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3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이인열 뉴델리특파원이 쓴 '인도 기자와의 대화'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인도인 기자 친구가 한 명 있다. 이름은 마유르(Mayur). 카스트(신분)는 푸자리 브라만. 흔히 알고 있는 4개의 카스트 중 브라만이 최고인데, 그중에서도 푸자리 브라만은 제사를 주관하는 최고 중의 최고다. 이 뼈대 있는 집안의 24살 청년은 명문 네루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인도 최대 경제지인 이코노믹타임스의 기자로 3년째 일하고 있다. 인도 기자들은 낮 12시에 출근해서 밤 8시 30분쯤 마감을 하고 귀가한다. 그래서 그에겐 오전 시간이 여유가 있어 집 근처에 사는 나와 함께 아침마다 짜이(인도의 가장 대중적인 차)를 한 잔 하며 인도 조간 신문을 주제로 1시간쯤 대화를 한다.

    며칠 전이었다. 인도의 서로 다른 카스트 간 결혼(Inter-caste marriage)을 주제로 얘기를 나누게 됐다. 인도는 법적으로 카스트를 엄격히 금지하지만 카스트의 장벽은 여전히 엄청나다. 특히 서로 다른 카스트 간의 결혼은 국제결혼보다 더 희귀한 게 인도다.

    그런데 마유르가 지금 다른 카스트의 여자와 사귀고 있다. 여자 친구는 OBC(Other Backward Classes)다. ‘기타 소외계급’ 정도로 해석되는 이 카스트는 쉽게 말해 카스트에도 들지 않는 계급이다. 그런데 최고 계급인 그가 그녀와 결혼까지 생각한다.

    그와의 대화는 자연스레 인도에서 카스트(신분)를 파괴하는 혁명에 대한 주제로 넘어갔다. 실제 벵갈루루나 뭄바이 같은 국제화된 대도시에선 카스트 간 결혼이 종종 일어난다. 신흥 부자들이 카스트의 질서를 뛰어넘는 것이다. 인도가 진정한 발전을 하려면 카스트의 벽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이 깨어 있는 인도인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말처럼 쉽지 않다. 결국 이걸 무너뜨리려면 시간과 함께 신흥 중산층의 탄생이 필수적이다. 경제 성장이 수천 년간 이어온 신분제도의 속박에서 민중을 해방시키는 혁명인 셈이다.

    얘기를 하던 중 마유르는 갑자기 박정희 전 대통령 얘기를 꺼냈다. 박 전 대통령이 근대화에 돌입하고 있는 인도 지식층에선 화제인 모양이다. 그는 “박정희는 혁명을 한 사람”이라고 했다. 내가 “박 전 대통령은 군사혁명을 해 독재를 한 지도자란 이미지가 있다”고 설명하자 그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고 답했다. 그는 “한국에 신분제도가 있었는데 근대화를 성공시킴으로써 단번에 무너뜨린 게 박정희 아니냐. 정주영(현대 창업자)도 그래서 가능했다고 들었다. 인도도 경제 성장을 해내면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카스트에도 변화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박정희에겐 군사혁명가의 이미지와 함께 한국 사회의 신분제도를 실질적으로 철폐한 혁명가란 해석도 가능한 것 같다. 기존의 관습을 단번에 무너뜨리고 새로운 것을 세우는 것이 혁명의 사전적 의미 아닌가.

    개헌 논란이 있지만 어쨌든 올 연말이면 새로운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 마유르가 경제 성장으로 신분 혁명을 이뤄내는 혁명가 지도자를 꿈꾸듯 한국에도 또 하나의 혁명가 대통령이 나오길 꿈꿔본다. 청년실업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내 집 마련 꿈에 애타는 서민들이 내 집을 갖게 하고, ‘사오정’이 두려운 중년들에게 고용 안정을 해 줄 수 있는, 바로 이것들을 실천해낼 수 있는 혁명가 말이다. 그러면 한국 사회의 많은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현란한 말과 구호는 이제 지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