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13일자 오피니언면 '동아광장'란에 강신욱 전 대법관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햇볕 포용정책이 한반도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하여 북한에 퍼 주기를 마다하지 않았는데, 북한은 핵실험으로 되돌려줬다. 그러고는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라는 사람이 북핵은 자위수단일 뿐 대한민국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북한이 핵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않는 것은 대한민국을 인질로 삼아 세계를 상대로 흥정하면서 김일성 일가의 세습 독재체제를 유지하려는 시도임은 삼척동자도 알 만한 일이다. 그런데 또다시 우리의 착각을 부추기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북한에 대해 엄청난 착시현상에 빠져 있었지 않은가? 남북의 정상이 만나 건배하면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소리 높여 합창했고, 그리운 금강산을 찾아 바다로 육지로 줄을 지어 갔고, 남북의 철도가 이어지고 개성공단이 불을 밝혔으니 착시현상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6·25 동족상잔이나 아웅산 테러, KAL기 폭파사건을 남의 나라 일처럼 망각했고, 서해교전을 우발적 사건 정도로 치부해 버리면서 우리 민족끼리 손잡고 머지않아 통일이라도 이룰 것 같은 환상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북한은 핵으로 무장하고 대한민국을 인질로 삼아 버렸다.

    ‘민족끼리’ 환상 부추기는 세력들

    더는 북한의 정체에 대해 오판해서는 안 된다.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북한의 과거 만행을 잠시 접어 두고 그들과 대화하자는 데 반대할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대화도 상대의 정체를 알고 해야 한다.

    대화의 장막을 치고 뒤에 숨어 핵보유국을 지향한 것이 드러난 이상 이제는 북한에 대한 퍼 주기식 짝사랑은 거둬들여야 한다.

    지금까지의 착시현상은 북한에 의해 유도되고, 우리 내부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교묘하게 조종돼 왔다. 보이지 않는 손은 현재도 사회 각계각층에 마수(魔手)를 뻗쳐 계속 우리의 착각과 오판을 부추긴다.

    마수에 걸려 6·25 남침을 통일전쟁으로 미화하고, 주체사상과 선군정치를 찬양하며, 백두산에 올라 어버이 수령 만세를 외쳐도, 소위 혁명열사릉을 찾아 헌화하고, 북한의 핵 보유를 민족적 쾌거라고 떠들어도 많은 사람이 무감각해져 버렸다.

    보이지 않는 손을 찾아 제거해야 한다. 이들은 교묘하게 진보나 좌파로 위장해 입만 떼면 ‘우리 민족끼리’를 부르짖고 ‘자주’를 외치면서 반미를 충동하고 있다.

    진보든 좌파든 헌법의 근본이념인 자유민주주의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손은 진보도 아니요, 좌파도 아니다. 대한민국의 적일 뿐이다.

    실로 오랜만에 공안 당국이 북한 공작원과 접선한 일당을 검거했다니 보이지 않는 손의 털끝이라도 건드린 것 같아 다행스럽긴 하나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또 오판하지 말아야 할 것은 국제 정세의 흐름이다. 국제 정세를 잘못 읽고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공유하는 국가와의 협력 관계가 무너지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있다.

    북핵 문제는 남북한이 머리를 맞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북한은 이미 핵문제에 관한 한 우리의 의사는 거들떠보지 않는다. 민족이냐 동맹이냐를 따지는 일은 보이지 않는 손의 전술에 말려든 것이다.

    ‘퍼주기 짝사랑’ 거둬들여야

    미국이나 일본이 우리와 등을 지고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 들면 한반도는 또다시 우리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보이지 않는 손의 충동으로 국민의 반미 감정이 높아지면 미국은 언제든지 대한민국과의 동맹관계를 파기하고 핵우산을 거둘 수 있다. 그 순간 북한은 한 손에 핵을 들고 또 한 손으로 대한민국을 움켜쥐려 할 것이다.

    위정자들의 판단 잘못으로 나라를 잃었고, 엄청난 국난을 겪었던 쓰라린 역사를 잊고, 또다시 북한의 정체와 국제 정세를 오판하면 피와 땀으로 일으킨 우리의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결과만 남는다.