대했었다. 그러더니 지난달 슬그머니 찬성으로 돌아섰다. 대통령이 “불법 사금융 피해 종합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다음에 벌어진 일이다.

    옛날 비스마르크란 독일 정치가는 “관료는 영혼이 없다”고 했다. 권 부총리의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대한민국 후배 공무원들이 “그래, 역시 우리는 영혼을 팔고 살 수밖에 없다”고 복창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럽다. 정권이 긴 것만은 아니다. 시작이 있는 것은 끝도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